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彌勒] 내 안의 기적이 필요할 때!

미륵순례

2021-04-27     불광미디어

가난한 민초의 눈물진 땅마다 미륵이 우뚝 섰다. 땅속에서 불쑥 미륵이 솟았고, 현몽대로 가보면 미륵이 서 있어 예불하여 모셨다. 뱃사공이 강에서 건져 올린 미륵도 있고, 바다에서 끌어올려 모신 미륵도 있다. 미륵은 우리 땅 어디서나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돌부처다. 들길을 걷다가, 등산하다가도 햇볕 잘 드는 바위 면에 거칠게 조각한 마애불을 마주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아 윤곽이 흐릿하고, 그 생김새도 절집의 잘생긴 불상과는 달리 푸근한 얼굴이지만 옛사람들이 간절히 치성 올리던 부처님이 틀림없다. 친숙하면서도 왠지 경외감과 묵직한 위용이 느껴지는 얼굴, 아련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불상들…. 

미륵은 까마득한 미래에 이 땅에 내려와 중생을 구원하기로 예정된 부처님이다. 현실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 미완의 꿈, 그러나 끝내 이루고야 말리라는 희망과 믿음이다. 그래서 민초는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고 압제자들의 억압이 가혹할수록 곳곳에 미륵을 세우고 기적을 염원해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눈물을 닦아주며 희망을 꿈꾸게 한 부처님, 이름 모를 들녘에서 혹은 깊은 산속에서 누군가의 마음 공양을 기다릴 부처님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그래서 경건하고 경쾌하다. 

여러 마애불과 불상을 보다 보면 미륵이 맞는지 갸웃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개 하생 전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은 의자나 연화좌에 앉았거나 혹은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처럼 두 손으로 긴 꽃가지를 쥐고 있는 모양의 ‘용화수인(龍華手印)’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보통 10m 이상의 거불 입상은 미륵 관련 경전에 나오는 “석가불 장육(丈六), 미륵불 십육장(十六丈)”에 근거한 미륵불이라고 보면 된다. 이 경우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애 준다는 의미로 오른손 끝을 위로 향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하는 시무외인(施無畏印), 그리고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으로 왼손 끝을 아래로 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한다. 

여기 소개한 미륵은 모두 규모가 크고 지역에서 상징적인 불상이다. 고려 초부터 조선 시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미륵은 전국적으로 수백 기가 남아 있는데, 주로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집중돼 있다. 천연암벽에 마애불 형식으로 조성한 불상은 옛 위치를 지키고 있지만, 많은 소불(小佛)들은 도시 변천과 절의 흥망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수고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절간 당우에 잘 모셔진 미륵이 있는가 하면 덩그러니 폐사지를 지키는 미륵도 있고, 무속인의 절밥을 먹는 미륵, 지역 박물관의 정원석처럼 서 있는 미륵도 있다. 

마을의 수호불인 미륵불, 밭두렁과 야산에 방치돼 있어 아쉬운 미륵, 옛 절터를 지키는 돌미륵을 찾아가는 길은 내 안의 기적을 염원하는 길,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되어줄 것이다.

 

화순 운주사 석불군 

빼뚜름한 탑들과 발길에 차일 듯한 돌부처들

하룻밤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완성하려 했으나 미처 와불을 일으켜 세우기 전에 새벽닭이 울어 천지개벽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운주사(雲住寺).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창건했는데,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고 선미(船尾, 배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한다. 한편으론, ‘운주도사’의 기도에 감명한 천제가 천불천탑과 절을 지어주고 운주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운주사는 임진왜란 때 훼손된 것을 중건하고 많은 시주와 중창불사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1942년까지만 해도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석탑 12기, 석불 70기만 남았다. 그러나 이 정도만 해도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늘어선 빼뚜름한 탑들과 툭툭 발길에 차일 듯한 돌부처들이 정교하고 세련되지는 못했어도 꼭 우리네 모습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특별한 공간이다. 

불상의 크기는 10m 이상의 거불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9층 석탑과 석조 불감, 원형 다층석탑은 보물로 지정되었고,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부부 와불(臥佛)도 빼놓을 수 없다. 경내 곳곳에 배치된 탑과 석불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대웅전 뒤쪽의 전망대인 공사바위에 올라서면 일주문을 향해 죽 늘어선 돌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불천탑의 절정인 ‘부부 와불’은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운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천지가 개벽하고 무려 천 년 동안이나 태평성대가 지속한다고 한다. 수많은 탑과 석불, 분명치 않은 창건설화, 언젠가 일어날 ‘부부 와불’이 운주사를 더 신비롭게 한다. 

일어나면 천지가 개벽한다는 화순 운주사 와불은 새벽닭이 울어 미처 일어나지 못해 아직 와선(臥禪) 중이다. 

 

화순 운주사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천태로 91-44
가는 길 : 광주 제2순환도로-효덕 교차로-817번 도로-칠구재 터널-효산 삼거리-평리 사거리-도암삼거리-운주사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천지개벽의 비기를 품다

수직 절벽에 마애불 한 기가 연꽃대좌에 앉았는데, 준엄한 얼굴에 파격적인 미소가 충격적이다. 우뚝한 코, 앞으로 쑥 내민 두툼한 입술,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 눈매가 참배객의 마음을 단숨에 꿰뚫는 듯하다.

길게 늘어진 두 귀, 뾰족한 육계에 이마에는 백호가 박혀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가늘게 선각(線刻, 선으로 새김) 되었고,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의 법의(法衣, 가사나 장삼)에 가슴 아래로 군의(裙衣, 허리에서 무릎 아래를 덮는 긴 치마 모양의 옷으로 불보살이 입는 하의)의 띠 매듭이 가로질렀다. 양손은 배 위에서 쫙 펴서 맞댔고 흘러내린 옷 주름은 대좌의 상대까지 늘어졌다. 

이 마애불은 민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봉을 받아온 미륵으로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백제 위덕왕이 검단 선사에게 부탁하여 불상을 조각하고 그 위에 동불암이란 공중누각을 지었다고 해서 ‘동불암 마애불’로도 불렸다. 더욱 놀라운 점은 미륵불의 비기(秘記)에 관한 것인데,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손화중의 ‘비기탈취사건(秘記奪取事件)’이다. 

‘임진년 8월, 무장 대접주 손화중이 교도들과 함께 청죽 수백 개와 마른 동아줄 수천 발로 부계를 만든 다음 도끼로 석불의 배꼽을 깨부수고 그 안의 비기를 끄집어냈다.’ 미륵불의 배꼽에서 비기를 꺼내면 천지가 개벽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손화중이 이 비기를 끄집어냈다는 이야기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졌고 손화중의 접(接)으로 수만의 백성들이 몰려들어 동학농민운동의 불을 댕겼다. 당시 조선왕조가 곧 망할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동학사상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이 미륵이 있었다. 도솔암은 선운사의 산내 암자로 원래는 상·하, 동·서·남·북으로 여섯 개의 도솔암이 있었다고 전한다. 마애불의 위쪽 365개 계단을 오르면 조선 초 5대 걸작 불상 중 하나로 손꼽히는 내원궁의 선운사 지장보살좌상을 만날 수 있다. 

큰절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답게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한겨울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동백꽃과 도솔천에 어리는 단풍, 여름 끝물에 경내를 붉게 물들이는 꽃무릇 융단은 현기증 나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매표소에서 도솔암까지 3km 길은 새소리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기분 좋은 숲길이다. 

손화중에게 배꼽의 비기를 뺏긴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동학농민운동의 불을 댕긴 미륵이다. 

 

고창 도솔암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도솔길 294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선운대로-삼인 교차로-선운사-도솔암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아들 점지하는 미륵

파주 광탄 용미리에 있는 고려 시대 불상으로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라고도 한다. 

천연암벽에 불신을 조각하고 그 위에 목, 머리, 갓 등을 별도로 조성하여 결합한 2구의 병렬형 불상으로 17m 높이의 거불이다. 자연암벽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는 고려 때 유행을 따랐다. 우측 불상은 사각의 갓을, 좌측 불상은 원통형 관을 쓴 모습이 매우 토속적이다. 머리에 갓이나 천개(天蓋)를 씌워 불상을 보호한 것 역시 고려 때 유행 방식으로 ‘제비원 미륵’과 흡사하다. 

가늘고 긴 눈, 큰 코, 꾹 다문 큰 입 등 이목구비가 대체로 큼직큼직하다. 우측 불상은 두 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려 합장했다. 좌측 불상은 두 손으로 연꽃가지를 들었는데 관촉사 은진미륵과 비슷한 모습이다. 통견의 법의가 온몸을 감쌌고 가슴에는 군의를 묶은 띠 매듭이 보이며 U자형 옷 주름이 굵고 선명하다. 

한눈에 봐도 사각의 갓을 쓴 불상은 남상(男像)이고, 둥근 갓을 쓴 것은 여상(女像)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자식이 귀했던 고려 선종(宣宗)은 원신궁주까지 맞이했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후대를 염려하며 시름에 잠겨있던 궁주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2명의 도승이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우린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오. 지금 매우 시장하니 먹을 좀 내주시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해서 임금에게 꿈을 이야기했고, 왕은 곧 장지산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라 했다. 얼마 후 장지산 아래에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왕은 몹시 상서로운 일이라 여겨 즉시 그 바위에 2명의 도승을 새기라 명하고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더니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태어났다. 

용미리 마애불은 지혜나 자비와는 거리가 멀고 대신 카리스마가 넘친다. 주변에 새겨진 ‘세종대왕왕생정토(世祖大王往生淨土)’, ‘내미륵여래(來彌勒如來)’라는 명문과 이 마애불의 카리스마를 보고 있노라면 왕의 극락왕생과 미륵의 하생은 마치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 같다. 

아들을 점지한다는 미륵,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은 자비와 거리가 먼 대신 카리스마가 넘친다.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주소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8
가는 길: 자유로 문발IC-금촌 교차로-장곡검문소 교차로-용미리 석불입상

 

충주 미륵대원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그리움 머물던 그곳

하늘재, 계립재, 새재에 둘러싸인 험준한 골짜기 북쪽에 총면적 8만 454m2에 달하는 충주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가 숨어 있다. 오랜 발굴조사로 출토된 유물은 이곳이 고려 초기의 대원사지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미륵대원지’임을 밝혔다. 

가로세로 10m, 높이 6m의 법당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석불입상을 봉안했다. 측면과 후면 석벽은 감실(龕室, 불상 등을 봉안하기 위한 곳)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을 부조하고 그 위에 목조건물을 세운 흔적이 역력하다. 경주 석굴암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고려 시대의 유일한 석조·목조 구조의 반축조(半築造) 석굴사원이다. 

석굴에 대해서는 태조 왕건 관련설, 충주 유씨 지원설 등이 있지만 확실치 않고,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이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은다. 신라 마의태자 일행이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남매의 불사가 이뤄졌다. 마의태자는 이곳에 석굴을 만들고 북쪽으로 불상을 조성해 누이가 있는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고, 누이 덕주공주는 월악산 덕주사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했다는 이야기다. 절터에는 석불입상과 석굴 벽의 여래좌상과 삼불좌상, 오층석탑, 삼층석탑, 석등, 귀부, 당간지주, 대좌 등의 유물이 남아서 옛 시절을 증명하고 있다. 

본존불인 미륵불은 4개의 화강암으로 조성한 11m 높이의 대불이다.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있고 얼굴은 둥글고 평평하다. 둥근 눈썹, 직선으로 감은 눈, 입술은 작지만 두터우며, 목에는 삼도가 간략하다. 팔은 형체만 간략히 표현했고 입체감 없는 불신에 수인과 법의도 형식적이다. 갓을 쓴 불두와 양감 없는 원통형의 신체, 옷 주름에서 당시의 유행을 살펴볼 수 있다. 좌측의 보살상은 의자에 앉은 반가좌상으로 매우 희귀한 경우라고 한다. 

함께 찾아보면 좋은 덕주사 마애불을 만나려면 덕주사에서 영봉 쪽으로 1.5km를 올라야 한다. 월악산 등산을 병행하면 더없이 좋다. 근래에 중건한 마애불 바로 앞에 있는 절이 원래의 덕주사이고 지금의 덕주사는 훗날 재건한 것이다. 

미륵대원지의 석불에는 망국의 한을 달래던 마의태자의 누이를 향한 그리움이 서렸다. 그래서 월악산에서 마애불을 조성하던 누이 덕주공주가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 

 

충주 미륵대원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8
가는 길 :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괴산교차로에서 수안보 방면 – 미륵대원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민초 굽어살피는 커다란 눈망울

가파른 계단 끝에 있는 해탈문을 통과하면 혜명 대사가 968~1006년에 지은 천년 고찰 관촉사가 펼쳐진다. 경내는 대광보전과 미륵전으로 나뉘는데 미륵불상이 단연 압도적이다. 아파트 6층 높이인 18m의 국내 최대 석조보살상이며, ‘은진미륵’으로 더 유명하다. 고려 초기 충청지방에서 유행하던 미륵신앙을 상징하는 걸작으로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다. 그 옛날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느닷없는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놀라 둘러보니 아이는 보이지 않고 커다란 바위가 막 땅속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아낙은 한달음에 마을로 뛰어갔고 이 소식은 곧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왕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 여겨 금강산에 머물고 있던 혜명을 불러 불상을 조성하라 명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은진현 불우조」에 ‘돌미륵의 높이가 54척이나 된다. 고려 광종 대에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오른 것을 승려 혜명이 쪼아 불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관촉사 사적비」에도 ‘승려 혜명과 100여 명의 공인(工人)을 은진으로 보내 광종 21년(970)부터 목종 9년(1006)까지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후삼국 경쟁에서 패권을 차지한 고려의 위정자들이 혼란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국가적으로 조성한 불상으로 보인다.

큰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조성한 불상은 장방형 얼굴에 눈·코·입이 아주 큼직하고 뚜렷하다. 크게 뜬 눈망울은 길게 옆으로 째졌고 넓은 코와 꾹 다문 두툼한 입술은 토속적이면서도 조금 괴이한 느낌이 든다. 머리에 비해 어깨가 좁고 신체도 왜소해 보인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썼는데 금속판을 덧씌워 장식한 흔적이 엿보인다. 관 위에는 2층의 사각형 보개(寶蓋, 보륜 위 덮개)가 있고 네 귀퉁이에 청동 방울을 매달았다. 투박한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생중품 수인을 결했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로 청동제 연꽃 줄기를 잡았다.

은진미륵은 ‘나라가 평안하면 몸이 빛나고 상서로운 기운을 내지만 환란이 생기면 온몸으로 땀을 흘리고 손에든 연꽃도 색을 잃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늘날 미륵불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은 구한말 때 일본인들이 보관 끝에 매달린 금부처를 훔쳐 가고 이마의 백호를 깨뜨렸기 때문이라고.
미륵불 옆 삼성각에 오르면 논산 천변의 너른 들판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백제의 계백과 5,000 결사대가 그 뼈를 묻은 황산벌이다. 

은진미륵은 어디를 굽어보고 있을까. 나라가 평안하면 몸이 빛나며 상서로운 기운을 내고, 환란이 생기면 땀을 흘리고 손에 든 연꽃도 색을 잃는다. 

 

논산 관촉사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
가는 길 : 논산천안고속도로 서논산IC – 광석교차로 – 부적교차로 – 관촉사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집 지켜주는 수호신 제비원 미륵

자연암벽에 불신을 새기고 그 위에 별도의 불두를 만들어 조성한 불상으로 불두 2.4m, 전체 높이 12m의 대형 석불이다.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안동 북쪽 이천동 제비원에 있는 불상이다. 흔히 ‘제비원 미륵’으로 불린다. 연미사 옛터를 지키는 불상으로, 634년(선덕여왕 3) 명덕이 세운 연미사는 오랫동안 폐사로 있다가 1918년에 복원되었다. ‘제비원 미륵’은 소발에 육계가 있고 이마에 백호가 양각되었다. 머리는 파손되었으나 얼굴은 완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미소를 띤 풍만한 얼굴에 긴 눈, 우뚝한 코, 두꺼운 입술이 장중하면서도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삼도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도 연주문(連珠紋, 구슬 같은 원형이 연속적으로 그려진 무늬)을 새겼다. 바위에 새긴 불신에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의 법의와 옷 주름이 표현되었다. 왼손은 가슴높이로 들어서,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 수인을 했다. 불상의 발아래에는 음각한 단판연화문의 대좌를 갖추었다. 일제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불상 위에 닫집이 있었다고 한다. 

‘제비원 미륵’은 중품하생 수인으로 보아 아미타불이지만, ‘머리만 조각해 만든 미륵불’ 이야기가 서려 있다. 가장 뛰어난 조각가의 꿈을 갖고 정진한 형제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조각가는 둘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실력을 겨뤘다. 부지런히 돌을 다듬고 갈던 동생과 달리 빈둥빈둥 놀던 형은 머리만 잘 다듬어서 바위 위에 얹어 완성했다. 약속한 날까지 미륵불을 조각하지 못한 동생은 죽었고, 형이 완성한 미륵불이 바로 ‘제비원 미륵’이란 슬픈 이야기다. 이 불상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려는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줌과 동시에 전통 무속인 성주 신앙을 상징한다. 성주는 집을 짓고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가족의 건강을 축원하고 자연재해로부터 보호해준다. 그래서 안동 제비원은 성주신의 고향이고 ‘성주풀이’와도 관련이 있다.

성주풀이는 무당이 성줏굿을 할 때 부르는 노래, 백성들이 지신밟기를 할 때 부르는 덕담 형식의 노래가 있다. 두 노래 모두 성주의 본향이 안동 제비원이라는 것과 제비원에서 솔씨가 날아들어 웅장한 소나무가 되고 이 소나무로 집을 지으니 집안이 번창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미래불인데도 현세불처럼 가정의 평안을 위한 ‘제비원 미륵’, 이 수호신은 안동의 큰 얼굴이다. 

‘제비원 미륵’은 안동의 큰 바위 얼굴이자 수호신이다. 미래불인데 현세불처럼 가정의 평안을 바라고 바란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 산2
가는 길 :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 – 송현오거리 – 제비원교차로 – 안동이천동석불상

 

유동후
여행 작가.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전국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마애불에 반해 우리 땅 구석구석의 오래된 석불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불교포커스에 ‘주말에 떠나는 마애불 여행’을 연재하기도 했다. 저서로 『마애불을 찾아가는 여행』, 『미륵로드』, 『손바닥 제주여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