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철학 시점] 괴로운 곳에 있어야 할 필수 불가결한 가르침

21세기 붓다의 철학

2021-03-30     이중표

21세기를 맞이하는 인류는 새 천 년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과 IT 관련 분야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고, 과학과 생명공학의 꾸준한 발전은 생명 연장을 꿈꾸게 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희망적일까? 

인류에게 경제적 자유와 풍요를 줄 것 같았던 세계화와 자본주의는 오히려 인류의 기본적인 삶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빠른 속도로 경제와 산업 전선, 일상에 자리 잡는 인공지능은 ‘노동 해방’보다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그리고 미국발 금융 위기, 코로나19가 촉발한 바이러스와의 싸움, 기후위기 등 여러 문제는 서로 얽히고설켜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인 팬데믹을 만든 코로나19는 인류를 새로운 시대로 끌어들였다. 비대면을 뜻하는 ‘언택트(Untact)’에 온라인으로 외부와 ‘연결(On)’한다는 개념이 더해져 ‘온택트(Ontact)’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코로나19 확산이 장기화하면서 온라인 대면이 일상이자 새로운 흐름이 됐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는 짙어지는 법이다. 코로나19 장기화는 정신세계에 병을 가져왔다. 감염자, 즉 타자를 향한 혐오와 배제로 갈등을 유발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수많은 자영업자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가했고, 코로나 블루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자영업자들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21세기는 여전히 갈등과 혼돈 그리고 아픔의 시대다. 과연 21세기는 인류의 바람대로 흘러갈까? 지금, 여기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은 무엇일까? 필자는 붓다의 중도 철학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불교, 괴로움 있는 곳에 필요한 철학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시대는 괴로움이 많다. 어쩌면 오늘날의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괴로운 곳인지 모른다. 청소년 행복지수가 낮고, 자살률은 세계 1위이며, 출산율도 아주 낮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정치, 경제, 교육 등 각 분야에서 괴로움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 괴로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의 근대사는 수난의 역사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남북분단,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거쳐왔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경제가 무분별하게 흘러들어왔고, 경제발전과 부의 성취는 가장 큰 가치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19로 빠르게 위축된 경제 상황은 전 세계은행에 돈 풀기를 강요했다. 미국, 한국, 대만 등에서 주가는 사상 최대치를 갱신하고,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주린이(주식+어린이, 주식 경험이 적음을 가리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킬 만큼 20~30대는 빚까지 내 주식과 부동산에 뛰어들고 있다. 코로나19로 위축된 경기와 너무 다르게 돈이 풀리고 있으며, 투자는 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투자로 이어지는 실정이다. 개인 자영업자가 파산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시대가 어수선하고 모든 게 불확실해졌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모든 사람이 경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개인의 욕망 성취와 재물 소유가 행복의 척도가 됐다. 

물론 먹고 사는 일에 돈과 재물은 필요하다.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과 재물이 행복은 아니다. 불교는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통을 버리고 기쁨을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람)을 강조하며, 고통을 제거하는 일을 행복의 요건으로 내세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는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개인적인 욕망 추구와 끝없이 재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 때문이다. 돈과 재물을 취하려고 하는 지나친 욕심[貪慾]은 풍요하다고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도리어 정신적인 고통, 철학적인 빈곤을 낳고 있다. 이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불교이다. 

 

붓다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세속에서 말하는 행복은 돈과 재물의 소유를 포함해 모든 욕구가 충족돼 고뇌 없이 평화로운 상태다.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좌절한다. 어쩌면 우리의 욕구 중 가장 큰 욕구는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우리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있다면 죽음에서 해방되는 일이지 않을까. 하지만 코로나19는 인류에게 큰 폭력을 가하고 있다. 비현실적 상황에서 비일상적 죽음이 우리 주변에 놓여있다. 죽음의 불안과 공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셈이다. 괴로운 상황이다. 반면 코로나19는 죽음을 비롯해 지구에서 사는 인류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불교는 중도를 가르친다. 붓다는 왜 중도를 가르쳤을까. 붓다는 모든 다툼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사는 길을 찾았고, 그 길을 찾아 가르쳤다. 중도는 붓다가 발견한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길이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다. 불교는 평화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종교이자 철학이며, 평화로운 삶은 중도의 실천에서 가능하다. 

중도(中道)는 중용(中庸)이나 상대적인 양자 사이의 중간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마음 안팎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투쟁을 일으키는 모든 모순과 대립이 연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 것임을 깨달은 붓다는 이 모순 대립하는 견해 중 어느 것도 취하지 않고 버리는 길을 중도라 불렀다. 그 길에서 연기를 깨닫고 갈등과 투쟁, 대립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도록 가르쳤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붓다의 가르침, 즉 진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는 애당초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있다고 해도 우리의 자유롭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과는 무관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자유를 얻었지만 보이지 않는 구속을 느끼며, 즐거움 뒤에는 항상 허무와 갈증을 느낀다. 개인과 개인, 계층과 계층,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가 이기적으로 대립하며 갈등 중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확인되고 실현된 진리인 붓다의 가르침은 과거의 고루한 사상이나 특정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종교로 인식되면서 현대인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고루한 사상으로 소외되지 않고 21세기, 즉 지금 여기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현실적인 사상으로 되살아나기 위해서 불교는 철학적으로 해석돼야 한다. 철학에서 추구하는 인식의 문제(인식론), 존재의 문제(존재론), 가치의 문제(가치론)는 붓다의 가르침 속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중도와 인식론·존재론·가치론

불교의 사상적 특징은 한 마디로 중도이다. 대개 중도는 대승불교 사상이고 기원이 초기불교 시대에 있다고 보지만, 사실 중도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관통하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중도는 초기불교 경전인 『아함경』과 『니까야』에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실천 수행으로서 중도인 팔정도, 다른 하나는 이론이자 철학 체계로서 중도인 12연기이다. 

서양철학은 4가지 철학적 물음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무엇이 존재하는가(존재론),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인식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치론), 우리는 죽은 후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등이다. 사후에 무엇을 희망하느냐의 문제는 신학으로 돌렸고, 나머지 3가지 물음은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가치론 등 세 분야로 나눠 탐구됐다. 

붓다의 인식론, 존재론, 가치론은 서양철학의 카테고리 구분이 아니다. 하나로 회통한다. 이 진리의 인지를 위해 붓다는 실천 수행체계를 제시했고, 각 수행 단계마다 향상되는 인식 과정을 본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세히 설했다. 이러한 체험적 인식론을 기반으로 세상의 구조를 이해하는 연기관으로 해탈의 길인 사성제를 체득하는 것이 붓다의 중도 철학* 핵심이다.

*붓다의 중도 철학에 담긴 인식론·존재론·가치론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붓다의 철학-중도, 그 핵심과 사상체계』(불광출판사)에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중도 해설을 중심으로 무엇이 진리이며 그 진리를 어떻게 인식할지에 관한 ‘인식론’, 12연기를 바탕으로 한 ‘존재론’, 사성제를 토대로 실천의 당위성을 논하는 ‘가치론’을 설명하고자 한다. 필자에게 허락된 지면상 가치론을 논하는 것으로 붓다의 중도 철학이 인식론, 존재론, 가치론을 어떻게 회통하는지 살펴보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가치론은 우리가 마땅히 실현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실천 관련 학문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게 목표다. 사성제를 가치론으로 분석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서양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있는 사실에 관한 학문’과 ‘있어야 할 것을 위한 실천에 관한 학문’을 별개 영역으로 다뤄 왔다. 서양철학은 ‘사실판단의 대상’과 ‘가치판단의 대상’이 어떤 형태로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가치판단의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윤리학 또는 가치론이 학문으로 성립한다. 

가치론은 ‘당위(當爲)의 학(學)’이다. 인간 행위의 보편적 당위성을 추구하는 문제는 인류 역사가 시작한 이래 계속된 문제이지만, 아직 그 답을 얻지 몫하고 있다. 왜 그럴까? 서양철학에서 가치론은 존재론과 별개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엄연하게 구분된다고 보는 게 서양철학의 입장이다. 판단의 대상의 실재한다는 것도 서양철학의 전제이다. 

과연 서양 철학자들이 생각하듯이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엄격히 구분할 수 있을까? 장미꽃을 예로 들어보자. ‘이 장미꽃은 핀다’라는 판단은 사실판단이고, ‘이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가치판단이다. 여기에는 장미꽃이라는 주어가 있다. 곧 사실판단이든 가치판단이든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판단의 대상(장미꽃)이 외부에 실재하고, 우리가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제돼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판단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의심스럽다면, 그 존재에 대한 모든 판단은 무의미하다. 이처럼 가치론은 존재론과 인식론을 전제로 하기에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다시 장미꽃으로 돌아가 보자. 연기법의 관점에서 보면 판단의 대상인 장미꽃은 장미꽃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존재[有]가 아니라 조건에 의지해 연기한 것이다. 우리는 지각 활동으로 지각한 일정한 형태와 향기 등으로 장미꽃이라는 이름을 붙인 다음, 그런 형태의 지각 내용을 장미꽃이라는 이름으로 인식한다. 즉 장미꽃이란 판단의 대상은 외부에 장미꽃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우리 지각 활동으로 지각한 내용이다. 

그 내용을 장미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보고, 냄새를 맡고, 만져보고, 생각해 본 체험의 내용이 장미꽃이라는 이름과 형태로 우리 마음속에 형성돼 있어서다. 

붓다는 모든 존재가 우리 마음에서 연기한다고 본다. 사실판단이든 가치판단이든 그 대상이 우리 외부에 실재한다는 전제로 추구하는 철학은 허구이고 모순이다. 붓다의 중도는 이런 사실의 자각에서 이뤄진 철학적 입장이다. 중도에서는 존재와 인식 그리고 가치가 분리되지 않는다. 진리의 인식은 단순한 사실의 인식이 아니라 가치의 인식이며, 이런 인식으로 드러난 존재의 실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행위를 할 것인가 보여준다. 이처럼 붓다의 중도 철학은 가치론에 인식론과 존재론이 함축되며, 사성제는 바로 인식론과 가치론을 함축하는 붓다의 가치론이다. 

 

사성제에 담긴 중도 철학

괴로움이 없는 곳에는 불교가 필요 없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는 곳에는 무엇보다 필요한 게 불교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는 사성제(四聖諦)에 있기 때문이다. 괴로운 현실을 자각하는 고성제(苦聖諦),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하면 괴로움도 소멸한다는 사실을 뜻하는 고집성제(苦集聖諦),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하면 괴로움도 소멸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고멸성제(苦滅聖諦),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해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의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가 사성제이다. 

이 4가지 진리의 명칭에 빠짐없이 ‘고(苦)’라는 개념이 있다. 사성제가 괴로움에 관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에는 소위 8가지가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태어나서[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생로병사 4가지 외에도 원증회고(怨憎會苦, 증오하는 존재와 만나는 고통),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존재와 헤어져야 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 약오음성고(略五陰盛苦, 요약하면 5취온이 고통)가 있다. 

그렇다면 괴로움이란 무엇일까. 괴로움은 자기 뜻(will)이나 욕구에 어긋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늙고 죽거나 헤어지거나 병드는 게 괴로운 이유는 늙고 죽거나 헤어지거나 병들어 아프기 싫어서다. 이렇게 어떤 조건에 자기 뜻이나 욕구가 들러붙어 만드는 결과가 괴로움이다. 

세상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의 자각, 즉 고성제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은 우리에게 괴로움의 소멸인 고멸도성제라는 새로운 가치 실현의 길을 요청한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괴로운 세계와 자아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끊임없이 죽음 앞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실존의 원인을 여실하게 알아서 괴로움의 근본을 없애야만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기하는 세계에서 체험된 의식(과거), 체험하고자 하는 의식(미래), 체험하고 있는 의식(현재)을 자기 뜻과 욕구로 끌어당겨 취하면서 허구의 존재를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고집성제다. 이 고집성제를 알아서 인간실존의 축인 자기 뜻과 욕구를 없애면 새로운 가치 실현의 길이 열린다. 

고성제는 집성제를 알게 하는 원인이고, 멸성제는 도성제를 실천하게 하는 원인이다. 새로운 가치 실현의 길로 가는 방법은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 등 팔정도의 실천이자 수행이다. 팔정도는 열반을 성취하는 길이며, 열반은 어떤 다른 세계로의 초월이 아니라 팔정도를 자신의 삶으로 삼고 살아갈 때 성취되는 행복한 삶이다. 

붓다가 추구한 가치는 평온과 사물의 본질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보편타당한 인식, 그리고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행복[涅槃]이다. 붓다는 팔정도가 이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정견을 갖고 살아가면서 바른 선정을 수행할 때 사물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보편타당한 인식과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멈출 것인가 좇을 것인가

서양철학의 역사는 앞서 정립한 진리가 허위임을 밝히는 역사였다. 수많은 철학자가 전 시대의 철학자 주장을 허위로 확인해왔다. 붓다의 가르침이 전해진 많은 지역에서 그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허위를 입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자는 불교는 종교이기에 그렇다고 말할지 모른다. 불교를 믿는 것은 불교가 초월자의 계시나, 초월자에 의해 선택된 자의 가르침이어서가 아니다. 진리를 발견한 붓다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남김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초월자의 구원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으로 스스로 붓다와 같은 해탈 성취를 목표로 한다.

우리의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해결해주지 못한다.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직접 약을 먹어야 하고, 저 언덕에 건너가야 할 사람은 자신이 직접 배를 타고 가야 한다. 붓다는 열반할 때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겼다. 지금 여기, 우리의 괴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실재하는가? 과연 우리는 어떤 가치를 좇을 것인가.    

 

이중표
전남대 철학과 명예교수. 전남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호남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범한철학회 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불교 신행 단체 붓다나라를 설립해 포교와 교육에 힘쓰고 있다. 『붓다의 철학』,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불교란 무엇인가』,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붓다의 연기법과 인공지능』, 『불교와 양자역학』 등 저서와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