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철학 시점] 참나도 본캐도 없다

본캐와 부캐 사이 참나

2021-03-30     홍창성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수행자 사이에 오가는 이 질문을 서양인에게 스스로 묻도록 하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의아해한다. ‘Who am I(나는 누구인가)?’는 내가 내 이름을 묻는 질문이다. 내가 기억을 잃기라도 했단 말인가? 한편 이 물음은 스스로가 소속한 집단에서의 역할이나 직업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What am I(나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옳다. ‘Who am I?’는 문법적으로 이름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현대철학은 이런 질문이 신비롭고 심오한 느낌을 주는 이유를 실은 그것이 문법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이름이나 직업에 대한 질문이라면 적절한 단어를 써서 제대로 물어야 하는데, who와 what을 뒤섞어서 독자를 오도(誤導)한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의 출재가자가 그런 의도로 이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이 질문은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 참된 나, 본래면목, 즉 참나[眞我]를 찾으라고 독려하는 수행의 하나로 사용된다. 요즘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비유로 풀이하자면 ‘나의 본캐(본本 캐릭터)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셈이다. 

격변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 대부분은 ‘고정불변한 자신의 본캐가 있고 그것을 찾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시대의 상황과 환경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참나를 찾으라는 물음은 바라문교와 힌두교에서 논하는 아뜨만과 같은 참나는 없다며 무아(無我)를 설파한 붓다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필자는 본캐와 부캐(부副 캐릭터)를 분별하려는 태도 또한 참나를 찾으려는 헛된 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본캐의 문제를 불교의 무아론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필자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본캐는 무엇인가? 이름은 홍창성이고, 직업은 서양철학 교수다. 인문학자지만 IT 애호가다. 공상과학 영화광이고 무도(武道)를 좋아한다. 쌍둥이 딸 아빠고, 교수의 남편이다. 차를 몰 때는 운전자이고, 길을 걸을 때는 보행자다. 스스로 불자라고 여기지만, 교회와 성당 그리고 유대교 회당에도 기웃거린다. 이런 문장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이 캐릭터들은 모두 크고 작은 사회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어느 하나도 나 스스로로부터 비롯된 것은 없다. 

이 모습들은 각각 이런저런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들의 집합이 나일까? 답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각 문장의 진위(眞僞)가 계속 변한다는 문제도 있다. 현재는 교수지만 은퇴하면 더는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게 되고, 또 공상과학영화보다 사극(史劇)이나 다큐멘터리를 좋아할 수도 있다. 나를 관계의 집합으로 보는 것도 나를 찾기 어렵게 만드는데, 관계 각각이 계속 변한다는 점이 나의 존재에 대해 더욱 회의하게 만든다. 

 

관계로 분석되는 나 : 동시적(同時的) 관계

다음은 도겐의 『정법안장(正法眼藏)』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도(佛道)에 관한 공부는 스스로에 관한 공부다. 스스로에 관한 공부는 자신을 잊는 공부다. 자신을 잊는다 함은 만물에 의해 깨닫게 된다 함이다. 만물에 의해 깨닫는다 함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다른 이들의 몸과 마음을 내려놓아 여읜다 함이다.”

불제자라면 자신을 잊어야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가 연기(緣起)하는 만물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가능하다. 그런 관계를 깨달으면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심신도 자성(自性)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 공(空)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모든 심신을 내려놓게 된다. 이것이 깨침이다. 몸도 마음도 공함을 깨달아 여의게 된다. 참나는 없다.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데 본캐 같은 것이 실재할 수는 없다. 

연기하는 법계에 사는 우리의 캐릭터는 사회 및 자연과의 동시적 관계 때문에 개념적으로 규정되곤 한다. 전기공학을 전공하는 교수도 재직한 대학과의 관계로 그런 본업 또는 본캐가 가능하다. 만약 그가 대학에서 어떤 사유로 해임되면 그는 교수로서의 본캐를 잃게 된다. 그런데 그가 평소 취미나 부업으로 프로그래밍을 해 왔다면, 이제 프로그래머로서의 그의 부캐가 그의 생계를 꾸리는 본캐가 될 법하다. IT업계의 불황으로 프로그래머 일을 그만두고 그가 즐기는 운전을 직업으로 삼으면 운전사가 그의 본캐다. 그러다가 다시 대학에 복직하면 본캐가 또다시 교수로 돌아간다. 어느 누구의 본캐나 부캐도 고정불변하지 않다.

 

통시적(通時的) 관계

존재의 모습을 관계로 파악하려 할 때 보통 동시적 관계를 고려하는데, 실은 통시적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찰나생 찰나멸하는 우리 삶은 지나간 무수히 많은 찰나의 삶들과 연기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그런 고리들 없이 현재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대학을 나와 군 복무를 마치지 않았다면 유학할 수 없었을 것이고, 유학 생활을 게을리했다면 교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의 삶 또한 미래의 삶을 만들 것이다. 지금 아껴 살며 연금을 붓지 않으면 은퇴 후 어렵게 지내게 된다. 

한편 시간적 관계는 과거에서 미래의 한쪽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그 반대 방향으로도 형성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의 삶은 현재의 관점에서 재조명되며 (개념적으로) 다시 고리 지워질 것이고, 과거와 현재의 삶은 미래에서 다시 조명되며 다시 규정되고 고리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부어 온 연금이 미래의 덜 불편한 삶을 위한 값진 투자로 판명 날 수 있지만, 만약 연기금이 고갈되어 은퇴 후 혜택을 받지 못하면 어리석은 투자로 규정될 것이다.

통시적 관계는 동시적 관계도 포함한다. 과거 한 찰나의 삶은 그 이전 또는 그 이후 찰나들뿐 아니라 그 동시적 시점에 있는 만물과 맺는 무수히 많은 관계 때문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이 원칙적으로 모든 시대 각각의 모든 삶과 세계를 연구 대상으로 하듯이, 통시적으로 파악하는 관계는 모든 시점에서의 동시적 관계 또한 포괄하게 된다. 관계로서의 연기를 논할 때 통상 동시적 관계만 주목하지만, 이제 이런 관점은 통시적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동시적·통시적 관계로서의 나

끊임없이 변하는 무수히 많은 관계의 다발로 존재하는 나에게서 불변의 자성을 가진 참나 혹은 본캐가 있을 수는 없다. 참나는 붓다가 그의 무아의 논증을 통해 이미 그 존재를 논박했으니 더는 논하지 않겠다. 

그런데 본캐에 대해서는 좀 더 철학적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본캐’라는 말에는, 이것이 비록 참나는 아니더라도, 어떤 자성을 가진 본래 캐릭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동시적·통시적 관계 가운데 어느 관계가 내 본캐를 형성하는가? 동료 교수와 학생은 모두 필자를 철학 교수로 알고 있다. 그러나 쌍둥이 딸들에게 본캐는 무엇보다도 아빠다. 아내에게는 남편이다. 친구들에게는 친구다. 스님들에게는 형편없는 불자고, 출판담당자에게는 마감 시간을 지키는 작가다. 이 가운데 어느 누구의 관점에서 본 모습이 본캐를 형성할까? 아무도 답할 수 없다.

그러면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내 모습이 본캐인가? 대승의 공을 진리로 여기는 필자는 솔직히 자성을 지닌 내 본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본캐일까? 엉터리라도 불자인 필자는 어떤 고정된 내 모습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견책하지만, 그래도 이번 생을 철학 교수로 살다 마치고 싶다. 그러나 이 모습 또한 본캐로 규정되기 어려운 이유가 한없이 많다. 다음 절에서 계속 논의하겠다.

 

경계(boundary)와 규정 그리고 패러독스

자성을 가진 본캐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개념적으로 적용되는 뚜렷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논의의 편의상 본캐를 교수라고 하자. 교수가 직업으로 하는 일의 경계는 어디인가? 물론 강의와 연구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고정관념으로 조 교수직을 시작했다가 당황했던 적이 많았다. 먼저 교과과정과 행정사무와 관련해 처리해야 할 서류작업이 산더미 같았다. 학생지도 또한 새로웠는데, 대학생도 교수의 생활지도가 필요하다는 대학본부의 의견을 반신반의하며 들었다. 그밖에도 온갖 위원회 참석, 교수노조 참가, 보직 수락, 대학 홍보 등 교수로서의 본캐에 속하는지 아닌지 경계를 긋기 어려운 일들이 끝이 없었다. 결국 교수가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인지 정확히 선을 긋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다른 대부분 직업도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교수의 최소한의 임무인 강의와 연구로 그 경계를 정하면 되지 않을까? 일견 설득력 있는 견해지만 이 또한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필자의 본캐가 있다면 서양철학 교수일 거다. 미국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지난 몇 해 동안 불교 철학 관련 글을 발표해 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불교계 대다수 독자는 불교학 교수로 여기고 있다. 그러면 필자는 서양철학 교수인가 불교학 교수인가? 필자 자신도 스스로 규정할 수 없다. 또 한국 출신이지만 평생 미국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그러면 미국 교수인가 아니면 한국 교수인가? 

관점을 조금 돌려 보겠다. 누군가 필자에게 교수로서의 본분과 쌍둥이 딸의 아버지로서 본분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라면, 아버지의 역할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면 본캐는 아버지가 될까? 그러나 나라를 구하는 일과 다 성장한 딸들 여행비를 보태주는 일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나라를 구하겠는데, 그러면 또 본캐는 애국지사가 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본캐를 상정하고는 그것에 고정불변한 자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상의 본캐 또한 공(空)하다. 우리는 단지 경우에 따라 더 중요한 일을 선택할 뿐인데, 이런 선택이 불변하는 본캐를 형성한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본캐나 부캐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 또는 사회적으로 편의에 따라 규정할 뿐이다. 그런 규정이 주관적이든 아니면 직업과 같이 사회적으로 주어지든 불변의 본질을 구성할 수는 없다. 

 

본캐의 패러독스

본캐를 포괄적인 의미로 ‘나의 본질적 캐릭터’라고 정의하면서 이런 본캐의 개념이 가질 수밖에 없는 논리적 문제를 살펴보겠다. 내가 생각하는 ‘주관적인 나의 캐릭터’가 본캐일까 아니면 다른 이들이 바라보는 ‘객관적인 나의 캐릭터’가 본캐일까? 1인칭 관점에서 보는 주관적 나와 3인칭 관점에서 보는 객관적 나는, 1인칭 관점과 3인칭 관점이 논리적으로 연결될 수 없기에, 전적으로 다른 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1)  주관적 나는 객관적 나가 되면 더는 주관적 나가 아니다.
(2)  주관적 나는 객관적 나가 아니어야 주관적 나다. 

그런데 고정불변의 자성을 가진 나의 본질적 캐릭터로서의 본캐가 실재(實在)한다고 가정해 보자. 실재하는 본캐는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대상이다. 상이한 관점으로 본다고 해서 다른 존재자가 생성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대상이 여러 관점에 따라 여러 다른 대상으로 존재 세계에 새로 창발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관적 나’도 존재론적으로 이 본캐를 지칭하고, ‘객관적 나’도 동일한 존재론적 대상인 이 본캐를 지칭하게 된다. 그래서 주관적 나와 객관적 나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대상이 되어 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위의 (1)과 (2)에 대입하면,

(3)  본캐는 본캐가 되면 더는 본캐가 아니다. 
(4)  본캐는 본캐가 아니어야 본캐다. 

(3)과 (4)는 논리적으로 명백한 패러독스다. 근본적으로 이 패러독스는 나의 본질적 캐릭터로서의 본캐가 실재한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논리학은 이럴 때 가정을 부정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본캐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철학은 논리적으로 패러독스를 초래하는 개념에 해당하는 대상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본캐와 부캐

본캐가 존재하지 않는데 부캐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개념상 본(本) 없이 존재하는 부(副)는 있어서는 안 되지만, 사장 없이 부사장들로만 운영되는 회사가 있듯이 본캐 없이 부캐들만 존재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는 것 같다. 홍창성은 교수고, 신문과 잡지에 에세이를 연재하는 작가고, 가끔 대중 강의도 하는 강사고, 절을 찾아다니는 불자고, 속도를 즐기는 운전자고, 쌍둥이 딸  기저귀를 7,500장 갈았던 아빠다. 필자는 {교수, 작가, 강사, 불자, 운전자, 아빠}라는 여러 부캐들이 모여 형성한 가상의 다발이다. 그리고 다들 편의상 이 묶음을 ‘홍창성’이라고 부른다. 

이 여러 부캐 가운데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각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그때마다 그것을 편의상 홍창성의 본캐로 보기도 한다.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는 본캐를 교수로 보고, 신문사와 잡지사의 편집인들은 작가로, 절에서는 불자로,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아빠로 본다. 편리한 개념적 도구인 본캐는 상대하는 사람과 장소에 의해서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서도 변한다. 20대 중반까지는 홍창성의 본캐가 학생이었고 한때는 군인이기도 했다. 현재는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지만 은퇴하면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본캐는 사라지게 된다. 고정불변의 본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때와 장소와 인연에 따라 편의상 그런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논의와는 별 상관없는 상식적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있다. 직업으로 좋아하면서도 잘하는 일을 본캐로 선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만 본캐로 삼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기 마련이어서 우리는 이 둘을 잘 조화해야 한다.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우리는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일을 중요한 캐릭터로 삼아 좀 더 성공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커리어도 쌓는 지혜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일은 부캐로 남겨두었다가 그 이후에 본캐로 추구해도 된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Minnesota State University Moorhead) 철학과 교수. 마음과 물질세계의 관계를 주제로 한 전공 분야 논문을 영어와 한글로 발표해 오고 있으며, 연기(緣起)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