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彌勒] 사냥 즐기던 아이 미륵 오는 길 열다

진표, 레드 카펫 깔다

2021-04-27     박광연
부사의방에는 진표 율사의 수행처를 증명하듯 물을 저장했던 웅덩이 혹은 건물 기둥 자리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사진. 유동영

 

두꺼비 해코지한 아이가 받은 수기

먼동이 터올 무렵 길상조(吉祥鳥)가 노래했다. 

“보살이 오신다, 보살이 오신다.” 

흰 구름이 스며들어 다시 높고 낮음이 없고 산천이 평평해지고 은색 세계를 이루었다. 도솔천의 주인이 자재한 모습으로 의장, 병사들과 뒤섞여 석단을 에워쌌다. 향기로운 바람이 불고 꽃비가 내려 잠시 보통 세계의 풍경이 아닌 듯하였다. 

누군가 도솔천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천천히 내려왔다. 미륵보살이었다. 미륵보살은 느린 걸음으로 진표에게 다가와 손을 드리워 진표의 정수리를 문질렀다. 그러자 진표의 몸과 마음이 온화해지고 즐거워지고, 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열렸다. 이때 진표는 어떤 경지에 다다른 것 같았다. 현실과 다른 새로운 세계와 닿아 기분이 좋으면서도 어떤 자극도 괴롭거나 즐겁지 않았다. 『송고승전』에서는 진표의 의식이 락수(樂受, 다른 세계와 접촉으로 받는 즐거운 느낌), 사수(捨受, 외부 자극에 대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상태)와 상응하여 활동하는 삼선(三禪)의 경지였다고 한다. 선정 상태에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친견했다는 것이다.

두 보살의 친견은 고통이라는 고독에 자신을 가두고 철저하게 홀로 견뎌낸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진표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의 몸으로 돌을 두드렸고, 때로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며 참회하고 참회했다. 살갗에 퍼런 멍이 오르고, 팔과 다리는 부서졌다. 극렬한 고통에 휩싸였지만, 진표는 멈추지 않았다. 깎아지른 절벽 위,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진표는 미륵보살의 수기(授記, 붓다가 수행자에게 미래의 깨달음에 대해 미리 지시하는 예언과 약속)를 받았다. 

진표는 어떤 참회를 했을까. 생전에 알게 모르게 지었던 악업이지 않을까. 완산주 만경현의 진표는 어려서부터 산과 들로 다니며 사냥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행한 아주 사소한 행동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여느 때처럼 사냥하느라 산속을 뛰어다니던 도중이었다. 그는 허기를 달래려고 30여 마리의 두꺼비를 버드나무 가지에 꿰었다. 그때 불쑥 나타난 짐승을 쫓아가느라, 꿰어놓은 두꺼비를 시냇물에 담가 놓은 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다음 해 봄, 진표는 그날도 살랑이는 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사냥하고 있었다. 물을 마시러 시냇가에 다가갔을 때, 어디선가 두꺼비들이 요란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나뭇가지에 꿰인 채 물속에 있는 두꺼비들이 보였다. ‘아!’ 진표의 머릿속에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순간 깨달았다. 두꺼비들이 이토록 처량하게 울어대는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진표는 출가를 결심했다. 집에서 가까운 금산사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당에 유학을 다녀온 순제(숭제) 스님을 만났다. 스승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특히 “산에 들어가 보살에 감응하여 직접 오계를 받았다”는 말씀은 진표를 분발케 했다. 그는 “부지런히 수행하기를 얼마 동안 하면 계를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 곧바로 수행의 길을 나섰고, 결국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기별을 받았다. 지장보살로부터는 가사와 발우 그리고 정계(淨戒)와 계본(戒本)을 받았고, 미륵보살에게 증과간자(證果簡子,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의 결과와 점치는 대쪽) 189개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 2개의 간자가 훗날 미륵의 손가락뼈로 불렸다. 

아쉽게도 진표 율사의 모습이 제대로 전해진 것은 없다. 스승 순제(숭제) 스님과 함께 김제 금산사 조사전에 있는 진표 율사 진영. 

 

보살의 감응 갈구한 이유는 지계

원효(617~686)의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나 경흥(憬興, 7세기 중반~8세기 초)의 『미륵상생경요간기(彌勒上生經料簡記)』에서는 미륵 만나기를 추구하는 수행자 또는 경전의 설법대상을 상품, 중품, 하품으로 구분한다. 상품의 사람은 관불삼매(觀佛三昧)를 닦고 자신을 참회하여 현생의 몸으로 미륵을 만나고, 중품의 사람은 관불삼매나 정업(淨業)을 닦아 죽은 후에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을 만나고, 하품의 사람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등의 선업을 닦아 미륵을 만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지만 업에 따라 생을 받다가 미륵이 하생하여 깨달음을 이룬 때에 미륵을 만나 3회 설법을 듣고서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현생의 몸으로 미륵을 만난 진표는 상품의 수행자가 틀림없다. 그런데 진표가 보살의 감응을 갈구한 가장 큰 목적은 계법을 받는 데 있었다.

계법의 수지(受持)는 극락정토를 말하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나 도솔정토를 말하는 『관미륵상생경(觀彌勒上生經)』 등 관경(觀經) 류의 경전에서는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덕목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지계를 중시하는 미륵 신앙자들이 더 두드러졌다. 혜균(慧均)의 『미륵경유의(彌勒經遊意)』나 기(基, 632~682)의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찬(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贊)』에서도 지계는 중시됐다. 경흥은 『삼미륵경소(三彌勒經疎)』에서 도솔천에 태어나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도솔천에 태어날 것을 권하는 것을 결론짓는다. (…중략…) 도솔천에 태어나고자 하는 이들은 다섯 가지 인(因)을 닦는다. 첫째 오계(五戒)를 지킨다. 둘째 팔계(八戒)를 지킨다. 셋째 구족계(具足戒)를 지키니 출가 오중(五衆)의 계를 총체적으로 구족계라 한다. 사미계도 대계(大戒=구족계)와 근사하다. 넷째 몸과 마음을 정진하되 번뇌를 끊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섯째 십선(十善)을 닦는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인을 닦을 때 실로 도솔천상의 즐거움을 하나하나 생각하고 회향할 것을 발원하면 비로소 도솔천에 태어날 수 있다.”

도솔천에 태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오계, 팔계, 구족계와 같은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상생한다는 것 즉 도솔천에 태어난다는 것은, 경흥의 해석에 의하면, 뛰어난 장소인 도솔천에 의탁해 모든 과보(果報)가 새로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보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의 형편에 맞는 계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진표가 미륵에게 계법을 받고자 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과보를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그 방법으로서 지계(持戒)를 강조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부사의방에서 보살의 기별을 받은 뒤 진표는 다시 금산사를 찾았다. 그를 따르는 이들과 함께 금산사의 중건을 마쳤을 때, 또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왔다. 이번에는 미륵보살이 진표에게 직접 계를 주었다고 한다. 금산사의 금당에 미륵장육상을 만들어 모시고, 금당 남쪽 벽에는 미륵이 내려와 계를 주는 모습을 그렸다(「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서는 미륵장육상을 안치한 해가 혜공왕 2년인 766년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후 진표는 금산사에서 매년 계단(戒壇)을 열어 법의 보시를 열었다. 스승 순제에게 받은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과 미륵보살에게 받은 189개의 간자를 이용한 점찰법회도 수시로 열었을 것이다. 진표 이전에 이미 점찰법회는 신라 사회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189개의 간자를 이용한 진표의 점찰법은 흥륜사에서 행하던 육륜법(六輪法)을 응용한 듯하다. 

육륜법은 4면으로 깎은 6개의 간자에 각각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을 적고(세 면에만 숫자를 쓰고 한 면은 비워둠), 6개의 간자를 함께 세 번 던져 나온 수를 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표는 세 번 던지고 합하는 과정을 간소화하여 189개의 간자 가운데 하나를 뽑게 했던 것 같다. 뽑은 숫자를 가지고 『점찰선악업보경』에 근거하여 선악의 업보를 판단하고, 거기에 맞는 계를 주어 참회 정진하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점찰법회는, 점찰법으로 개개인의 삼세 과보의 선악을 점치고, 그에 따라 계를 부여함으로써 법회 참여자들에게 참회 정진을 권하는 것으로, 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업보(業報)를 알고 참회를 실천하게 하려는 방편이었다. 

진표 율사는 이곳 깎아지른 암벽 위 부사의방에서 참회를 거듭한 끝에 미륵의 수기를 받았다.

 

미륵의 법은 인연 따라 흐르고 흘러

진표는 발길 닿는 대로 인연을 마주했다. 금산사를 떠난 뒤 속리산 부근을 지나갈 무렵에는 소에 멍에를 매어 수레를 끌고 가던 이들에게, 강릉 바닷가에서는 물고기, 자라, 악어 등의 해족(海族)에게 계를 주었다. 흉년으로 굶주린 사람들에게 계를 주어 사람들이 그 계법을 받들어 지키자 갑자기 해변에 수많은 고기 떼들이 스스로 죽어 나와서 백성들이 이를 팔아 밥을 먹게 되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들이 도읍까지 알려지자, 경덕왕은 진표를 궁으로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조 7만 7,000석을 시주했다. 왕의 친척들도 모두 계를 받고 비단 500단과 황금 50냥을 시주했다. 개골산(겨울의 금강산)에 다다른 진표는 발연사를 창건했고, 훗날 아버지를 이곳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처럼 신라의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진표의 활약으로, 그가 강조한 미륵신앙, 계법, 점찰법회도 점차 널리 퍼져나갔다. 

진표의 불법을 이은 제자들이 많았다. 산문(山門)의 조사가 된 제자만 해도 영심(永深), 보종(寶宗), 신방(信芳), 체진(體珍), 진해(珍海), 진선(眞善)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진표로부터 직접 불법을 전수한 이는 영심이었다. 속리산에 있던 영심은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과 함께 진표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용맹하게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며 법을 구했다. 결국 진표는 영심에게 가사, 발우, 189개의 간자 등 그의 모든 법을 전수했는데, 이때 189개의 간자 가운데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가 미륵보살의 진짜 뼈로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전했다고 한다. 진표의 법을 전수한 영심은 속리산으로 돌아와 길상사(吉祥寺, 고려 땐 속리사로 불렸고 현재는 법주사)라는 절을 세우고, 이곳에서 점찰법회를 열었다. 영심의 법을 계승한 이는 헌덕왕(재위 809~826)의 아들인 심지(心地)였다. 15세에 출가해 스님이 됐는데, 중악(中岳, 지금의 팔공산)에 머물고 있다가 속리산 영심의 점찰법회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심지는 법회에서 남들보다 더욱 열심히 예배하고 참회했다. 그렇게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길상사의 함 속에 넣어둔 미륵의 손가락뼈로 만든 간자 2개가 심지의 옷 속에 있었고, 돌려주어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영심은 간자 2개를 심지에게 주었고, 심지는 이를 중악으로 가지고 와 동화사(桐華寺)를 세우고 첨당(籤堂)에 두었다. 영심과 심지 사이의 이야기에서 진표의 법이 속리산의 영심을 거쳐 동화사의 심지에게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 금산사, 속리산 길상사(속리사), 중악 동화사가 유가업(법상종)의 대표 지방 도량으로 부상하게 된 데에는 혜덕 왕사라 불리던 소현(韶顯, 1038~1096)의 노력이 있었다. 이자연의 다섯 번째 아들인 그는 유가업의 조직을 정비하고자 진표계 사원에 주목하였고, 금산사에 광교원을 설치한 뒤 그곳에 머물면서 유식 논서의 출판을 주도하였다. 소현의 법을 이은 도생 승통은 속리사와 금산사의 주지를 겸하기도 하였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금산사와 법주사는 진표의 법을 계승한 법상종 사원이자 미륵신앙의 성지로 꼽히고 있다.  

 

박광연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사학전공 조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연구단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신라・고려 시대 불교 문헌 및 사상, 교단, 보살계 등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진표의 점찰법회와 밀교 수용」, 「신라 진표의 미륵신앙 재고찰」, 『신라사대계 22-신라를 빛낸 인물들』 등 진표 율사 관련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