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아라다와 우드라카에게 완벽한 번뇌 소멸 지혜는 없었다

붓다가 되기 전 두 스승

2021-02-24     김미숙

번뇌 없는 해탈을 얻고자

누구나 동경하는 궁전에 살던 왕자였던 싯다르타는 왜 출가를 감행했던가? 그 이유와 목적을 『잡아함경』과 상응부 경전에 나오는 다음 일화를 통해서 거꾸로 추적해 볼 수 있다.

어느 날, 붓다가 마가다국 욱캇타 강변에 머물 때였다.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은 붓다는 묵연히 깊은 명상에 들었다. 그때 도나는 몹시 특이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도나는 머리를 갸웃하면서 중얼거렸다.

‘뭐지? 이런 발자국은 처음 보는데? 이건 인간의 발자국이 아냐.’

흙길에 죽 이어진 발자국마다 뚜렷이 각인된 바퀴살 문양을 도나는 난생 처음 보았다. 도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발자국이 끝나는 곳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뭐지? 이 사람이 발자국 주인인가? 천신인가? 건달바인가, 야차인가, 아니면 아수라인가, 그도 아니면 귀신인가? … 사람인가, 아닌가?’

도나가 물었다.

“저기요, 혹시 천신인가요?”

“으음, 난 신은 아니고….”

“그러면 건달바요?”

“아닌데, 건달바는.”

“그럼, 야차? 아니면 아수라인가요?”

“아니, 야차도 아수라도 아니오.”

“맞다, 그럼 우리 조상들의 신령, 귀신이죠?”

“아니, 아니요. 그런 거.”

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붓다가 대답했다.

“내가 번뇌를 못다 버렸다면 아마도 천신이나 건달바, 야차, 아수라, 귀신, 뭐라도 되었겠죠. 하지만 나는 모든 번뇌를 뿌리째 뽑아 없애 버렸어요. 이제 다시는 어떤 번뇌에도 휩쓸리지 않을 겁니다. 마치, 청련이나 홍련, 백련이 연못에서 자라나 꽃을 피우지만 한 방울의 물에도 젖지 않는 것과 같이. 나도 그런 연꽃처럼 이 세상 속에 살아 있지만 세상의 온갖 번뇌에는 추호도 물들지 않을 겁니다.” 

도나는 말문이 막혔다. 감탄과 경이로 충만한 도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을 뭐라고 부를까요?”

붓다는 미소 띠며 대답했다.

“나는 붓다, 붓다라고 부르세요.”

도나는 그제야 비로소 붓다 앞에 두 손을 모은 뒤에 공손히 절을 올렸다.

위에서 도나가 추정하며 열거한 “천신, 건달바, 야차, 아수라, 귀신, 사람” 등은 그 당시 신앙에 따른 윤회의 주체들이다. 붓다는 마치 스무고개 놀이를 하듯이 질문과 대답을 오가면서, 자신은 그러한 윤회의 주체와는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것은 반(反)윤회이자 단(斷)윤회의 주체로서 지혜로운 자, 붓다가 되었다는 명백한 자각의 표출이었다.

윤회의 대극점에 붓다가 있다. 번뇌의 대척점에 해탈이 있다. 요컨대 싯다르타의 출가 목적은 윤회를 벗어나고, 번뇌를 끊고, 완전히 해탈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한 순간, 그는 스스로 최상의 지혜를 성취했다고 자신했으며, 천상천하에 선언했다. 그렇게 붓다가 되었다. 필자는 위의 경전 구절에 싯다르타의 자기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고 본다. 싯다르타의 출가 목적은 번뇌를 소멸하고, 윤회를 벗어나서 해탈을 얻는 데 있었다. 그리고 6년의 고행기를 거친 뒤에 그 목적을 달성했다. 모든 번뇌의 소멸에 대한 싯다르타의 투철한 확신은 그 이후 전 생애를 통해서 확증되었다. 그의 확신은 입증되었고, 붓다 자신이 인류의 스승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싯다르타가 이처럼 위대한 붓다로 성장하는 데 조력했던 스승은 누구였을까? 싯다르타가 출가하여 궁극의 지혜를 성취하는 순간까지 타인에게 배운 지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싯다르타가 선택한 두 스승

출가를 감행한 싯다르타는 6년 동안 고행하는 시기를 거친다. 그것은 대체로 수많은 전기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서 반론이 없다. 그런데 그 6년 동안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가? 또는 싯다르타의 출가 이후 스승이라 할 만한 사람은 누구였는지, 어디서 수학했는지에 대해서는 주장이 갈린다. 후대에 전승된 문헌에 의거하면, 부파에 따라 전승하는 내용이 다르다 보니 단 하나의 정설로 규정할 내용은 없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그 시기 동안, 두 명의 스승 문하에 들어가서 제자의 인연을 맺었고 그들의 가르침에 따른 수학기를 가졌다는 데에는 다수가 인정하고 있다. 단편적이지만 그러한 사실에 대한 언급은 경전 문헌 곳곳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 두 명의 스승 중 한 사람은 바이샬리의 아라다 칼라마(Ārāḍa-kālāma)이고, 다른 이는 라자그리하의 우드라카 라마푸트라(Udraka-rāmaputra)였다. 이 두 사람의 팔리어 이름은 각각 알라라 칼라마(Āḷāra-kālā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rāmaputta)이다. 아라다 칼라마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는 붓다의 전기 문헌 중에서도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고 평가받는 아슈와고샤(Aśvaghoṣa)가 저술한 『붓다차리타(Buddhacarita)』의 제12장 「아라다의 진리 품(Ārāḍadarśanasarga)」에 등장한다. 이에 대한 한역본 『불소행찬(佛所行讚)』에서는 「아라다와 우드라카 품(阿羅藍欝頭藍品)」이라고 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음역하여 품의 이름으로 쓰고 있을 정도이다.

아슈와고샤는 『붓다차리타』에서, ‘아라다는 칼라마 성씨의 브라마나’라고 설명한다. 아라다와 우드라카가 고대 인도의 신분 제도의 체계상 제1 신분 출신자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불교 문헌 속에 숱하게 등장하는 붓다 당대의 범지(梵志), 즉 브라마나와 다를 바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범지는 브라마나에 해당하는 음역어이다.

요컨대 뿌리 깊은 신분제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서술이라고 본다. 아라다와 우드라카는 브라마나 출신이었다. 그들은 크샤트리야(왕과 무사 계급)도 바이쉬야(상인 계급)도 슈드라(육체 노동자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브라마나라는 신분만으로 곧 스승이라는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붓다 시대에도 그러하고 지금의 인도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한역 경전 문헌에서는 아라다와 우드라카, 이 두 사람의 이름 뒤에 선인(仙人), 또는 선(仙)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번역하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브라마나 출신이었던 그 두 사람은 선인, 즉 리쉬(ṛṣi)였다. 리쉬는 누구인가? 지식과 지혜를 중요시하였고, 그것을 전통적으로 전승해 오고 있던 인도의 역사 문화 속에서 존경하는 스승이라는 직분에 걸맞은 오래된 단어가 바로 리쉬가 아닐까? 리쉬는 싯다르타 당대에 지혜로운 스승들을 일컫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였다. 리쉬는 경장이나 율장을 가리지 않고, 초기 문헌에 고루 등장한다. 『불설장아함경』에서는 “대선인(大仙人) 넷이, 중생을 가엾이 여겨 이 세상으로 나왔으니, 구루손(拘樓孫), 나함(那含), 가섭(迦葉), 석가모니였다”라고 하듯이, 붓다에게도 선인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본질적인 의문의 해답을 얻고자, 출가하여 수행하던 싯다르타는 당대에 명망 높던 현자들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구했다. 『붓다차리타』에서는, 싯다르타가 아라다 대선(大仙)을 찾아간 이유를 밝히고 있다. 선설해탈도(善說解脫道), 즉 해탈의 길을 잘 가르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번뇌와 윤회를 떨치고 해탈의 길을 원했던 것이다. 그 길은 구예도(垢穢道), 즉 더러운 수행 방법의 반대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제4권에서도 똑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 당시 선인들이 모두 같은 수행법을 닦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싯다르타도 수행 방법과 목적이 다른 여러 선인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라다 선인을 찾아갔다. 싯다르타 스스로 자신의 스승을 선택한 것이다. 싯다르타가 선택한 두 스승은 흔히 ‘수정주의자(修定主義者)’로 분류한다. 그들이 닦았던 수행 방법은 선정을 통한 해탈이었다. 그것은 싯다르타가 출가 직후부터 두 스승을 만날 때까지 온갖 고행으로 해탈을 구했던 것과 분명히 달랐다. 후대의 경전에서 두 스승의 길은 해탈도로 묘사하고, 그 이전 고행기의 수행법을 구예도라고 대비시키고 있다. 

흔히 싯다르타의 출가부터 정각 직전까지를 ‘6년 고행기’라고 표현하지만, 이 시기는 구예도 대(對) 해탈도라고 크게 나눌 수 있다. 두 스승을 만난 시기는 구예도, 즉 고행 수행기를 벗어난 때 또는 고행을 포기한 시점이었다고 본다. 더 분명한 것은 아라다와 우드라카, 두 스승의 수행 방법은 고행법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다. 싯다르타는 두 스승의 문하에서 선정(禪定) 또는 요가를 통한 해탈도를 배우기 전에, 이미 그 당시 출가 수행자들이 행하던 온갖 고행법을 경험한 이후였을 것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 제4권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한쪽 발을 계속 들고 있다가 잠깐만 쉬거나, 몸 주위에 불을 피워 놓고 땡볕에서 견디는 방법 등이었다. 이러한 고행법은 그 당시는 물론 현대 인도에까지 고스란히 전승되어 오고 있을 만큼 일반적인 수행 방법들이다. 아라다는 자신의 수행 방법을 고행 대 범행(梵行)이라고 정리하였다. 구예도는 고행이고, 해탈도는 범행이라고. 범행이란 깨끗한 수행법을 뜻한다. 고행은 더럽고, 선정은 청정하다는 대비를 아라다는 매우 당연시하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 문하에서 전수하는 지혜와 이치와 수행의 극치에 간단히 도달하고 만다. 아라다는 싯다르타의 경지와 성취를 인정하고 함께 교단을 이끌어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스스로 의심하여 그 곁을 떠나기로 했다.

싯다르타는 아라다의 경지가 최상의 지혜도 최고의 정견(正見)도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라자그리하로 가서 우드라카를 만났다. 우드라카를 만난 싯다르타는 물었다.

“스승이 누구신가요?”

“난 따로 스승이 없고, 뭐든 배우고 싶다면 내가 아는 것을 다 가르쳐 주겠소.” 

우드라카 아래서 그의 지식과 지혜, 수행법을 모두 흡수한 싯다르타는 우드라카의 곁을 떠났다. 그의 경지도 싯다르타가 꿈꾸던 최상의 지혜가 아니었고 최고의 정견(正見)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스승이 전수한 것, 그 전후의 변화

싯다르타는 두 스승 문하에서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앎의 전후는 어떻게 달라졌던가? 싯다르타가 아라다 선인을 찾아서 바이샬리의 적정림(寂靜林)에 갔을 때, 아라다는 싯다르타를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심중의 것을 다 물어보라고 허락하였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곧장 물었다.

“어떻게 하면 생로병사의 고통을 면할 수 있나요?”

그것은 바로 싯다르타의 출가 동기이자 첫 번째 이유였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 번뇌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스승 아라다는 싯다르타의 의문을 완전히 해소해 주지 못했다. 아라다는 그 당시 상키야 학파의 지식을 전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수행 방법은 후대에 상키야 학파와 짝을 이룬 요가 학파 전통에 따른 수행법이었다.

두 번째 스승, 우드라카 또한 비상비비상정(非想非非想定)

이라는 수행법을 전수했으나, 싯다르타는 그 단계의 선정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비상비비상정에 들었을 때 마음이 고요한 평정 상태에 잠겨 있었으나, 지속성이 없었다. 싯다르타는 완벽한 번뇌의 소멸 상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싯다르타는 다시 홀로 길을 떠나 가야성(伽倻城) 근처 어느 나무 아래 고요히 앉아서 적정(寂定)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번뇌를 끊어내고 스스로 흡족한 지혜를 얻었다. 정각(正覺)의 순간이었다. 싯다르타는 한동안 고요히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스스로 선언했다. “무사독오(無師獨悟)! 나는 스승 없이 홀로 최상의 지혜를 성취했다”라고. 출가 수행자 싯다르타는 그렇게 붓다가 되었고, 구원(久遠)의 스승이 되었다. 자신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데 거침이 없었고, 한없이 자애로웠다. 지식을 전수하는 스승의 역할과 제자의 자세에 대한 붓다의 열변은 경전 곳곳에 거침없이 펼쳐져 있다.   

 

그림. 김진이

 

김미숙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조교수.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인도 불교사』, 『불교 문화』, 『인도 불교와 자이나교』, 
『자이나 수행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