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百尺竿頭)

스님의 그늘, 동산(東山) 스님

2007-09-16     관리자

지난 호에서, 동산 스님께서 노보살에게 한생각 바꾸면 나날이 종은 날이 된다고 하셨는데 노보살이 동상 스님에게 깊이 합장을 하고 물러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노보살이 물러간 뒤, 옆에서 자초지종을 지켜본 한 수좌가 "스님, 말은 쉬워도 실제로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까?" 하였다. 이에 동산 스님께서 "백척간두 (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라."하셨다.
글자 그대로 새기면 백척간두는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끝이다. 진일보는 그 높은 대나무 끝에서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마치 벼랑 끝에 겨우 버티고 서 있는 사람에게 앞으로 나 아가는 것과 같다. 백 척의 높은 대나무 끝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대나무를 놓아버리라는 말이다. 허공을 나는 재주가 없는 다음에야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 다가는 죽음뿐이다. 그러니 동산 스님의 말은 그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죽음 속으로 뛰 어들지 않으면 한 생각 바꿀 수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이 말은 본래 중국의 장사 경잠(長沙 景岑) 선사가 한 말이다. <전등록(傳燈錄)>에 보면 경잠 선사가 게송을 읊고 있는데 "높이가 백 척인 대나무 끝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깨달았다고 하지만 진여(眞如)라고 하지 않겠다. 백 척의 대나 무 끝에서 걸어 나아가야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비로소 자기 몸이 되리라." 하였다.
선가(禪家)에서는 옛부터 경잠 선사의 게송에 근거해서 '백척간두'를 수행의 결과로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경잠 선사는 게송에서 그 깨달음의 경지에 집착해서 꿈쩍도 않고 있는 것은, 마치 곡예사가 긴 장대 끝에 매달려 있는 것보다도 의미가 없다고 한다. 수행인이 무한히 향상해서 도달해야 하는 경지는 혼자서 즐기는 깨달음의 경지가 아 니라 그 경지에서 밖으로 나아가 시방세계, 즉 중생의 세계로 뛰어들어가 중생을 이롭게 하 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安住)하지 않고 이타행(利他行)을 하기 위해서 중생세계로 뛰어드는 대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백척간두 진일보'이다. 어떻게 해야 백척간두에서 앞으로 나아가 대전환을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백 척의 높은 대나무 밑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다. 백척간두에 올라서 발을 떼면 떨어져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힘껏 붙잡고 놓지 않는다. 얼마나 힘들여서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인가. 얼마나 힘들여서 어렵사리 쌓아올린 부(富)이며 지위이며 권력인 가. 그것들을 잃으면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감히 버리지 못하는 것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 진일보이다.
진일보 못하는 것은 살고자 분별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분별하고 헤아려서 집 착하기 때문이라고 선사(禪師)들은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분별하고 헤아리고 집착하는 마음 을 버리라고 한다.
이같이 버리는 것을 선가에서는 흔히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한다. "놓아버려라"하는 이 말은 조주(趙州) 선사의 단골 메뉴이다. 마치 조자룡이 헌칼 휘두르듯이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 지 않는다. 엄양(嚴陽)이라고 하는 선객(禪客)이 조주 선사를 찾아가서 물었다. "아무것도 가 지고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조주 선사 "방하착!"하였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놓아버리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는 자만심이 엄 양의 코 끝에 걸려 있는 것을 조주 선사는 그냥 보아넘기지 않은 것이다.
동산 스님도 조주 선사의 방하착과 같이 법을 묻는 이가 있거나 혹은 상당법문 중에서도 ' 백척간두 진일보'라고 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휘두르며 즐겼다. 어느 정도인가 하 면, 어느 날 과년한 딸을 데리고 찾아온 부인이 스님에게 하소연 하는데 사정은 이러했다.
딸의 혼처 가운데 부모가 원하는 집안은 부자이고 사회적 지위도 상당한데 딸이 싫어하고, 딸이 시집가겠다고 고집하는 집안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도 지체가 낮다. 어머니가 딸을 이 리저리 설득하다 못해서 딸에게 "네가 좋아하는 총각이 진실로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네가 부자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총각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니 부잣집 총각에게 시집가거라."하였다.
그러나 딸은 돈보다도 사랑이 중하며 남에게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진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힘들고 고생한다 해도 가난한 집 아들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우겼다.
두 모녀의 생각은 긑내 일치하지 못했다. 그래서 두 모녀는 동산 스님에게 어떻게 하는 것 이 좋은지 물으러 왔다고 했다.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스님께서 이 때도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 하셨다.
각설하고, 선사들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에 얽힌 이야기.
중국에 구지 선사가 있었다. 본명은 알 수 없고 항상 칠구지불모 다라니를 외우므로 얻어진 이름이다.
어느 날, 구지 선사가 사는 초암(草庵)을 찾아온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가 삿갓을 쓴 채 앉아 있는 구지 선사를 세 번 돌고서 "자, 한 마디 하시오. 그러면 이 삿갓을 벗겠소."하 였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선사라면 선(禪)의 깊은 뜻을 한 마디로 표현해 보라. 그러면 삿 갓을 벗고, 인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구지 선사는 무례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비구니 는 세 차례 똑 같은 질문을 하고 구지 선사는 끝내 대답을 못하고... . 비구니가 별 볼 일이 없으니 떠나야겠다 하고 문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구지 선사 "날도 저물었으니 묵어 가 라."하자 실제 비구니가 "한 마디 하면 머물겠다."하였다. 그러나 구지는 선사 이때도 대답을 못했다.
구지 선사 스스로 자기는 장부(丈夫)의 모양은 하고 있으나 장부의 기개가 없음을 한탄하고 분발심이 크게 일어 날이 새면 초암을 떠나 구도(求道)의 길에 오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나타나 가까운 시일 안에 육신(肉身)을 가진 보살이 찾아올 것 이니 떠나지 말라는 꿈을 꾸었다. 초암을 떠나지 않고 하루를 여삼추(如三秋)로 육신 보살을 기다리는 구지 선사를 하루는 천룡(天龍) 선사가 찾아왔다. 구지 선사는 이 분이야말로 호법 신장이 말한 육신보살이라 믿고 정중하게 맞이하였다. 그리고 실제 비구니를 만나 당한 일 과 그 뒤의 심경을 숨김없이 말하고 온 몸과 온 정신을 기울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때 천 룡 선사, 아무 말없이 다만 손가락 하나를 세워 구지 선사 앞으로 쑥 내밀었다. 구지 선사 그것을 본 순간, 홀연히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부터 선이나 불법의 뜻을 물으면 다만 손 가락 하나를 세워서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구지 선사에게 동자 한 아이가 시봉을 하고 있었다. 구지 선사가 암자에 없을 때 주 가 찾아와서 구지 선사가 불법을 어떻게 설하는가 물으면 구지 선사와 같이 항상 손가락 하 나를 세워서 모였다. 이 사람들에게서 자기 흉내를 내는 동자의 이야기를 들은 구지 선사, 어떻게 해서든 흉내내는 동자를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동자에게 "내가 없을 때 찾아온 사람들에게 네가 불법을 보여준다고 하는 게 사실이냐?" 물었다. 동자가 자신만 만하게 "네, 그렇습니다."고 대답했다.
구지 선사 "그런가, 그러면 어떤 것이 부처인가." 동자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서 쑥 내밀었 다. 그러자 구지 선사 감추고 있던 칼을 들어 동자의 손가락을 내리쳤다. 아파서 소리쳐 울 며 달아나는 동자를 뒤에서 선사가 불렀다. "동자야!"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동자에게 구지 선사 손가락을 세워서 내밀었다. 순간 동자가 깨달았다고 한다.
구지 선사가 임종할 때, 제자들에게 "나는 천룡 화상에게서 손가락 하나로 깨달음을 얻었다.
덕분에 죽을때까지 불법을 설하였는데 손가락 하나로 부족함이 없었다." 하였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