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출가로 죽음 면한 청년들 진리의 법등을 잇다

거룩한 계보

2021-02-24     마성 스님

석가족의 기원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에 등장하는 세계 최초의 군주는 ‘마하삼마따(Mahāsammata, 위대한 선출자)’라는 왕이다. 『마하왕사(Mahāvaṃsa, 大史)』와 같은 연대기에 따르면, 신화적인 마하삼마따 왕이 사꺄무니 붓다(Sakyamuni Buddha)가 속한 사꺄(Sakya) 왕조의 창시자라고 한다. 이 왕조는 붓다 시대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즉 마하삼마따 왕의 후예들이 사꺄무니 붓다가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 수천 년 동안 인도의 여러 곳에서 통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족의 시조(始祖)는 마하삼마따 왕조를 계승한 옥까까(Okkāka, Sk. Īkṣvāku, 甘蔗王)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리야(ariya, Sk. ārya)족의 태양계 씨족 첫 번째 왕이었다고 한다. 옥까까 왕은 처음 밧따(Bhattā)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네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낳았다. 네 명의 아들은 옥까무카(Okkāmukha), 까라깐다(Karakaṇḍa), 핫띠니까(Hattinika), 시니뿌라(Sinipura)이고, 다섯 명의 딸은 삐야(Piyā), 숩삐야(Suppiyā), 아난다(Ānandā), 위지따(Vijitā), 위지따세나(Vijitasenā)이다.

첫 번째 왕비가 죽은 뒤, 옥까까 왕은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잔뚜(Jantu)라는 아들을 낳았다. 둘째 왕비의 요청으로 옥까까 왕은 그녀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장남 옥까무카는 동생들을 데리고 궁전을 떠나 북쪽 히말라야 산기슭의 까삘라(Kapila)라는 브라만(성직자 계급)이 살고 있던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까삘라 브라만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건설하고 왕국을 세웠다. 그들은 까삘라 브라만 소유의 대지 위에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에 ‘까삘라왓투(Kapilavatthu, 迦毘羅城)’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네 명의 왕자와 네 공주가 서로 결혼했다.

나중에 옥까까 왕은 왕자들이 도시를 건설하고 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왕자들은 참으로 ‘잘했다’,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은 왕자들이다”고 외쳤다. 그때부터 ‘잘했다’는 사꺄(Sakya) 혹은 삭까(Sakka)가 그들의 종족 이름이 되었다.

그때 옥까까 왕의 아들들은 같은 이름의 다른 도시를 건설했다. 나중에 데와다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옥까까 왕의 아들들이 까삘라왓투와 데와다하(Devadaha, 天臂城)를 건설했다. 따라서 까삘라왓투의 왕들은 까삘라왓투삭까(Kapilavatthusakka)로 불렸고, 데와다하의 왕들은 데와다하삭까(Devadahasakka) 혹은 꼴리야(Koliya)로 불렸다. 즉 까삘라왓투와 데와다하는 같은 석가족 형제들이 건설한 왕국이다. 이상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석가족의 기원이다.

붓다가 직접 자신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숫따니빠따(Suttanipāta, 經集)』에 나온다. 출가한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ttha, Sk. Gautama Siddhārtha, 喬答摩 悉達多)가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에서 탁발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탁발하는 모습을 높은 누각에서 바라보고 있던 빔비사라(Bimbisāra, 頻婆娑羅王) 왕이 그의 뛰어난 용모와 비범한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신하를 보내 그가 머물고 있던 처소를 알아낸다. 그런 다음 왕이 직접 그를 찾아가서 그의 출신 가문을 물었다. 그때 싯다르타는 빔비사라 왕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왕이시여, 저쪽 히말라야 중턱에 한 국가가 있습니다. 꼬살라국의 주민으로 재력과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Sn.422, ‘Ujuṃ janapado rāja, Himavantassa passato, dhanaviriyena sampanno, Kosalesu niketino.’).” 

“씨족은 ‘아딧짜(Ādiccā)’라 하고, 종족은 ‘사끼야(Sākiyā)’라 합니다. 그런 가문에서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고, 왕이시여, 나는 출가한 것입니다(Sn.423, ‘Ādiccā nāma gottena, Sākiyā nāma jātiyā, tamhā kulā pabbajito'mhi rāja, na kāme abhipatthayaṃ.’).”

싯다르타는 첫 번째 게송에서 “히말라야 중턱에 한 국가가 있다”고 했다. 이것은 석가국이 히말라야 중턱에 있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어서 “꼬살라국의 주민”이라고 했다. 이것은 석가족의 나라는 이미 당시 강대국이었던 꼬살라국에 예속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싯다르타는 자신의 가계, 즉 씨족은 ‘아딧짜(Ādiccā, 태양의 후예)’이며 가문, 즉 종족은 ‘사끼야(Sākiyā)’, 다시 말해 석가족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숫따니빠따』의 다른 곳에서는 ‘옥까까라자(Okkākarāja, 甘蔗王)의 후예’이고, ‘사꺄뿟따(Sakyaputta, 석가족의 아들)’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아딧짜반두(Ādiccabandhu, 日種族)’라는 표현도 나온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면, 붓다의 가계 혹은 씨족은 ‘아딧짜(Ādiccā)’, 즉 ‘태양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서구 학자들은 석가족이 아리야계의 태양씨족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 민족학적 연구에 의하면 석가족의 혈통은 비(非) 아리야계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현재도 히말라야 산간 지역에는 티베트・버마 인종의 여러 부족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의 가계

옥까까 왕의 후예들이 자야세나(Jayasena) 왕의 치세 시까지 까삘라왓투를 다스렸다. 자야세나 왕(왕비 이름은 나타나지 않음)은 시하하누(Sīhahanu)라는 아들과 야소다라(Yasodharā)라는 딸을 두었다. 자야세나 왕의 사후에 시하하누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데와다하의 안자나(Añjana) 왕의 여동생 깟짜나(Kaccānā)와 결혼했다. 따라서 싯다르타의 할아버지는 시하하누(Sīhahanu, 師子頰王)이고, 할머니는 깟짜나(Kaccānā)이다.

남전(南傳, 팔리어로 전승된 문헌)에 따르면, 시하하누와 깟짜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오남이녀(五男二女)로 되어 있다. 다섯 명의 아들은 숫도다나(Suddhodana), 도또다나(Dhotodana), 삭코다나(Sakkhodana), 숙까다나(Sukkadana), 아미또다나(Amitodana)이고 두 명의 딸은 아미따(Amitā), 빠미따(Pamitā)이다.

그러나 북전(北傳, 산스크리트로 전승된 문헌)의 『기세경(起世經)』 제10권에는 사자협왕(師子頰王)의 자녀는 사남일녀(四男一女)로 되어 있다. 네 명의 아들은 정반(淨飯), 백반(白飯), 곡반(斛飯), 감로반(甘露飯)이고, 한 명의 딸은 감로(甘露)이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사자협왕의 네 아들 중에서 첫째는 열두단왕(閱頭檀王, 淨飯), 둘째는 수구로단나(輸拘盧檀那, 白飯), 셋째는 도로단나(途盧檀那, 斛飯), 넷째는 아미도단나(阿彌都檀那, 甘露飯)이다. 한 명의 딸은 감로미(甘露味)이다. 여기서 첫째 아들에게만 ‘단왕(檀王)’이라 했고, 나머지 세 명은 ‘단나(檀那)’라고 음사(音寫, 소리로 옮김)했다. 사자협왕의 왕위를 계승한 자가 바로 첫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불본행집경』의 음사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하면,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 숙까다나(Sukkadana, 白飯), 도또다나(Dhotodana, 斛飯), 아미또다나(Amitodana, 甘露飯) 순이다. 그리고 딸은 아미따(Amitā, 甘露)이다. 『불본행집경』의 수구로단나(輸拘盧檀那)는 산스크리트 슈끄라(śukra, Pāli sukka)를 음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 한역에서는 한결같이 사자협왕의 자녀가 모두 사남일녀로 나타난다. 이처럼 남전과 북전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어느 쪽 기록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한편 자야세나 왕의 딸인 야소다라는 데와다하의 안자나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아들은 숩빠붓다(Suppabuddha)와 단다빠니(Daṇḍapāni)이고, 딸은 마야(Māyā)와 빠자빠띠 고따미(Pajāpatī Gotamī)이다.

시하하누(사자협왕)의 왕위를 계승한 자가 바로 싯다르타의 아버지 숫도다나이다. 그는 데와다하의 꼴리야 출신인 마야와 빠자빠띠 고따미와 결혼했다. 첫 번째 왕비 마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타마 싯다르타(싯다르타의 성 ‘고타마’는 소를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 왕비 빠자빠띠 고따미는 아들 난다(Nanda, 難陀)와 딸 순다리 난다(Sundarī Nandā)를 낳았다. 마야와 빠짜빠띠 고따미는 자매다. 나중에는 이들의 이름 앞에 ‘마하(Mahā)’를 붙여 불렀다.

한편 시하하누의 딸 아미따는 숩빠붓다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데와닷따(Devadatta, 제바달다)와 밧다깟짜나(Bhaddakaccānā, 야소다라)이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아내 밧다깟짜나는 숩빠붓다와 아미따의 딸이다. 따라서 싯다르타와 밧다깟짜나는 이종사촌 간이다. 싯다르타와 밧다깟짜나(야소다라)는 아들 라훌라(Rāhula, 羅睺羅)를 낳았고, 싯다르타는 라훌라가 태어난지 얼마 후 출가했다.

『기세경』에 의하면, 백반(숙까다나)의 두 아들은 제사(帝沙)와 난제가(難提迦)이다. 곡반(도또다나)의 두 아들은 아니루타(阿泥婁駝)와 난제리가(難提梨迦)이다. 감로반(아미또다나)의 두 아들은 아난다(阿難陀)와 제바달다(提婆達多)이다. 딸 감로의 외아들은 세파라(世婆羅)이다.

그러나 팔리어로 전승된 문헌에 따르면, 아미또다나는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男)와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의 아버지이다. 다른 곳에서는 아난다(Ānanda, 阿難)도 아미또다나의 아들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 자료에서는 데와닷따의 아버지라고 한다. 아미또다나의 또 다른 아들 빤두(Paṇḍu)는 위두다바(Viḍūḍabha)에 의해 석가족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석가국을 떠나 갠지스강 너머에 정착했다고 한다. 싯다르타의 사촌, 즉 숙부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각기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팔리어로 전승된 문헌에서는 숫도다나와 아미또다나를 제외한 도또다나, 삭코다나, 숙까다나는 자식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믿기 어렵다. 스리랑카의 연대기에는 아난다, 아누룻다, 데와닷따, 마하나마가 모두 아미또다나의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하와스뚜(Mahāvastu, 大事)』에서는 아난다가 슈끄로다나(Śuklodana, Pāli Sukkadana)의 아들이며, 데와닷따와 우빠다나(Upadhāna)의 형이라고 한다. 이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즉 아난다와 데와닷따는 숙까다나(백반)의 아들이다. 이처럼 아난다와 데와닷따는 형제지간이다. 그런데 아난다는 붓다의 최측근에서 25년간 붓다를 시봉했다. 반면 데와닷따는 붓다에게 반기를 들고 승가를 분열시킨 최악의 제자가 되었다. 

싯다르타는 성도 후 붓다로서 고향인 까삘라왓투를 몇 차례 방문했다. 첫 고향 방문 때,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배다른 동생 난다를 제일 먼저 출가시켰다. 이어서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다. 그 이후 사촌 동생인 아난다, 아누룻다, 데와닷따를 비롯해 밧디야(Bhaddiya), 바구(Bhagu), 낌빌라(Kimbila) 등 석가족의 청년들을 출가시켰다. 이때 석가족의 이발사였던 우빨리(Upāli)도 함께 출가했다.

밧디야는 석가족의 귀부인 깔리고다(Kāḷigodhā)의 아들이다. 그는 숫도다나 왕의 왕위를 계승한 자였기 때문에 가장 높은 신분의 출가자였다. 바구와 낌빌라도 석가족 귀족의 자제들이다. 싯다르타의 사촌 중에서 출가하지 못한 자는 마하나마뿐이다. 그는 동생 아누룻다를 출가시키고 혼자 까삘라왓투에 남아 석가족을 보살폈다. 그는 비록 출가하지는 못했지만, 재가신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면서 승가의 외호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석가족은 자신들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형제 혹은 사촌 간에 결혼했다. 이러한 석가족의 전통은 와르나상까라(varṇasaṅkara), 즉 혈통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석가족은 이 혈통을 보존하려다 꼬살라국의 위두다바(Viḍūḍabha) 왕에게 몰살당했다. 사연은 이렇다. 꼬살라국의 빠세나디(Pasenadi) 왕은 석가족과 혼인 동맹을 맺기 위해 석가족 공주를 보내달라고 했으나, 석가족은 하인의 딸 와사바(Vāsabha)를 보냈다. 빠세나디 왕과 와사바 사이에서 태어난 위두다바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가 왕위에 오르자 자신이 당한 모욕감에 대한 보복으로 석가족을 몰살시켰다.

이렇게 해서 세속적인 석가족의 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위두다바에게 석가족이 멸망하기 전 다수의 석가족 청년들이 출가해 승가에 합류함으로써 죽음을 면했다. 그들은 비록 세속의 석가족 가계를 잇지는 못했지만, 붓다의 제자로서 진리의 법등을 이어나갔다. 석가족 출신 스님들이 불교 승단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림. 윤진이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동방문화대학원대학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