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 조선의 수도, 한양 도시설계의 비밀을 풀다

고승들의 비보사상

2021-03-03     고영섭

명당의 탄생, 신토불이 교설과 제교 포섭의 법용

대개 인간은 자원을 구할 수 있는 산이 있는 곳과 생존에 기본이 되는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 한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자리[背山臨水]’를 명당(明堂)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과 물이 공존하는 공간에 대한 선호는 국가의 수도 결정에도 반영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좋은 환경에서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보완책을 통해 땅의 기운을 북돋우고 물의 수로를 열어주어 명당화(明堂化)를 꾀하는 수밖에 없다. 명당은 인간과 자연을 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정도의 인위를 보태면 어떻게 될까? 명당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지덕이나 지기(地氣)가 부족한 곳을 명당으로 바꾸려면 그곳을 살필 줄 아는 안목과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법력이 있어야만 한다. 안목은 다년간의 수련으로 터득하는 것이며, 법력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얻은 수행의 힘에서 나온다.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한 고승들이나 산천초목의 기운을 체감해낸 도사(지관)들은 이런 안목과 법력을 지니고 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국가 중대사인 국도를 결정할 때 이들 고승과 도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도울 비(裨)’와 ‘기울 보(補)’의 합성어이자, ‘보좌하다’와 ‘보수하다’의 두 뜻을 결합한 ‘비보(裨補)’의 출현 과정이다.

고승들은 국도나 도시에서 부족한 부분을 ‘절’과 ‘탑’, ‘불상’, ‘부도(당간)’ 등의 시설을 통해 지덕을 북돋우고 지기를 보수하는 ‘비보’와 ‘산’과 ‘물’, ‘햇빛이 잘 드는 방위’와 ‘문화’의 조건을 갖춘 ‘풍수(風水)’를 고려했다. 여기서 ‘부족한 대지의 기운을 두터운 사탑의 공덕으로 채운다’는 ‘비보’ 개념은 불경의 신토불이(身土不二) 교설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일부 선사들이 풍수 이론을 원용했고 몇몇 고승들에 의해 ‘비보풍수’로 계승됐다. 이처럼 비보사상은 ‘육신과 국토가 둘이 아니다’라는 신토불이 교설과 지령(地靈) 신앙 등을 통섭하는 밀교 경론의 제교 포섭 사상에 의해 가능했다.

도갑사 도선국사 진영(도갑사 소장).

 

비보사상, 선과 교의 방편

현교 경론뿐만 아니라 밀교 경론에서는 우리가 사는 국토를 우리 몸에 비유해, 아픈 곳에 뜸을 떠서 치유하듯 비보사상을 제시해 왔다. 특히 밀교에서는 방위를 대단히 중요시하여 불지경계와 보살과 만다라를 각각 방위에 따라 배치했다. 밀교의 택지법은 대개 관지상법(觀地相法), 관지질법(觀地質法) 그리고 치지법(治地法)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이 중 지형이 갖추고 있는 외적인 조건, 즉 산천국토의 지세(地勢), 유형(流刑), 수목(樹木), 유수(流水) 등 지상(地相)을 관찰하여 길지와 흉지를 판별하는 관지상법이 널리 사용됐다. 이 택지법에 따르면 본존인 대일여래(중엽팔대)가 자리하는 만다라의 중앙에는 금륜불정이 있고, 그 주위에 마두관음·성관음·천수관음·여의륜관음·십일면관음·준제관음 등 여섯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전남 곡성 동리산문을 개설한 신라의 적인혜철(寂忍惠哲, 784~861)은 중국 강서성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선풍을 드날린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으로부터 남종선의 맥을 전해온 선사다. 혜철은 서당지장을 만나 “은밀하게 심인을 전수받으니 적수가에서 잃어버렸던 구슬을 찾은 것과 같이 영대(마음)가 태허공이 탁 트인 것처럼 활연해졌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3년 동안 자지도 않고 자리를 뜨지도 않고 대장경을 열람하여 선과 교의 동등한 가치를 담은 선교의 융합을 모색했다. 무주 관내의 쌍봉난야(雙峯蘭若)에서 하안거에 들어있을 때는 주사(州司)의 간청을 받고 기도하여 비를 내리게 했다. 문성대왕에게는 ‘국가를 다스리는 긴요한 방책 몇 가지[理國之要若干條]’를 올려 국가와 조정에 보태고 늘여 도움이 되게 했다. 또한, 동리산 대안사지를 선정하며 제신(諸神) 사상을 불교에 포섭하고자 했다. 그는 곡성 동리산의 대안사지(大安寺地)가 삼한의 경승지가 될 수 있는 지세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이것이 밀교의 관지상법 내용에 부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밀교 사상의 관지상법을 비보사상으로 원용한 선사는 혜철의 심인을 전수받은 신라의 도선(道詵, 827~898)이다. 도선은 혜철에게서 ‘설함 없는 설함[無說之說]’과 ‘진리 없는 진리[無法之法]’의 불도장[心印]을 전수받은 직계 제자였다. 그는 우리나라 국토 전체를 하나의 완벽한 유기체 또는 만다라(曼茶羅)로 봤다. 그리고 위치나 방위 및 산천의 지세에 따라 알맞은 곳을 택해 절·탑·불상·부도(당간)를 세우고 여러 보살에게 기원함으로써 개인과 국가의 재난을 물리치고자 국역진호설(國域鎭護說)을 주창했다.

혜철의 제자였던 도선의 비보사상은 밀교신앙을 연원으로 하여 창안된 도선 특유의 법용(法用)임과 동시에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救國利民] 하나의 방법이자 통일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비보사상은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명당만을 찾아서 쓰는 중국의 ‘이론 풍수’를, 땅의 결점을 보충하여 이용하는 한국적 ‘비보풍수’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이는 지모신(地母神)격인 땅이 명당으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더라도 그곳을 보완하여 명당으로 삼는 방식이다. 도선은 선사로서 평소에 늘 선리참구(禪理參究)에 몰두했으며 “절을 세우고 탑을 세워 얻어진 국가적 이익과 공덕이 선리의 정밀한 깊이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도선의 신앙적 본질은 선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어느 때인가 그는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을 만나 산천(山川) 순역(順逆)의 비보 술법을 활연히 깨치고 곁들여 음양오행술을 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아래 신라의 혜철과 도선, 고려의 여철과 의천, 영현과 태고, 조선의 무학과 성지 등은 국도의 후보지인 개성과 한양을 비교하거나 전도 과정에 참여했다.

 

한양 천도, 국도의 이동

도선은 용선(왕륭, 왕건의 부친)에게 택지법 책을 한 권 건네주며 30년 이후에 왕건에게 전해 개성에 도읍할 것을 권하고, 남경(한양)의 지세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곳에 비보사찰을 짓게 하고 다른 곳에는 짓지 못 하게 했다. 이러한 도선의 비보사상은 고려 초기의 여철에게 이어졌고, 중기의 의천, 김위제, 영현, 후기의 태고보우에 의해 남경의 소환이 본격화됐으며, 이를 계승한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에 의해 한양 전도와 개성에서의 천도가 이루어졌다. 이는 현교의 신토불이 교설과 밀교의 제교 포섭의 법용에 의해 가능했다. 신앙의 본질을 선법에 두었던 도선을 비롯해 고려의 여철, 의천, 영현, 태고, 조선의 무학, 성지 등의 고승들은 교리 내지 선리에 기반을 두면서도 비보사상을 원용하여 개성과 한양의 전도와 천도의 기반을 제시했다.

남경, 즉 한양의 부상은 고려 시대에 이미 있었다. 도선의 제자였던 여철이 남경 북한산 승가사에 주석했고, 이어 문종이 남경으로 승격된 한양에 신궁을 짓고 이궁(離宮)을 두었다. 의천도 삼각산 승가굴을 방문했고, 선종 대에는 개경 구산사의 스님 영현이 삼각산 신혈사에 주석했다. 그 뒤 숙종이 남경을 경영하여 별궁을 두면서 한양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양은 고려 말 삼대 화상 중의 일인이자 조계종의 중흥조인 태고보우(1301~1382)에 의해서도 주창됐다. 

고려 후기에는 양주 땅 아사달(阿斯達, 阿思達)이 불교도들 사이에서 주목됐다. 당시 양주는 한양을 통솔하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으며 고려 나옹의 스승인 지공이 나옹에게 ‘삼산 양수지간에 머무르라’고 한 바로 그 양주 고을이었다. 이 때문에 불교도 사이에는 양주 땅인 아사달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되면 나라의 운명을 800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아사달 신앙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한양 천도의 결실을 본 이는 태조의 왕사인 무학자초였다. 개성에서 건국한 조선 태조는 개성을 떠나 새로운 도읍에서 나라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계룡산, 무악, 한양 등의 후보지 중 한양으로 전도했다. 당시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무학을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이내 도읍으로 정할 고을을 물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태조가 왕조 창업 직후 무학을 시켜 도읍을 정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에 무학은 삼각산(북한산) 만경대에 올라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비봉을 거쳐 백악산 밑에 도착하여 궁성의 터를 정했다. 무학이 한양을 점쳐 “인왕산(仁王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라고 했다. 이에 정도전(鄭道傳)이 난색을 보이며, “예로부터 ‘제왕은 (북극성이어서) 모두 남면(南面)하고 다스렸다’는 말은 들었어도 동향(東向)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고 했다. 무학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고 했다.

이처럼 한양 전도론은 고려 말 태고보우가 남경 천도를 거론한 이래 조선 태조의 요청으로 재론됐으며 무학자초에 의해 추진됐다. 하지만 인왕산을 주산으로 동향의 궁궐을 짓고 백악을 좌청룡으로 종남산(목멱산)을 우백호로 제시한 무학이 아닌,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남면의 궁궐을 짓고 낙타산(낙산)을 좌청룡으로 인왕산을 우백호로 주장한 정도전의 기획을 태조 이성계가 수용함으로써 현재의 도성과 궁궐이 지어졌다. 

그러나 왕사 무학은 정도전의 기획으로 인한 국도의 결핍 부분을 몇 가지 비보 작업을 통해 보완함으로써 국도의 명당화라는 대의를 버리지 않았다.

필자미상 무학대사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산(仁王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라고 했다. 무학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고 했다.

 

비보사찰 통한 국도의 명당화

사실 정도전이 주장한 북쪽을 등지고 정남 방향으로 향해 앉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은 남산을 안산(案山, 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할 수 없는 방위이다. 남산을 안산으로 삼으려면 경복궁의 정궁과 광화문을 옆으로 좀 비틀어 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바라보는 해좌사향(亥坐巳向), 즉 ‘정서북에서 북쪽으로 15도의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의 각도 안’인 해방(亥方)과 ‘남동으로부터 남쪽으로 15도 되는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의 각도 안’인 사방(巳方)으로 해야 한다.

안산 없이 곧바로 객산(客山)인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는 경복궁은 일렁이는 화기(火氣)로 인해 건립 당시 이미 3차례나 불이 났다. 그때 공사를 중단하거나 좌향을 바꾸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공사를 고집했고 결국 무학의 예견대로 200년을 유지하지 못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경복궁은 1867년 대원군에 의해 복원되기까지 275년 동안 공터로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 스님의 풍수 기획 대신 정도전의 말을 따라 경복궁 자리를 잡았다. 경복궁은 일렁이는 화기로 건립 당시 
3차례나 불이 나는 등 난리를 겪어야 했다. 북악산(백악산)을 등지고 있는 경복궁 근정전.

무학은 신라의 고승 의상이 지었다는 『비기(祕記)』를 근거로, 본인 주장이 아닌 정씨(鄭氏) 성을 가진 주장대로 하면 5대를 가지 못해 자리다툼이 있게 되고, 200년을 못 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만일 무학의 제안처럼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좌청룡의 북악(백악)과 우청룡의 남산을 거느린 동향 동면의 궁궐을 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왕권 중심 체제가 아니라 정도전이 꿈꾼 신권 중심 체제를 확보할 수 있었을까? 태조의 아들들이 벌인 왕자의 난과 세종의 아들 수양(首陽)이 벌인 계유정란(癸酉靖亂)을 피할 수 있었을까? 200년이 지나 일본의 침략을 받은 선조가 도성 한양을 버리고 신의주로 몽진을 떠나지 않아도 됐을까? 지금처럼 강남이 발달하지 않고 강북의 신설동과 청량리 일대를 중심으로 더욱 균형적인 발전을 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한 동향 궁궐 시설 주장이 수용되지 않자 몇 가지 비보 작업을 통하여 국도의 명당화를 시도했다. 먼저 그는 인왕산 아래 옥인동(玉印洞), 즉 제왕의 옥쇄라는 동명을 부여함으로써 주산으로서 인왕산의 위상을 보완하고자 했다. 이어 낙타산의 낮은 좌청룡을 비보하기 위해 동숭동(東崇洞), 즉 동쪽을 숭상한다는 이름과 숭인동(崇仁洞), 즉 인방(仁方)을 숭상한다는 이름을 부여했다. 남쪽의 관악산을 방어하기 위해 숭례문의 편액을 세로로 세우게 하기도 했다. 또 인왕산을 주산으로 고수하지 못한 대신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양을 둘러싼 북악산, 인왕산, 목멱산, 낙타산 등 내사산과 용마산, 덕양산, 관악산, 삼각산 등 외사산에 4대 비보사찰을 지정했다. 한양 동쪽의 청련사, 서쪽의 백련사, 남쪽의 삼막사(혹은 불암사), 북쪽의 승가사 등이 외사산의 비보사찰이다. 이외에도 한양의 내사산 중 하나인 인왕산에 인수사, 복세암, 금강굴, 니사(尼社, 尼舍), 나한당 등의 비보사찰을, 외사산 중 하나인 관악산-삼성산-호암산에 관악사, 연주암, 염불사, 관음사, 삼막사, 호압사, 사자암 등의 비보사찰을 적극적으로 세움으로써 지기의 결함과 지덕의 부족을 보완할 수 있게 했다.

비록 도성과 궁궐은 정도전의 주장처럼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남면으로 시설됐지만, 무학의 비보 작업으로 한양의 도시설계는 도선의 비보사상과 이를 계승한 무학의 비보사상에 입각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백성들 또한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도 이들 비보사찰에 의지해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었다. 결국, 국도 한양은 국가 비보사상에 의해 창건된 비보사찰들을 통해 명당화되었으며 나라의 수도로서 전국을 통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학은 최종적인 승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선전도(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840년대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전하는 서울시가도.

 

사진. 유동영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사단법인 한국불교학회 회장 겸 이사장, 동국대 불교대학 세계불교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