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연결점

강의를 많이 하다보니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

2021-04-12     백승권

여러 갈래길

어느 날 시사평론가 김종배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필자의 전 직장이었던 미디어오늘의 기자 선배였다. 김 선배는 지금 교통방송 라디오 저녁 시사프로그램을 거쳐 문화방송 라디오 아침 시사프로그램 ‘김종배의 시선집중’을 진행하고 있을 만큼 유명한 진행자가 됐다. 필자와 통화할 무렵엔 ‘손석희의 시선집중’ 작가를 하며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칼럼을 정기적으로 연재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김 선배는 말했다. 

“프레시안에서 직장인을 위한 글쓰기 강의 한 번 해볼래?”

너무 느닷없는 제의라 즉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선배의 말이 이어졌다. 

“그거 하던 분이 경기도 교육감 대변인으로 가게 돼서….”

급하게 대타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태를 얼추 파악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선배 제안은 고맙지만 강의 경험도 없는 제가 그걸 어떻게 맡겠어요? 다른 경험자를 찾아보는 게 좋겠는데요.”

“아냐. 백승권 씨 정도면 충분히 잘할 수 있어.”

이 말이 선배의 과분한 신뢰인지, 대타를 찾아야 하는 절박감의 발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날의 통화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났다. 

그 무렵 필자는 조계종이라는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 어렵사리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동안의 직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는데, 조계종 직원이 된 경위는 이러했다. 

2008년 청와대를 나온 이후 동국대 중장기 미래비전 수립 프로젝트를 1년 반 정도로 마치고 다음 직장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어느 국회의원 보좌관 자리가 났다. 2주일 뒤 그 국회의원의 면접을 보기로 약속했다. 그 전화를 받은 저녁 갑자기 학교 후배가 상의할 일이 있다며 보자고 했다. 조계종에서 도법 스님을 중심으로 사회적 갈등 해소 기구인 화쟁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 사무국장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사무국장은 정치권, 사회운동단체, 언론계 등을 두루 만나야 하는데 그 적임자가 바로 필자라는 설명이었다. 

청와대에 있을 때부터 사회적 갈등 해소는 필자의 주된 관심사였다. 네덜란드, 스웨덴, 아일랜드 등의 국가들이 어떻게 샬트세바덴(1938년 스웨덴 노사정 협약) 같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했는지를 정리한 대통령 보고서가 나올 때마다 유심히 읽고 학습했다. KDI 정책대학원의 ‘공공갈등 해소’ 단기 과정도 수료했다. 후배의 제의에 마음이 쏠렸지만, 이미 국회의원의 면접을 보기로 약속한 터라 입장이 난처했다.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자 후배는 일단 도법 스님을 만난 뒤 판단해보자고 말했다. 

조계사 인근 콩나물국밥집에서 스님을 만났다. 예전에 탁발순례 때 스님을 한 차례 뵌 적은 있었지만, 스님은 기억하지 못했다. 스님이 사회적 갈등해소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한 것 같은데 그것은 별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 일을 대하는 스님의 간절한 말씀과 절실한 표정이 필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스님을 만나고 난 뒤 바로 국회의원에게 전화해 면접을 볼 수 없게 됐노라고 말했다. 

 

역지사지 전략

그 다음날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가 직접 전화를 했다. 어제 김종배 씨랑 통화한 내용을 들었는데, 이 강좌를 꼭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당부였다. 마찬가지로 즉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대변인으로 가게 된 분과 친분이 있는 언론계 어느 선배의 전화가 왔다. 

“백승권 씨가 좀 도와줘. 그 선배가 영전해서 가는데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도록 짐을 대신 맡아주면 어떨까? 강의를 잘하고 못하고는 나중 문제고.”

이 말이 딱 마음에 다가왔다. 그동안 ‘이 강좌를 잘 운영할 수 있을까’ 여부, 즉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 문제를 바라봤는데, 그 반대의 입장에서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지사지였다. ‘그렇다면 못할 것도 없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시작된 글쓰기 강의는 40대 중반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일주일에 두 번 저녁 7시 이후 장충동에 있는 어느 건물 강의실에서 수강자들을 만나는 것으로 강사 생활이 시작됐다. 15명가량의 수강자들은 대기업, 벤처기업, 공무원, 연구기관, 사회단체 등 다양한 구성의 직장인들이었다.

특별한 강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는 방법에 집중하자’고 마음 먹었다. ‘내가 알고 있는 글쓰기 관련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수강생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찾아내 해결해주자.’ 강좌를 수락했을 때 가졌던 마음처럼 역지사지 전략이었다. 

일단 강의 때마다 글을 쓰게 만들었다. 백지상태에서 쓰라고 하면 너무 막막해할 것 같아 신문 기사나 칼럼 등의 텍스트를 주고 이것을 요약하거나 보고서로 바꾸는 방식의 실습을 진행했다. 글쓰기 공포증을 갖고 있던 사람들조차 짧은 시간 내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글의 완성도와 별개로 수강생들이 자신감을 갖게 됐다. 

수강생들이 쓴 글을 촬영해 빔프로젝트 화면에 띄우고 공개첨삭을 진행했다. 이렇게 글을 여러 사람 앞에 발표함으로써 주저함과 머뭇거림을 없애고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궁극적으로 독자를 의식해야만 글쓰기 능력은 향상될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겐 아주 엄격하게, 글을 못 쓰는 사람에겐 아주 관대하게 피드백을 보냈다. 붓다의 대기설법을 나름대로 응용한 것이라고 할까?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가혹한 평가를 받아낼 맷집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지금 수준에 안주하지 않고 더 모험적인 과제를 향해 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글을 못 쓰는 사람은 이제 겨우 마음을 냈는데 사소한 비판으로 그 마음이 맥없이 무너질 수 있다. 글의 수준을 따질 것이 아니라 계속 쓸 수 있는 자신감을 북돋아 주고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강의가 끝나면 항상 뒤풀이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생생한 직장 생활의 고충을 들을 수 있었다. 필자가 겪은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 이야기를 수강생들은 아주 많이 궁금해했다. 인간적 유대감이 깊어지면서 강의와 별개로 수강생들이 직장에서 작성한 문서를 고쳐주기도 했다. 

이렇게 3년 정도 평일 낮엔 조계종 근무를 하고 평일 저녁과 휴일엔 강의하는 겸업 생활을 했다. 수강생들이 자신의 회사에 필자를 소개해 종종 특강을 나가기 시작했다. 강의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조계종 월급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2012년 가을 조계종을 나와 전업강사로 독립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국회 보좌관을 선택했다면 글쓰기 강의 제의 자체를 받지 못했을 것이고 제의를 받았다 해도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계종 생활은 정시 퇴근이 보장되는 조건이라 겸업이 가능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조계종, 글쓰기 강의 모두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선택한 결과다. 작고한 애플의 전 CEO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항상 갈망하라,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제목으로 축사를 했다. 그는 ‘리드칼리지를 6개월 만에 자퇴하고 우연히 서체 강의를 듣고 그것이 나중에 애플을 창업해 맥킨토시 개발을 할 때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인생의 연결점을 이렇게 힘주어 강조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내다보고 점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을 연결해 볼 순 있겠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 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미래로 꼭 이어진다는 것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언가를 믿으세요. 직감이든 운명이든 인생이든 업보든, 그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이런 방식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제 삶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백승권
글쓰기 컨설팅 전문업체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로 업무용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