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彌勒] ‘꽃미륵’ 본래면목 자신의 변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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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7     최호승
미륵의 첫 번째 설법지 김제 금산사는 미륵전이 백미다. 2층 용화지회 창살로 보이는 미륵 장육불상의 반쯤 뜬 눈에 근엄이 서렸다. 선한 일부터 해야 정토가 도래한다는 경책이다.

사진. 유동영

까마득하다. 56억 7,000만 년이라는 시간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데 왜일까? 선조들은 이 땅에 미래불인 미륵이 나타나길 빌고 빌었다. 

불법적으로 많은 땅을 소유하고 경제적 이득까지 독차지한 고려 시대 권력층, 각종 수탈과 잦은 왜구 침입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불안정했다. 당시 해안 지역에는 매향(埋香)이라는 신앙이 백성들의 공동체 결속을 강화했다. 유동인구가 많고, 왜구 침입이 빈번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귀한 향이나 약재로 쓰이는 침향(沈香)을 만들기 위해 향나무,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을 오랫동안 갯벌에 묻어뒀다. 이 땅에 내려와 용화세계를 이룰 미륵에게 공양할 침향을 마련하려는 마음이 매향이라는 행위로 나타난 셈이다. 미륵신앙에 기대어 미륵의 구원과 용화세계 도래를 바란 간절함이기도 했다. 까마득한 미래를 약속한 미륵이었지만, 지긋지긋한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게 할 미륵은 어쩌면 거룩한 판타지였는지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불안정한 상황과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후위기, 각종 우울 증상과 높은 자살률, 한쪽으로만 쏠리는 부의 편중, 취업과 내 집 마련 그리고 결혼과 출산 등을 포기한 N포 세대의 증가, 생활고로 가족이 단체로 삶을 마감하는 비극까지…. 여전히 현실은 아프기만 하다. 

꽃이 꺾일지언정 봄은 온다. 신화처럼 들리는 판타지를 따라 발걸음을 미륵성지로 옮겼다. 미륵은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을 이루고 세 번에 걸친 설법[용화삼회龍華三會]으로 중생을 구제한다. 미륵의 수기를 받은 진표 율사가 창건했거나 관여해, 미륵이 용화삼회를 펼칠 도량으로 불리는 금산사와 법주사를 찾았다. 금강산 발연사는 시절 인연을 기다리기로 했다. 

 

첫 번째 설법 도량 금산사 - 미륵의 땅 모악산

모악산은 ‘미륵의 땅’이랬다. 이상적인 세계를 원하던 많은 이들이 꿈꾸던 ‘인간 미륵’을 품었던 곳이 모악산이다. 소위 미륵의 품 안에 살면 난리를 피할 수 있다고 믿어 모악산 인근엔 미륵신앙 공동체도 적지 않다. 강일순의 제자 안내성이 세운 증산대도교 교인촌 백운동마을은 물론 모악산 배꼽 바로 밑 ‘오리알터(우주의 모든 기운이 여기서 나온다는 뜻)’로 불리는 금평저수지 위쪽 정수리에 솟은 제비산 주변 마을도 천지개벽을 꿈꾸던 이들이 모여들었다. 조선 시대 혁명아 정여립은 차별 없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오리알터 아래 황새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녹두장군 전봉준도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꿈꿨다. 강일순은 정여립 집터 바로 옆 동곡마을에 약방을 차려 백성들을 구제하며 서자와 상민이 무시당하지 않는 후천개벽의 세상을 바랐다. 

몇몇은 미륵의 현신을 자처한 이도 있었지만, ‘미륵의 땅’인 모악산의 주인공은 진표 율사와 조계종 제17교구본사 김제 금산사다. 금산사의 숭제 스님을 스승으로 모신 진표 율사는 변산 부사의방에서 돌로 온몸을 치며 참회와 참회를 거듭한 끝에 미륵의 수기를 받았다. 이후 미륵장육상을 조성한 곳이 금산사였다. 게다가 금산사는 미륵이 중생을 성불시키는 법을 펼칠 첫 번째 도량이다. 

“백제 법왕 1년(599)에 법왕이 즉위해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발포하고, 이듬해에 금산에 38명의 승려를 득도시켰으며, 또 왕흥사를 창건했다” 

중관 해안 스님이 쓴 「금산사사적」에 적힌 기록이다. 백제 법왕 원년에 산문을 연 금산사는 1,400년 역사 동안 천 년 넘게 미륵의 약속이 깃들어 있었다. 

미륵전 내부.

 

숯으로 연못을 메워라!

마을에 눈병이 돌았다. 병이 돌면 쉽게 막기 힘들었다. 진표 율사의 뇌리에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누구든지 연못에 숯을 쏟아붓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낫는다.” 연못은 순식간에 숯으로 메워졌고, 눈병은 말끔히 나았다. 이 연못은 진표 율사의 골칫거리였다. 연못을 메우고 미륵장존불을 조성하려는데 이상하게도 흙으로 메우면 파헤쳐지곤 했다. 연못에 사는 용이 그랬다는 것이다. 연못을 숯으로 메운 진표 율사는 그제야 철불을 조성하고 미륵전을 세웠다. 

실제 1985년 미륵전 보수공사로 땅을 팠더니 검은 숯이 나왔단다. 1974년 금산사에 입산해 주지로 사중을 돌보는 일원 스님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미륵전 보수한다고 몇 년 전에 미륵전 주변을 파니까 진흙이 나왔어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물도 금방 찼어요. 그런데 넘치진 않고요. 그때부터 여기가 연못 자리라는 믿음이 생겼지요. 미륵전 앞에 있던 대장전이 정유재란 때 타면서 떨어진 문 한 짝이 그 연못에 떨어져 안 탔다고 해요. 지금의 자리로 옮긴 대장전의 문 한 짝은 옛날 문이라는 말도 어렸을 때 들었죠.” 

역시 금산사의 백미는 미륵전이다. 나라의 보물, 국보 제62호다. 건물 바깥에서 보면 3층 구조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로 터진 위로 뻥 뚫린 통층 구조다. 미륵불이 세 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3층 건물로 형상화했다. 그래서 편액이 층마다 다르다. 1층은 대자보전, 2층은 용화지회, 3층은 미륵전이다. 아직 도솔천에 머무는 미륵보살을 다른 말로 자씨(慈氏)보살이라고 하니 존칭의 뜻인 대자보전을 1층에, 세 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용화삼회(龍華三會)의 다른 표현인 용화지회를 2층에 걸었다. 미륵이라고 자처한 후백제의 견훤이 후사 문제로 아들에게 유폐된 곳이 자기 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던 금산사의 미륵전이라는 역설이 서린 전각이기도 하다. 

법주사 경내.

 

두 번째 설법 도량 법주사 - 봄비 속 ‘꽃미륵’

전날 저녁부터 내린 봄비는 뜻밖을 연출했다. 세속을 떠난 뫼[속리산(俗離山)]에 안개를 드리웠고, 법이 상주한다는 미륵 도량[법주사(法住寺)]을 보일락말락 감췄다. 56억 년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미륵이 꼭 오고야 만다는 믿음, 그 거룩한 판타지는 비구름 걷힌 뒤 더 선명해지는 주변처럼 분명한 기다림이자 간절함 아닐까. 

정오가 가까워지자 비구름 뒤에 가려졌던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계종 제5교구본사 보은 법주사에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꽃잎이 봄을 붙잡고 있었다. 의신 스님이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와 머물렀기에 ‘부처님 법(法)이 머무는[住] 절’이라는 뜻으로 법주사라고 한단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재위 14년인 553년에 의신 스님이 창건했다. 

용화수 아래서 성불한 미륵이 두 번째로 설법한다는 법주사의 다른 기록에 눈길이 갔다. 길상사(吉祥寺), 속리사(俗離寺)로도 불렸단다. 알고 보면 금산사를 떠나 인연 닿는 대로 미륵의 법을 폈던 진표 율사가 점 찍어둔 곳이었다. 금강산 발연사 창건 연기 설화와 그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속리산에 들른 진표 율사가 길상초가 난 곳을 표시해 두고 금강산에 발연사를 창건하고 7년간 머물다 다시 부사의방에 머물 때 일이었다. 법을 구하러 찾아온 영심, 용종, 불타 스님에게 진표 율사는 “속리산에 가면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를 해뒀으니 절을 세우고 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전하라”고 했다. 말마따나 영심 스님이 길상초가 있는 곳에 길상사(지금의 법주사)를 세워 처음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 기록 등에 절을 속리사라고 불렀다고 하니,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법주사로 이름이 바뀐 셈이다.

속리산이라는 산 이름도 진표 율사와 관련 있다.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진표 율사 앞에서 우는 소들을 보고 신심을 얻어 입산한 곳이라고 해서 세속[俗]을 떠난[離] 뫼[山], 속리산(俗離山)이라고 했단다. 

국보 제55호인 팔상전이 백미라 불리는 법주사는 미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도량이다. 그래서일까. 경내에는 동양 최대의 미륵불 입상으로 높이가 33m에 이르는 금동미륵대불이 법주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봄은 (벚)꽃미륵을 불쑥 내밀었다. 봄비 갠 맑은 하늘 아래 벚꽃으로 따가운 햇볕을 가린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에 봄이 서렸다. 하생 전 미륵보살처럼 커다란 연꽃잎 위에 앉았다. 처처에 미륵의 불법이 머물고 있으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된 도량답다.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제자들이 법을 펴면서 미륵도량이 됐다. 하생 전 미륵처럼 큼직한 연꽃잎 위에 앉은 마애여래의좌상은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엽전이 된 미륵불과 목 잘린 거북바위

법주사는 팔상전이 랜드마크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이고, 벽면에 붓다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있다. 하지만 미륵 도량 법주사의 랜드마크는 따로 있었다. 

「법주사 사적기」에는 법주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 법당은 2층 구조의 용화보전(龍華寶殿)이었다고 한다. 산호전, 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전각 뒤편에 있는 바위를 산호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용화보전의 크기는 35칸으로 대웅전 28칸보다 더 크고 웅장할 만큼 미륵 도량으로서 법주사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낸 법당이었다. 

1983년 법주사에 입산한 부주지 각운 스님이 미륵 도량으로서 법주사의 역사와 함께 아픔도 들려줬다. 스님은 “금산사와 똑같은 미륵전이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이 궁을 복원한다고 목재를 가져갔다”며 “금산사와 같은 (미륵)장육상을 녹여 인건비로 썼다”고 안타까워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동국여지승람』엔 “이 전각(용화보전) 안에는 금색의 장륙상(丈六像)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1872년(고종 9)에 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흥선대원군이 1866년 발행한 화폐) 주조 명분으로 불상을 압수했고, 용화보전은 헐리고 말았다. 

다행히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1990년 금동미륵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1939년 금산사 미륵대불을 복원한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 김복진이 시멘트로 시작, 김복진의 사망과 한국전쟁으로 중단된 불사가 법주사 큰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회향한 것이다. 

이 대불 뒤엔 속리산의 수정봉이 있는데, 여기 있는 거북바위도 수난을 겪었단다. 스님은 “거북이는 장수와 관운 등을 상징하고, 미륵이 올 때까지 미륵 도량으로서 법주사의 끊어지지 않는 법등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거북바위의 목은 잘리고 말았다. 스님에 따르면 꿈에서 수정봉 전경을 본 당 태종이 “중국의 인재와 재물이 속리산으로 빠져나간다”며 한 장수에게 거북바위의 목을 치라고 지시했단다. 법주사의 한 노스님도 비슷한 시기에 꿈을 꿨고, 거북바위 목 옆에 짚신 두 짝을 놔두라고 예언했다. 당 태종은 이적이 있으면 목을 치지 말라고 했었지만, 거북바위 인근 종각에서 종을 치던 동자승이 짚신을 치웠고 결국, 목이 잘렸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때 주지스님이 시멘트로 목을 다시 붙였고 이후 법주사는 중창 등 예전의 미륵 도량으로서 대찰의 사격을 갖춰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수정봉의 거북바위. 사진. 최호승

 

미륵의 약속 보리의 약속

“미륵전은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비춰 자신을 맑게 만드는 곳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헛생각에 더 속지 않게 되니 욕심과 분노, 걱정이 침범하지 못한다. 진실한 말과 마음, 진실한 행동을 배워가면 사람들이 점점 맑아지지 않을까. 그리하면 세상은 점점 맑아진다.”

금산사 미륵전 홍보 애니메이션 ‘보리의 약속’에는 짧지만 울림 있는 법이 담겼다. 금산사와 법주사를 관통하는 미륵의 약속과 같은 맥락이다. 미륵이 먼 미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오는 메시아가 아니라 스스로 자비심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미륵의 약속은 수행과 자비에 있다는 이야기다. 메시아도 세상을 개벽하는 변혁가도 아니라는 뜻이다. 열 가지 선한 행위[십선도(十善道)]가 생활처럼 익고 악업을 참회하고 참회하며 자비로 주변을 돌보는 세상이 용화세계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대중법회는 잠시 중단됐지만 법주사가 30년 넘게 미륵철야기도를 이어오고 있고, 금산사는 진표 율사 미륵전을 완성한 5월 초하루를 기려 매년 미륵불에 공양 올리는 법회를 계획 중인 이유다. 

서울로 발길을 돌리는 길, 금산사 주지스님 말씀이 마음을 계속 붙든다. 

“희망은 삶을 이어가는 힘이지요. 하지만 희망이 삐뚤어진 판타지가 되면 곤란해요. 어느 순간 나타난 미륵이 모두를 성불시켜 준다는 믿음과 희망은 십선계를 스스로 잘 지켜서 준비가 됐을 때 완성되는 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