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철학 시점] 느낌 아니까! 눈·귀·코·혀·몸·마음의 문 지키는 문지기 돼라

감정과 욕망 조절의 미학

2021-03-30     서광 스님

우리 사회는 지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전체가 요동치는 코로나 블루(우울, 무기력), 레드(분노, 짜증), 블랙(좌절감, 암담함)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가고 있다. 국민정신건강 실태조사에 의하면 2020년 우울 위험군은 2018년 3.8%에서 20%로 늘어났고,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은 4.7%에서 14.8%로 증가했다고 한다. 우울뿐만이 아니다. 연구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분노, 충격, 공포, 불안, 혐오, 슬픔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로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 미주본부의 카리사 에티엔 사무국장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생긴 정신건강 문제는 세계 모든 나라의 ‘초대형 악재’가 됐다. 정신건강을 돌보는 것이 코로나19 대응의 핵심이 돼야 한다”고 했듯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정신건강을 돌봐야 할 때이다. 

그야말로 순간순간 분출되는 감정의 파도를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극복해야 할까? 익숙했던 일상들, 그래서 당연하게 여겼던 삶의 패턴들을 잃어버린 지금, 우리는 예기치 못한 변화(무상함)에서 오는 고통에 직면하면서, 고통으로부터의 해탈, 자유의 로드맵을 보여주는 불교적 해법을 요청받고 있다. 

 

갈수록 느는 혐오 그리고 사성제

알다시피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인간이 겪는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코로나가 만들어낸 신조어, 코로나 블루, 레드, 블랙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부정적인 감정 상태다. 부정적인 감정은 고통을 유발한다. 그동안 TV나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에서 수많은 전문가는 저마다 코로나로 인한 정신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처방전들을 제시해왔다. 일명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세로토닌의 분비를 돕는 음식물 섭취를 비롯해 수면, 명상, 햇볕 쬐기, 운동 등 여러 가지 방편을 내놨다. 더욱이 정부 차원에서 엄청난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일시적인 도움에 그칠 뿐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되고 있다. 왜 끊임없이 우리의 고통은 재발하고 심지어 악화되고 있다고 느끼는가? 물론 이러한 현상은 우리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온 세계가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고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심도 있는 분석과 해결방안을 내놓고 있음에도 갈수록 혐오와 분노범죄는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고통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붓다의 처방전인 사성제, 즉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인 고통의 자각, 고통의 원인 통찰, 고통의 원인 제거,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적용해보자. 첫 번째 진리는 ‘여기에 코로나로 인한 고통이 있다’이다. 두 번째 진리는 ‘그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다’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우울, 분노, 좌절감 등 고통스러운 감정의 원인, 뿌리에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진리는 쉽게 이해가 간다. 지금 당장 괴롭고 힘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 진리는 도리어 화를 부추길지 모르겠다. 위로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고통의 원인이 코로나, 경제적 손실, 실직, 단절감, 정치 행정이 아니라 욕망이라니. 만약 우리가 겪는 미세먼지나 황사가 우리들의 욕망과 무지 때문이라고 하면 쉽게 공감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우리의 욕망이 미세먼지가 주는 고통에 적어도 부분적인 원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코로나와 맞물려 주식, 부동산이 한바탕 난리가 나고, 온라인 가상화폐에 돈이 몰리고 금융사기가 더 극심해진 현상을 생각해보라. 지금은 다소 소강상태이지만 영혼까지 끌어모아 돈을 빌려서 주식과 주택에 투자한다는 ‘영끌’ 현상도 더 기승을 부리지 않았나. 고통이 극심해지면 고통을 진정시키려는 노력도 커지지만 고통의 원인인 욕망도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세 번째 진리에서는 ‘욕망이 불행과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욕망을 소멸하여 불행과 괴로움을 극복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초기불교 경전은 욕망과 욕망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감정은 괴로움을 초래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은 그 괴로운 감정의 원인인 욕망과 직접 해결을 봐야지 감정과 씨름하고 맞붙어봤자 소용이 없다. 감정은 원인이 아니라 욕망의 결과로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번째 진리에서는 ‘욕망을 소멸하는 방법으로 여덟 가지 올바른 길, 즉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을 닦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욕망, 느낌으로 다뤄라

세 번째 진리에서 또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솔직히 우리 중에 누가 욕망과 싸우고 싶고, 또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는가? 달콤함과 즐거움, 그리고 때로는 삶의 의욕과 활력을 주는 욕망이 반드시 나쁜 것인지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욕망은 고통도 주지만 분명 즐거움도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나고, 불행과 행복, 사랑과 미움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니 집착하지 말라고 하지만, 미움이 두려워서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온갖 즐거움과 매력적인 것들이 우리의 오감을 유혹하고, 자본이 도덕이고, 돈이 인격이고 품격처럼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부자가 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버리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그건 붓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붓다는 욕망도 감정과 마찬가지로 정면으로 승부하라고 하지 않았다. 욕망과 감정은 억압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무성한 나뭇가지를 치면 더 무성하게 자라나듯이 욕망과 감정은 제거하거나 억압하려고 할수록 그에 따른 반작용은 더 거세진다. 

붓다는 감정의 뿌리인 욕망을 다루기 위해서는 욕망이 미처 힘을 얻기 전에, 즉 욕망으로 발전되기 이전 단계인 ‘느낌’을 주시하라고 가르쳤다. 느낌에는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중성적인 느낌 3종류가 있으니 이 3종류의 느낌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라고 했다. 좋은 느낌은 탐욕, 즉 욕망으로 향하게 하고 싫은 느낌은 화의 감정으로 향하게 하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은 어리석음으로 향하게 한다. 그래서 욕망을 소멸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욕망의 길목에서 욕망으로 나아가는, 잠재적 욕망인 느낌을 다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길목은 어디에 있는가? 느낌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관찰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다. 느낌은 우리 몸을 통해서 일어난다. 언제 일어나는가? 바로 우리 눈이 대상을 보는 순간, 귀가 소리를 듣는 순간, 코가 냄새를 맡는 순간, 혀가 맛을 보는 순간, 몸이 접촉하는 순간, 마음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느낌이 일어난다. 느낌을 잘 알아차리려면 우리의 눈·귀·코·혀·몸·마음, 즉 6개의 문을 들락거리는 대상인 모양·소리·향기·맛·촉감·마음 등 6가지 대상을 철저하게 지키는 문지기 노릇을 잘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고통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 고통의 뿌리인 욕망을 제거해야 하는데, 욕망과 싸우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으므로 욕망의 길목에서 욕망의 싹인 느낌을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느낌은 우리 몸의 감각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단전 또는 코끝에 주의를 두고 호흡하며,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몸의 감각(body-sense) 또는 몸의 느낌(body-felt)은 찰나적이고 부지불식간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너무나 미세해서 평소에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좋은 것을 보거나 듣거나 맛보면 그 즉시 더 보고, 더 듣고, 더 맛보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히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느낌은 주로 성자의 수준에서 알아차릴 수 있고, 보통 사람은 느낌이 지각(또는 인식)으로 발전하고 지각은 다시 욕망을 키우는 의도 또는 의지로 발전해서 행위를 하게 만든다.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이 일련의 과정이 일어나는 데 0.5초가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자신의 욕망과 일치하면 우리는 만족, 자만, 기쁨 등의 감정 상태가 되고, 욕망에 어긋나면 화, 미움, 슬픔 등의 감정 상태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인식하기가 어렵다.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나 생각을 인정하기가 어렵고, 싫고, 억압하거나 회피한다. 이때 부정적 감정이 우리 내면을 향하면 우리 자신을 향한 분노가 되어 우울, 약물, 자해, 자살로 발전하게 되고 반대로 밖으로 향하면 타자를 향한 분노가 되어 합당한 이유 없이도 타자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니까 고통의 뿌리인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욕망의 새싹인 느낌을 발견해야 하는데 초심자는 이를 놓쳐서, 욕망의 뿌리에서 자란 고통의 감정 상태와 마주하게 된다. 결국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명상을 시작한 사람들은 고통과 직면하고 고통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붓다는 “고통을 보는 자는 고통의 발생도 보고, 고통의 소멸도 보고, 고통의 소멸로 가는 길도 본다”고 했다. 따라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열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고통에 대한 통찰, 자각을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감정 다루기 실습

이제 코로나 블루, 레드, 블랙 현상이라고 하는 우울, 분노, 좌절감 등 정신적・신체적 고통에서 해탈하는 붓다의 처방전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직접 체험해보는 실습을 해보자. 지면 관계상, 4가지 단계 가운데 첫 번째 단계인 고통을 만나는 체험을 해볼 것이다. 

실습에 앞서 미리 알아둘 게 있다. 고통을 보는 것은 힘들고 괴롭기에 우리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함께 불러일으킴으로써, 고통을 보는 지혜 실습과 고통을 대하는 자비 실습을 병행할 것이다. 지혜 수행과 자비 수행은 원효 대사가 말했듯이 새의 양 날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 어느 한쪽 수행만으로는 온전하게 고통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편안하게 앉거나 눕는다.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부드럽게 눈을 감고 심호흡을 3번 해본다.

한 손 또는 두 손을 가슴이나 다른 위로가 되는 곳에 얹고, 손의 따뜻한 기운을 느껴본다. 그리고 그 기운이 자신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상상해본다.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따스한 기운을 느끼면서 지금 이 공간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느껴본다. 

지금, 이 순간 코로나로 인해서 자신이 겪고 있는 힘든 상황을 떠올려 본다. 어떤 문제가 있나?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무슨 말이 들리나?

주의를 자신의 내면으로 가져가서 자신 안에 어떤 감정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려 본다. 알아차렸다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본다. 예를 들면, 우울? 분노? 좌절감? 불안? 슬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단순하게 그 감정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약 여러 개의 감정이 일어났다면, 그중에 가장 강한 감정에 이름을 붙여본다.

이제, 마치 친한 친구가 그 감정을 경험하고 있을때 해주는 것처럼, 부드럽고 이해하는 목소리로 감정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말해 준다. “분노구나.” “우울이구나.” “절망이구나.” 

이제 주의를 몸으로 가지고 가서, 자신의 감정을 몸을 통해서 찾아본다. 마음의 눈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쭈욱 훑어보면서 자신의 감정이 몸의 어느 부위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지 발견해 본다. 아마 목 뒤가 뻐근하거나 위장이 아프거나 심장에 통증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마음을 그 부위로 향하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느껴본다.

이제 몸의 그 부위를 부드럽게 해준다. 마치 따뜻한 물속에 있는 것처럼 근육이 부드러워지게 하고 이완하게 한다. 이때 불편한 느낌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냥 부드럽게 포용해준다. 

이번에는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자신을 위로해준다. 불편을 느끼는 몸의 부위에 손을 얹고 손의 따스한 기운이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자신의 몸을 사랑스러운 아기의 몸인 것처럼 상상해도 좋다. 

혹시 자기 자신을 위로해주는 것이 힘들거나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면, 친한 친구가 자신과 똑같은 힘든 상황에 있다고 가정하고 그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지 떠올려 본다. 그리고는 그 말을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해주듯이 부드러운 톤으로 자신에게 말해 준다. (많이 힘들었구나. 나도 마음이 아파. 그래도 잘 참고 견뎌서 자랑스럽구나 등) 혹시 자신을 비난하고 거칠게 대했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불편함이 그곳에 있는 것을 허용해준다. 불편함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불편함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욕구를 내려놓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해준다.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가지고 부드럽게 해주고, 위로해주고, 허용해주기를 반복해준다. 순서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

느낌이 바뀌거나 불편함을 느끼는 몸의 위치가 바뀔 수도 있다. 괜찮다. 그냥 그대로 머무르면서 부드럽게 해주고 위로해주고 허용해준다. 

그리고 준비되면 부드럽게 눈을 뜬다.

잠시 시간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떠올리면서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전해 본다.   

 

서광 스님
(사)한국명상심리상담연구원 원장. 대학과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이후 미국에서 종교심리학 석사와 자아초월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Mindful Self-Compassion 명상프로그램을 한국에 도입하여 명상 지도자 양성에 힘쓰고 있다. 불교심리학과 선 심리학, 명상심리상담, 자아초월 심리치료 관련 강의와 워크숍 및 집단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