선현의 묘를 답사하고

빛의 샘, 혼자 있을 때

2007-09-16     관리자

전국에 산재한 130여 명에 이르는 역사 인물의 묘를 찾아 다니고, 또 그들의 일생을 더듬다 보니 어느새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누가 시킨 일도, 회사의 업무도 아닌 이를 그저 좋아 서 했다. 무덤? 깊은 산 양지바른 곳에 노송이 병풍을 치고 산새들이 이리저리 지저귀는 약 간 으시시한 곳일 뿐이다. 왜 그랬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白痴)>를 펴 들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적전, 목사의 기도가 진행되는 5분을 2분, 1분으로 쪼갰어요. 처음 2분은 태어나서 현재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를 생각했고, 다음 2분은 그 동안 나에게 고마움을 주었던 사람을 생각했고, 나머지 1분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어요."
무덤은 그 주인이 이 땅에서 실제로 살았다는 사실이며 증거다. 덕망 높은 정승도, 당대를 풍미했던 정치가도, 천하를 호령했던 장군도, 문필에 뛰어났던 문장가도, 뭇 사내의 애간장 을 태웠던 혁신주의자도 모두 이 땅의 물을 마시고 살았다. 시공(時空)을 초월하면 우리와 똑같이 삶의 애증에 몸부림치는 이웃이란 사실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간 밤에 부던 바람 만정도화(滿庭桃花) 다 지거다
아해는 비를 들고 들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오.
즉 모든 생명체는 영원하지 못하고 시간에 따라 변해 마침내 소멸해 버린다는 변화의 진리 다. 하지만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인간만이 홀로 깨우치지 못하고 생에 집착한다. 결국 반 야(般若)의 지혜란 모든 것은 실체가 없으며 변화의 과정 속에 허상(虛像)이 존재한다는 사 실을 깨닫는 것일 뿐이다.
사람은 죽음에 임박해서야 시간을 나누고 그 가치를 생각할 여유가 생기는가? 생명을 다하 면 흙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 어찌 남은 생을 열심히 가꾸며 살지 않겠는가? 생이 유한하니 삶이 얼마나 고귀한가? 선현의 묘를 찾는 시간은 그들의 시대적 고뇌와 아픔, 정신을 배우 고자 하는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이며 나아가 삶의 질을 높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천안에 소재한 한명회(韓明澮)의 신도비를 쳐다본다. 귀부와 이수는 분명한데, 비문은 누군 가 그라인더(grinder)로 힘껏 갈아 도저히 글자를 알아 볼 수 없다. 머리 글도 겨우 '忠成公 000'만 식별이 가능하다. 당대에는 두 임금의 장인이 되어 절대적 위세를 떨쳤으나 그 권세 만큼이나 원한도 많이 사 사후에는 누군가의 손에 망가져 나뒹굴고 있다.
처신의 귀재가 묻힌 묘를 보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밖에는 가을비가 내 리는 지 뒤뜰에서 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세월은 무한정 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 점이 다가오는 것이다.

* 고재희 님은 충북 괴산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호암미술관 소장 품 관리팀장으로 근무했으며 현재 삼성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실록 소설 문화 재비화(상.하)>를 펴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