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 선禪· 자연· 마음 그 만남의 미학

풍수와 불교

2021-03-03     최원석

새 시대 이끄는 사상이었던 비보

고려 시대에 풍수와 불교는 서로 결합해서 사회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풍수의 지력사상(地力思想)과 불교의 불력신앙(佛力信仰)이 결합했다. 조선 시대에는 풍수와 불교 요소가 결합한 설화가 많았다. 서로 긴밀하게 만난 풍수와 불교는 한국 사회에 독특한 사상과 문화, 경관을 형성했다.

풍수와 불교의 만남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고,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한국에서 전개된 풍수와 불교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신라 하대의 성립기다. 이때는 중국에서 선종이 들어오면서 풍수와 불교가 본격적으로 교섭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속성이 전연 다른 두 사상인 풍수와 불교가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서로 경합하다 나중에는 협조적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통해 불교는 풍수의 확산에 이바지했고, 풍수는 사찰입지와 사찰 택지법에 영향을 주었다. 선종이 풍수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산천의 허실을 보완하기 위해 비보사상이 정립됐고 그 결과물로 비보설(비보사탑설)이 형성됐다. 비보사상은 나말여초의 사회 전환기에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사상적 추진력으로 기능했다.

둘째, 고려 시대의 흥성기다. 사회지배층에서 강력한 공간 사상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비보사상을 국가의 정치 주도 세력이 정책적으로 적극 활용한 시기다. 당시의 두 주류 문화인 풍수와 불교는 제도권 안에서 지배적 지위를 획득하고 서로 공고하게 결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려 조정은 비보설을 국토 공간의 통합 운용원리로 삼고 수도와 지방 곳곳에 비보사찰을 설치해 관리했다. 그리고 풍수와 불교를 결합한 국가적 의례로서 지리연기비보(地理延基裨補, 왕업을 연장하는 비보법)를 실행했다.

셋째, 조선 시대의 쇠퇴기다.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불교는 억압받고, 도선의 비보설 역시 유교 이념에 견제됐다. 기존의 비보사찰은 대폭 축소되거나 기능을 대부분 상실했다. 

많은 사찰이 존립 위기에 몰렸고, 지방 사찰 일부가 근근이 사세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유교 이념이 강고하게 지배한 조선 사회에서 풍수와 불교는 급격히 쇠락했지만, 동네마다 지관이 있을 정도로 민간신앙으로 전개됐다. 그 과정에서 도선, 의상 등 유명한 스님의 이름을 빌린 풍수도참서와 비결서, 민간설화 등이 만들어졌다. 

봉암사는 “하늘이 준 땅이니 승려의 거처가 되지 못한다면 도적의 소굴이 된다”는 곳에 터를 잡고 희양산에 안겨 개산했다. 백두대간의 단전 부분에 위치한 희양산은 산중턱부터 화강암 바위들로 이뤄져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처럼 보인다.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 경북 문경 봉암사. 봉암사 터를 정할 때 일화를 기록한 최치원의 ‘봉암사지지증대사적조탑비’에 
따르면 “산이 사방에 병풍 같이 둘러막고 있음을 보니,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 올라가는 듯하다”고 했다. 

 

지방호족에게 매력 어필한 선종과 풍수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한 이래 왕족이나 귀족층을 중심으로 풍수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왕실이나 국도 중심의 지배세력에 국한되기는 했으나 불교 흥성에 비례해 풍수설도 어느 정도 유포됐다. 신라에서 불교가 주로 지배세력과 밀착돼 경주 중심으로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풍수설도 왕궁이나 왕릉, 지배세력과 연결된 사찰터 선정 등 국도 경주를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중앙지배층에서는 사찰터의 왕릉지 이용을 둘러싸고 풍수와 불교가 경합하는 모습도 벌어졌다.

최치원의 「대숭복사비문」에는, 8세기 말 신라 왕실의 왕릉지 선정을 둘러싸고 풍수와 불교가 우위를 다투는 모습이 나온다. 곡사(鵠寺)터가 풍수 명당이라 원성왕(785~798)의 왕릉지로 쓰자는 의견이 조정에 대두하자, 불교 공간으로서 사찰의 기능과 왕릉의 풍수적 효용을 두고 군신 간에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결국 곡사터를 왕릉지로 선정한다. 사찰터를 풍수적으로 이용했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사실은 8세기 말 이미 사회적 영향력이 커진 풍수가 기존의 지배적 문화요소인 불교와 경합하다 결국 채택되는 초기 과정을 보여준다.

풍수와 불교가 만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둘의 만남은 사찰터 잡기라는 실용적 과정으로 본격화됐음을 알 수 있다. 8, 9세기 신라 하대에 중국에서 선불교가 전래하자, 그 문화전파자인 스님과 함께 풍수도 지방으로 확산했다.

6세기 초 달마가 중국에 처음 전래한 선불교는 7, 8세기에 이르자 이미 중국 사회에 성행하던 풍수와 교섭을 본격화했고, 강서(江西) 지역의 선종 사찰들에 풍수적 입지가 널리 퍼졌다. 당시 신라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선승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에 의해 9세기경부터 우리 선종 사찰에 풍수적 입지가 생겨났고, 지식인과 지방 호족세력들에도 풍수가 확산하기 시작했다. 봉두산 태안사(곡성), 지리산 실상사(운봉) 등 구산선문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초기 선종 사찰은 대부분 풍수적 입지를 취했는데, 이는 선문을 새로 세운 스님들이 대부분 중국에 유학했고, 풍수가 유행하던 강서 지방의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법맥을 받아왔다는 증거다.

그럼 신라 하대에 지방을 중심으로 풍수와 선불교가 서로 만날 수 있었던 사회정치적, 사상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선종은 지방 호족세력의 정치적 지원을 업고 교종의 지배적 권위에 대항하는 일종의 개혁 사상이었다. 따라서 왕족과 귀족의 정치적 지배력이 미치는 공간 범위인 왕도 경주나 대도회보다는, 호족세력의 근거지인 지방 외곽과 주변 산간에 사찰터를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산천의 형세를 파악하는 정교한 논리체계를 갖춘 풍수 입지론은 선종 사찰터 선택에 영향력 있는 지식정보로 활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선진적 사찰 택지법은 기존의 경험적 터 잡기 방식, 혹은 불령지(佛靈地)나 간자(簡子)를 활용한 터 잡기 방식에 비해 합리적이고 발전된 형태로서 효용성이 높았다. 

이러한 풍수사상의 영향으로 경주가 중심이 된 재래적 불국토 지리관을 극복해, 지방이라도 풍수 이론에 합당한 지역이면 중심지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국토 공간사상이 퍼졌다. 그 주역이었던 풍수는 선종과 더불어 신라 말 정치적 혼란기에 지방 호족세력의 마음을 강력하게 끌었다.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선승들에서 비롯된 풍수와 불교의 만남은 도선(道詵, 827~898)이라는 역사적 인물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도선은 신라 왕조가 몰락하고 고려가 건국되는 태동기에 불교와 풍수라는 두 사상을 결합해 비보설이라는 새로운 사회사상을 창안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한 전환기의 지식인이었다. 도선의 국토 사상과 공간이론이 담긴 비보설은 절과 탑이라는 불교적 수단으로 풍수를 보완하는 방식이었다. 도선의 비보설은 사회 사상뿐만 아니라 고려조 500여 년에 걸쳐 사찰의 입지와 배치 원리로서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도선의 비보설은 한국의 문화사와 사상사에서 불교와 풍수가 결합한 불가지리설(佛家地理說)이라는 독특한 흐름으로 이어져, 고려 말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에 이어 조선 초기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에 계승된다.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에 있는 지공·나옹·무학 스님의 승탑. 
지공·나옹·무학 스님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불교계를 주도했던 삼대화상이다.

 

조선 억불숭유의 힘에 눌리다

한동안 지속했던 풍수와 불교의 굳센 결속은 고려 말에 이르러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제도권에서 급격히 와해해 두 사상은 분리되기에 이르렀고, 민간에서만 미약하게 유지됐다. 조선 중후기를 지나며 풍수와 불교는 사회 사상적 추진력이 약해져 지배문화의 지위를 상실한 채 민간에 스며들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국가가 당면한 대내외적 문제를 극복하는 데 사회적 역할을 해내지 못한 불교와 풍수는 쇠퇴기를 맞았다. 특히 조선조의 유교 이념과 억불정책은 풍수와 불교의 만남을 약화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조선왕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한 것도 개성을 중심으로 설치된 비보사찰들이 기반을 잃는 실제적 이유가 됐다. 조선 초기 태조 당시만 하더라도 도성에는 지천사(支天寺) 등의 비보사찰이 유지됐으나, 태종대에 와서 대부분 훼철됐다. 

조선 성종 대(1469~1494)인 12세기 말부터 15세기를 지나면서 비보설은 급속히 쇠퇴했다. 조선조 유신들의 도선 비보설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 비보설은 강력히 부정됐다. 이후 배불정책 기조와 유교 이념의 지배로 인해 비보설은 불교 신앙적 기능이 없어지고 풍수적 기능과 양식에 한정되는 형태로 전환됐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비보설을 근거로 제도권에서 미약하게 명맥을 이어오던 풍수와 불교의 교섭은 15세기 말에 이르러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불교가 민간으로 숨어 들어가, 사세를 유지·존속하기 위해 풍수를 방편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풍수와 불교의 만남은 음성적으로나마 진행됐다. 당시 묘지 풍수의 사회적 성행으로 민간에 풍수가 널리 확산・전파됐으며, 유명 스님의 이름을 빌린 여러 정감록 부류의 도참비결서와 풍수 설화 등도 만들어졌다.

구산선문 가운데 동리산파 중심 사찰 전남 곡성 태안사. 태안사가 위치한 ‘동리(桐裏)’란 오동나무가 우거진 숲속 깊은 곳이라는 뜻인데, 봉황이 좋아하는 오동나무 등의 지명으로 봉황이 날아가지 않도록 만든 땅에 개산했다는 의미도 있다. 
구산선문으로 대표되는 선종 사찰은 대부분 풍수 입지를 취했다. 구산선문 중 제일 먼저 개산한 가지산파 전남 장흥 보림사. 

 

불교와 풍수가 만들어낸 시너지

역사적으로 불교는 풍수가 공간적으로 확산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신라 하대에 선종의 유포를 주도한 사회적 주체인 선승들은 풍수가 호족세력과 지방사회에 확산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고려왕조에서는 풍수와 불교가 결합한 도선의 비보설로 설치된 전국의 비보사찰이 국토계획과 사원 운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풍수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려 왕실의 조정이 스님에게 풍수 관직을 맡겨 사찰 택지, 묘지 선정 등 풍수 관련 왕실 일을 담당케 하고 주요한 풍수를 자문했다는 사실도 불교가 풍수에 미친 제도적 영향력을 방증한다.

반면 풍수는 사찰의 터 잡기와 사회적 기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인 사찰의 터 잡기 방법을 역사적으로 개관하면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붓다의 자취가 출현하거나 불보살의 인연에 따른 장소 선택, 간자를 던져 길흉을 판단하는 점서적 택지법, 풍수지리 논리를 적용한 터 잡기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터 잡기 방법은 시기적으로 서로 겹쳐 시행되기도 했지만, 점차 선진적 입지론이었던 풍수적 사찰터 선정 방식이 우세하게 진행됐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832년 진표의 문도이자 팔공산 동화사를 중창한 심지(心地)는 간자를 던져 절터를 택지했다. 858년 사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梵日, 810~889)도 간자로 낙산사를 점정했다. 따라서 진표가 간자를 받았다는 740년을 시작으로, 심지와 범일이 간자로 택지했던 9세기 중반에 걸쳐 간자를 이용한 사찰 택지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풍수적 사찰 택지 방법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는 이와 동시대이거나 직후이다. 구산선문의 선승도 간자를 활용했다는 사실에서 방증 되듯, 신라 하대에는 간자와 풍수가 사찰의 입지선정 방법으로 혼용됐다고 볼 수 있다. 사찰 택지 방법이 간자에서 풍수로 전환되는 시기로 추정된다. 

풍수적으로 입지한 사찰 유형은 두 가지다. 명당에 위치한 명당사찰과 풍수적으로 결함 있는 터에 배치한 비보사찰이다. 기능적으로 대비하자면, 명당사찰은 풍수적 최적 입지에 터가 결정된 사찰로, 주로 수행에 충실할 목적으로 선택된 사찰이다. 비보사찰은 주로 고을의 풍수적 입지보완을 목적으로 풍수상 결함이 있는 곳에 배치된 사찰이다. 비보사찰은 주로 불교 신앙적 기능보다는 풍수비보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찰이다. 이 경우 사찰 고유의 종교적 기능과 비보사찰의 풍수적 기능을 복합적으로 지니게 된다.

한국 역사에서 풍수와 불교는 유난히 깊은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풍수설의 시조가 도선이라는 역사적 인식도 그렇고, 대다수 옛 사찰은 풍수적인 입지 경관을 보여준다. 자연 가치를 발견하는 풍수사상과 마음 가치를 깨닫는 불교사상이 만나 ‘자연과 마음의 만남 미학’을 창출했다.   

충남 보령 성주사지. 구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사는 백제 때 오합사라는 절로 지어져 신라 말 낭혜 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쇠락해 지금은 절터와 그 위에 남은 몇 가지의 유물들만이 이곳이 절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사진. 유동영

 

최원석
경상대 명산문화연구센터장이자 경남문화연구원 교수. 『사람의 지리 우리 풍수의 인문학』, 『산천독법』, 『도선국사 따라 걷는 우리 땅 풍수 기행』 등 다수의 풍수 도서를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