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젊음은 최초의 펭귄처럼

- 제주현대미술관 '2020 New Rising Artist: 불완(不完)의 꽃' 전시 리뷰

2021-03-31     마인드디자인(김해다)
강주현 | 그려지고 만들어지는 것에 대하여 | 2020
PVC, Wood, Resin, Stainless steel, Digital print | 150×70×206cm

이어령 교수는 저서 『젊음의 탄생』에서 진정한 젊음을 ‘최초의 펭귄(First Penguin)’에 비유한다. 펭귄들은 뒤뚱뒤뚱 떼를 지어 우르르 바다로 모여들지만 정작 바다로 뛰어들기 직전 머뭇거린다. 바닷속에는 먹잇감도 있지만, 천적도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불확실한 바다를 향해 맨 먼저 뛰어드는 용감한 펭귄이 바로 최초의 펭귄이다. 최초의 펭귄이 뛰어드는 모습을 본 다른 펭귄들은 일제히 그 뒤를 따라 바다로 뛰어든다. 불확실성의 바다로 뛰어드는 최초의 펭귄은 깨어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을 새롭게 발견해낸다. 안정만 추구하느라 제한적이고 정체된 존재로 살아가기보다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야말로 최초의 펭귄, 진정한 젊은이라는 뜻이다. 제주현대미술관이 제주 출신 젊은 작가를 조명한 전시, <2020 New Rising Artist: 불완(不完)의 꽃>에서 만난 네 작가의 작품에서도 같은 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강주현: 시간과 공간의 축을 흔들다

강주현 작가는 그가 ‘사진공간드로잉’이라 명명하는 형식을 활용하여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을 ‘공간적 차원’에서 ‘시간적 차원’으로 전환한다. 아니, 공간이라는 축과 시간이라는 축의 경계를 허문다고 하는 편에 가깝겠다. 그의 손을 거친 연필, 사다리, 의자 등 일상적 사물은 시간이라는 옷을 입고 공간에 놓이기 때문이다. 곧게 뻗은 연필은 ‘드로잉 하는 중’이라는 시간의 지속 안에서 속도감 있게 휘어진다. 반듯한 사다리는 ‘작업하는 동안’이라는 시간의 궤적을 기록이라도 하는 듯 늘어나고 뒤틀린다. 이 왜곡된 사물들의 형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의 사이를 벌려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틈을 만들어낸다. 공간 속에서 마주하는 사물의 한 면이 굴곡진 시간의 흐름을 타고 풍성해지며 ‘본다는 것’, ‘안다는 것’의 오만함을 깨닫게 한다. 이 조각들은 대상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프린트한 뒤, 가늘고 긴 선 형태로 자른 다음 점토로 제작한 원형 위에 하나씩 붙여 가며 만들어졌다. 조각들은 비록 전시장이라는 공간과 전시를 관람하는 순간이라는 시간에 갇혀 자리하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 사이를 교란하며 인식하는 행위에 대한 관람자의 틀을 흔든다.

 

김강훈 | 거짓 관계 | 2017 | 캔버스에 유채 | 116.8×72.7cm

김강훈: 간절히 거부하기

중국에서 오랫동안 유학 생활을 하며 차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던 김강훈 작가는 차와 찻잔을 둘러싼 인물들을 통해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림 속 인물들은 찻잔을 중심으로 이상한 몸짓을 하고 있는데, 몸을 기울인 채 찻잔의 물을 귓구멍으로 쏟아붓고 있거나 무중력 상태로 둥둥 떠 있는 찻잔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식이다. 찻상을 가운데 두고 대화를 나누는 중에 딴청을 피우며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잔소리가 듣기 싫은 남학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가운데 작가의 자화상만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초점 없이 흐릿한 다른 인물들의 눈빛과 달리, 공중에서 쏟아지는 찻잔을 아주 분명하게 응시하고 있는 자화상의 눈빛. 양 볼을 타고 흐르는 찻물은 작가의 눈물을 대신한 것일까, 무언가를 간절히 열망하는 듯 보이는 작가의 표정에 언뜻 법을 갈구하는 선재 동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제주도 개발과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업에 있어 중요한 출발 지점이라 밝히는 작가 노트를 참고해보면, 차와 찻잔을 둘러싼 ‘관계’는 개인 간의 관계를 넘어 사회적 갈등 상황 속에서 충돌하고 교차하는 관계에 대한 탐구로 확장된다.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제주 지역 개발 정책의 파괴적 결과를 거부하려는 반항적 태도로 읽히기도 한다.

 

좌혜선 | 냉장고, 여자 #2 | 2010 | 장지에 분채 채색 | 116×91cm

좌혜선: 습하고 위험한 곳, 죽지 않고 남아 있는 온기 

‘끼니’와 ‘육체’ 등 인간 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좌혜선 작가의 그림은 습하고 위험한 도시에서 죽지 않고 남아 있는 온기를 그려낸다. 벌거벗은 채 물끄러미 냉장고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의 신체, 현금 지급 박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보슬비 내리는 습기 찬 풍경 등 그가 그려낸 장면들은 보통의 삶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언뜻 일상의 고단함과 쓸쓸함을 재현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들에서, 참 이상하게도 희망을 발견한다.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일, 매일 끼니를 지어 먹는 일 등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 일상적 행위들을 작가는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대하고 있다. 생계를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있는 풍경을 보며, 아무리 ‘불완’해 보일지라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온전함을, 충분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배운다.

 

김선일 | 자화상(시대의 자화상) | 2018 | 레진, 철분 | 105×140×40cm

김선일: 우리는 무엇에 역동(逆動)하는가 

좌혜선 작가가 고단한 일상 속 따스한 온기를 발견해낸다면 김선일 작가는 현실과 온몸으로 맞서 싸우는듯한 역동적 인체 조각을 보여준다. 조형적으로 매우 ‘잘’ 그리고 ‘시원스럽게’ 표현된 인체 조각들은 그 자체로 시각적 쾌감을 준다.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잔뜩 힘을 주고 있는 팔뚝, 고통에 몸부림치듯 두 팔을 허공을 향해 활짝 펼치고 있는 상반신 등 <자화상(시대의 자화상)>이라 이름 붙은 이 조각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바로 ‘긴장’이다. 잔뜩 긴장한 팔뚝은 무엇을 그토록 쥐고 싶어 하는지, 괴로움이 응축된 몸부림은 무엇을 향해 있는지 작가는 밝히지 않는다. 대신, 질문한다. 우리는 그저 허공에 대고 역동하려 애쓰고 있지는 않은가. 잠시 멈추고 긴장을 내려놓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요한 평온이 아닐까 하고.

 

이달의 볼 만한 전시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대전시립미술관 | 대전
2021.03.02~2021.05.09 | 042)602-3225
www.daejeon.go.kr/dma

생자필멸의 세계에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13명(팀)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이 모였다. 소멸해 가는 타자의 세계 속에서 느끼고자 애쓰고, 일상적 시공간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관찰·기록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아의 존재를 질문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분투를 만날 수 있다.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외 | 광주
2021.04.01~2021.05.09 | 053)424-0606 
www.gallerycnk.com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계속해서 연기되던 광주비엔날레가 드디어 개막한다. 서구에서 유래한 지배적 기술 체계나 기계적 어휘를 넘어 ‘마음’과 ‘영혼’이라는 키워드로 수많은 ‘비정통적’ 계통까지 아울러 숙고한다. 역사적 트라우마가 깃든 광주 지역에서 치유, 저항, 회복 사이 본질적 관계를 성찰해볼 기회.

 

이불 개인전 - 시작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 서울
2021.03.02~2021.05.16 | 02)2124-8800 
www.sema.seoul.go.kr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로 손꼽히는 이불 작가. 예술 창작 분야 교육 제도의 한계, 근현대사를 성찰하는 현대미술의 역할, 여성과 여성의 신체를 재현하는 방식 등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사회적 의제를 상기시키는 그의 작품을 만나보자.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전시장이 휴관했거나 예약제로 운영 중일 수 있습니다. 방문 전 꼭 확인하세요.

 

마인드디자인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붓다아트페스티벌을 9년째 기획·운영 중이다. 명상플랫폼 ‘마인드그라운드’를 비롯해 전통사찰브랜딩, 디자인·상품개발, 전통미술공예품 유통플랫폼 등 다양한 통로로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문화콘텐츠 발굴 및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