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약물과 수행의 효율성

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국정토

2021-05-03     이상헌
영화 <사이트 이펙트>.

2018년 개봉한 영화 <사이트 이펙트>. DNA 조작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연구를 담당한 에릭과 율리아. 율리아는 연인 에릭에게 암이 재발하자 DNA 조작 혈청을 주입한다. 에릭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 그들은 엄청난 과학적 성과에 흥분한다. 하지만 부작용이 그들을 옥죈다. 새로운 혈청을 찾고자 DNA 연구는 계속되고…. 인류 최고의 과학적 발견일까 아니면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일까. 

영화 <사이트 이펙트>.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존재의 현재 상태를 불완전한 것, 미완성의 것으로 여기고 발전된 과학과 기술로 인간 존재 자체와 그 처한 상황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불교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고 지난 호에서 언급했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생로병사의 고통과 마음의 결함에서 찾는다면,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목표로 삼는다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주장은 불교와 더 비슷한 느낌이 든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주장처럼 기술적 수단을 통한 정신 능력의 향상(enhancement)이 고락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과 인격적 완성이라는 불교 수행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술적 수단에 의한 인간 향상이 불교의 가르침과 양립 가능하며, 수행의 효과적인 방편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적 수단을 이용한 인간 향상

최근 국내외에서 미래의 인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뭉뚱그려 언급할 수 있는 이런 논의의 배경에는 20세기 후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NBIC(나노기술, 생명공학, 정보통신기술, 인지신경과학)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들의 발전이 있다. 그리고 그런 기술들의 적용 대상에 인간 자신을 포함하는 상상도 있다. 미래의 일이긴 해도 현재 시점에서 판단할 때, 이런 기술들을 인간에게 적용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현재보다 뛰어나게 만드는 일이 원리상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공상과학 소설 느낌이 있지만 인간과 기계의 결합 형태인 사이보그, 혹은 최적의 유전자들만 선택해서 탄생한 맞춤 아기(designer baby), 더 나아가서 다른 종의 유전자를 흡수한 트랜스제닉 인간(혼종 인간) 등도 기술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사회문화적으로 허용된다면, 지금까지 타고난다고 생각했던 개체의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특성을 기술적으로 향상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연구들이 다수 있는데, 일례로 영국 런던대학교의 하워드(Claire Haworth) 등이 주도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지능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변수를 50% 정도 발견했다고 한다. 『행동유전학』지에 게재된 2009년의 논문을 보면 하워드 등은 호주와 영국, 미국 등에 거주하는 11,000쌍의 쌍둥이 연구에서 지능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적 변수들을 다수 발견했다고 한다. 물론 지능 관련 유전자가 매우 많으므로 현재로서는 유전자 조작만으로 지능의 향상을 꾀할 수 없지만, 미래에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좀 더 손쉬운 인간 능력 향상의 방식으로 신경 약물에 주목하고 있다. 치료용 약물로 개발된 것이지만 정상인에게도 효과를 나타내는 것들이 있다. 아마도 인간의 뇌와 신경기전(neural mechanism)에 관련한 이해가 과거보다 크게 증진된 덕분일 것이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메틸페니데이트(methylphenidate)는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집중력을 향상하고 각성 상태를 지속시켜 수면을 줄여준다. 이런 효과 때문에 미국의 다수 대학생과 직장인이 이 약물을 애용하고 있다. 발작 수면이라는 수면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약물인 모다피닐(modafinil) 역시 각성 효과가 있어 수면을 줄이거나 피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모다피닐은 단지 잠을 쫓는 데 그치지 않고 활발한 정신 활동을 보장한다. 이것뿐만 아니라 부정적 정서를 감소시키고 행복감을 증가시키는 신경 약물과 기억력의 감퇴를 막고 기억 능력을 증진하는 신경 약물도 있다. 이른바 스마트 약물(smart drug)의 일반적 보급도 머지않았을지 모른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술적 수단을 통한 향상의 효과를 불교적 수행, 특히 명상의 효과에 대비해 설명하려고 한다. 이들은 기술적 수단, 이를테면 스마트 약물이 불교적 수행의 효율성을 높여주고 어떤 부분에서는 수행의 과정을 대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스마트 약물이라고 하면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 속 행복의 알약 ‘소마’가 떠올라 거부감부터 들지만 진지하게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깨달음의 방편으로서 기술적 인지 향상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 명상 수행을 강조한다. 명상은 수행자에게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다준다. 우리의 논의와 연관 지어 보면, 명상은 지각 능력에 긍정적 변화를 불러온다. 명상 수행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지각과 이해 증진을 경험할 수 있다. 명상하면 일상적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전보다 불만족, 혹은 고(苦, duhkha)의 느낌이 줄어든다고 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인 앤드류 펜턴(Andrew Fenton)은 불교 명상법의 가치가 수행자의 인지적 역량 향상에 있다면 불교적 관점에서는 기술적 수단을 통한 인지적 역량 향상에 대해서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불교에서는 수행 과정에서 다양한 방편 활용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인지적 역량 사이의 관계에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인지적 역량을 단순히 지능으로 이해하지 않고 지각, 이해, 집중, 기억, 감수성 등 포괄적인 의식적 활동 능력으로 해석한다면, 깨달음을 위해 인지적 역량을 향상해야 한다는 생각은 틀리지 않은 듯하다. 다른 모든 것이 같은 조건이라면 인지적 역량이 탁월한 쪽이 높은 수준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 유리하지 않을까? 자기 자신과 세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통찰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붓다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럴 것 같다. 

펜턴은 서술기억(declarative memory)과 불교 수행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는 인지 향상 약물로 서술기억을 개선하는 게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술기억은 사실 개념, 사건 등의 정보를 불러오는 능력이다. 명상 수행을 통한 마음챙김(mindfulness)의 계발은 각 순간에 대한 의식을 계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위빠사나 명상을 일상적 삶에 통합시키는 것은 서술기억에 의존한다고 펜턴은 말한다. 

불교 수행자의 첫째 의무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고에 대한 공감적 반응, 그리고 고를 줄이려는 욕구와도 관련 있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길들을 탐색하는 것이 옳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명상과 도덕적 품성의 수행으로 자비의 마음을 키웠다. 만일 신경 약물 등과 같은 기술적 수단이 여기에 도움이 된다면 반대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또 다른 트랜스휴머니스트인 제임스 휴즈는 존재의 진정한 본성과 모든 존재와 사건 사이의 인과적 연결, 지속해서 변화하는 존재의 양상을 꿰뚫어 보는 능력인 반야(prajna)를 지성적 분석과 집중된 넓은 마음의 심적 명료함이 결합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야는 새로운 관념과 경험에 대한 개방성과 인지적 능력 또한 인지적 편향, 즉 잘못된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마음의 습관을 회피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기술적 향상의 수단들이 개인에게 있어 이런 능력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트랜스휴머니즘이 지지하는 인간 향상의 기술들을 불교 수행자가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선용 되기만 한다면, 다시 말해 몇 가지 제한 조건을 둔다면 신경 약물과 같은 기술적 수단을 불교적 수행에 활용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불교의 수행법: 명상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 붓다가 가르친 수행법이 마음챙김 명상이다. 명상의 궁극적 목적이 존재의 삼특상인 무상, 고, 무아의 통찰에 도달해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위빠사나 명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자연 박사는 붓다 명상법의 핵심 경전인 『대념처경』과 『안반수의경』에 모두 ‘사띠(sati)’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불교의 명상법을 한 단어로 말하면 ‘마음챙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설명한다. 사띠는 영어로 mindfulness, 우리말로 마음챙김으로 번역한다. 팔리어 sati는 ‘기억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추상명사로서 기억 혹은 억념을 가리킨다. 

마음챙김은 우리의 현상적 경험을 주목하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고 잊지 않아 ‘지금 여기’에 깨어있도록 유지하는 수행이다.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달려가지 않고 지속해서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해야 한다. 그리고 주의를 집중하는 대상 영역을 객관화시키고 개념을 통하지 않고 직접 그것의 있는 그대로를 꿰뚫어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붓다의 명상법은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모두 포함한다. 사마타 수행은 마음을 하나에 고정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마음이 통일되고 고요해지는 삼매에 드는 수행법이다.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삼매는 위빠사나의 높은 통찰지(通察智)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상적 경험들을 관조해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통찰지를 얻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는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행이다. 일반적으로는 통찰지를 계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위해 삼매가 필요하므로 사마타 수행을 앞세우고, 이어서 위빠사나를 닦을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위빠사나로도 삼매가 길러진다고 하는데, 그것을 찰나 삼매라고 부른다. 

붓다는 마음의 고요함, 즉 삼매를 계발하는 것이 통찰지를 기르는 데 필수적이기는 해도 삼매만으로는 무명에서 벗어나 모든 번뇌가 소멸하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붓다는 6년간 온갖 고행을 시도하고 요가 수행자의 제자도 되어 봤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었다. 마음의 고요함만으로는 생사윤회의 근본인 번뇌를 끊지 못해서다. 모든 존재와 인생의 본 모습을 바로 보고 모든 번뇌를 소멸시키는 데는 위빠사나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불교의 명상법을 위빠사나라고 특징짓는 것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기술을 통한 향상은 바른 방편인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술을 이용하는 수행자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면 기술을 통한 향상이 좋은 방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는 무아론(anatman)을 주장하여 우리의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자아 혹은 개체적 자아는 서로 독립적인 다섯 가지 구성요소, 즉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수행자에게 끼치는 해악이란 오온 가운데 하나를 잘못 취급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색온(色蘊)을 살펴보면 그 해악은 마치 성형수술에 중독된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신체의 형태나 기능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수온(受蘊)과 관련해서는 감각적 쾌감을 위해 기술적 수단을 이용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행온(行蘊)과 관련해서는 욕구나 의욕의 과잉 혹은 편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상온(想蘊)이나 식온(識蘊)과 관련해서는 기술을 통한 향상이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올 경우를 생각하기가 더 쉽다. 지각 능력의 향상이나 인식적 판단 능력의 향상은 불교적 수행이 지향하는 방향과 같기 때문이다. 

기술을 통한 향상의 수단을 활용하는 수행자는 주로 색온, 수온, 행온과 관련해서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만 주의한다면 불교 수행에 그런 수단을 활용하는 것에 긍정적이라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처럼 기술적 향상 수단이 깨달음을 위한 적절한 방편일지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불교 수행에는 갖가지 수단 활용을 허용한다. 이런 수단들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다리 역할을 한다. 사다리는 지붕에 오르고 나서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것만 아니면 어떤 방편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수행 과정에서 신경 약물을 이용하는 것을 이처럼 ‘사다리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약물은 보조 수단을 넘어 핵심적 방법으로 취급될 우려를 낳는다. 약물 의존이 생길 것이며, 약물 의존은 사다리를 버리듯이 약물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유전적 조작이나 신경 보철 등 영구적 혹은 반영구적 수단들은 수행의 결과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사다리에 비유될 수 없지 않을까? 

수행으로 우리가 얻으려는 진리는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는 통찰이다. 일체의 무상함을 깨닫고 자아에 대한 집착 또한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기술적 향상 수단을 이용하게 되면, 자아의 느낌이 오히려 강화되고 자아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더 커지지 않을까? 펜턴이 언급했던 이분법적 사고, 다시 말해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 정상 기능과 기능 이상, 인지적 우월성과 열등함 등으로 분별하여 생각하는 마음이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향은 펜턴의 주장과 달리 쉽게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의 양립 가능성, 더 나아가서 결합 가능성을 언급하며, 자신들이 지지하는 기술을 통한 인간 향상이 불교적 수행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좀 더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오늘 살펴본 기술을 통한 인간 향상만 해도 그것이 불교적 수행에 도움 요소가 될지, 아니면 오히려 수행자가 극복해야 할 장애를 하나 더 보태는 것이 될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상헌
서강대 전인교육원 교수. 저서로는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등이 있다. 
「붓다의 시선으로 본 인공지능」,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등 논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