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 어떻게 잘 살 것인가

큰스님 왜 보궁에 가셨나요

2021-02-24     지미령
태백산 정암사.

 

네 손가락 연비한 일타 스님

‘부처님, 사문 일타는 세 가지의 원력을 세워 연비하려 합니다. 옳은 중노릇을 하기 위해 연비하려 합니다. 법을 따르는 결정심을 갖고자 연비하려 합니다. 
속세 업장을 없애기 위해 연비하려 합니다.’ 
 —  정찬주 소설 『인연』 중에서

연비는 스스로 불에 살을 태우고 뼈를 태워 적멸의 상태에 들어가고 거기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장엄한 구도의식(求道儀式)이다. 동곡당(東谷堂) 일타 스님(1929~1999)이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오른손, 네 손가락을 연비한 일화는, 스님의 속가 일가친척 40여 명이 모두 출가한 이야기와 함께 잘 알려졌다.

스님은 통도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에 가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던 1954년 어느 봄날, 『능엄경』에서 ‘삼매를 닦고자 하여 여래의 형상 앞에서 소신(燒身), 연비(燃臂), 연지(燃指)를 한다면 이 사람은 옛 빚을 일시에 갚아 끝내는 사람이라 하리라’는 부분을 접했다. 스님은 대학에 가겠다는 마음 또한 속세에 대한 미련임을 깨달아 바로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으로 향했다. 적멸보궁에서 7일 동안 매일 삼천배 기도를 올린 후, 자신의 손에 촛농을 떨어뜨려 연비했다. 이로써 스님은 모든 미련을 깨끗이 씻어내고, 수행에 전력하는, 중노릇만 하는 대전기(大轉機)를 마련했다고 한다.

세수 26세의 나이에 오대산 적멸보궁을 향했던 그 마음, 살아있는 관음보살이라 불리면서도 스님 자신에게는 항상 냉철했던 그 마음은 감히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다만, 중국 선종의 2대 조사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에게 법을 구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는 ‘혜가단비’와, 업장을 소멸하고 수행에 진력하고자 자신의 오른손, 네 손가락 열두 마디를 연비한 ‘일타연비’는 시공간을 초월해 일맥상통할 것이다. 스님이 대관령꼭대기에서 흘러가는 구름 한 점을 보고는 인생의 무상함과 연비 공양의 마음을 가다듬으며 부른 게송이 생각난다.

“이 몸뚱이는 뜬구름과 같아 어디선가 왔다가 어디론가 가 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 이럴 때 깊은 연(緣)을 심어놓아야 허생명사(虛生命死)를 면할 수 있으리라.”

 

법거량 주고받은 오대산 적멸보궁

일타 스님이 연비했던 오대산 적멸보궁은 선사들이 법거량(法擧量)을 주고받을 때도 등장한다. 한암 스님은 세수 50이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직을 그만두면서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고 일갈하며 오대산에 들어갔다. 스님은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나 단풍나무가 되었다. 한암 스님과 적멸보궁의 일화는 일본 조동종 사토 스님과의 선문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토 스님은 한암 스님에게 “스님은 대장경과 조사어록을 보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한암 스님은 “적멸보궁에 참배나 갔다 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토 스님은 3일간 머무르면서 한암 스님과 몇 번의 문답을 주고받은 후, “한암 스님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다”라고 하며 떠났다.

한암 스님과 만공 스님과의 법거량도 있다. 1943년 여름 만공 스님이 적멸보궁을 참배하기 위해 오대산을 방문했다. 만공 스님이 일주일간 기도를 마치고 돌아갈 때 한암 스님은 동피골 외나무다리까지 배웅을 나왔다. 만공 스님이 “한암 스님!”이라고 부른 뒤 작은 돌 하나를 집어 던졌다. 그 돌을 주워든 한암 스님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개울로 던졌다. 두 큰스님의 법거량을 일개 범부인 우리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단지 경허 스님 법맥을 이어 덕숭산과 오대산에서 회상을 이룬 두 스님의 만남과 일화를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후학들에게는 즐거울 뿐이다.

이밖에 “죽은 뒤 시줏집 소가 되겠다”고 말한 운봉(雲峰) 스님 역시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서 100일 기도를 한 인연이 있다. 스님은 혜월(慧月)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 등 명산 고찰을 찾아다니며 당대의 선지식인들을 친견하고 고행 정진했다.

 

통도사 사리 지킨 사명 대사

적멸보궁 중 불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곳은 통도사 금강계단일 것이다. 통도사는 646년(선덕여왕 15년) 자장 율사가 불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했다.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은 스님이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금강계단에 모신 부처님의 사리를 탈취하는 화를 당했다. 이에 사명 대사는 진신사리를 2과로 나눠 스승 휴정이 있는 묘향산에 보냈다. 휴정이 묘향산 역시 안전하지 못하므로 통도사 금강계단을 잘 수호하여 모시라고 되돌려 보내자, 대사는 1과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다른 1과는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모셨다. 이 갈반지가 정암사 적멸보궁이다.

사명 대사와 진신사리 관련한 또 다른 일화는, 스님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잡혀간 포로 송환을 위해 강화사로 일본에 건너갔을 때 일이다. 건봉사석가치상립탑비(乾鳳寺釋迦齒相立塔碑)에 의하면, 스님은 왜군이 탈취해 간 통도사의 사리를 되찾아 와서 건봉사와 용연사 석조계단에 나눠 봉안했다고 한다.

정암사(淨岩寺)는 645년(선덕여왕 14년), 자장 율사가 태백산 서쪽 기슭에 정암사를 창건할 당시,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고 해서 정암사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정암사 적멸보궁의 창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임진왜란 당시 사명 대사가 통도사의 진신사리 1과를 나눠 이곳에 봉안했다. 정암사 적멸보궁은 1771년(영조 47년)에 중창하고 수마노탑을 보수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정암사 적멸보궁에도 한국 근현대사의 큰스님들이 거쳐 갔다. 일제강점기에 효봉 스님은 정암사에 3년 이상 머물며 수행 정진했고, 해방 후에는 지월 스님, 서옹 스님 등이 이곳에서 수행했다. 효봉 스님은 평양 복심 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살인 사건을 저지른 한 피고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그 뒤 다른 진범이 나타나게 되었다. 스님은 자신의 오판에 대한 깊은 고뇌와 양심의 질책에 못 이겨 몇 년 동안 방방곡곡 방랑 생활을 한 끝에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출가 후 금강산,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 등에 안거하면서 오후불식과 장좌불와를 지속했다.

태백산 정암사. 

 

‘Why’와 ‘Well’ 사이 ‘How’

효봉 스님은 항시 제자들에게 “진실하라, 후회하지 말라, 법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가르쳤다. 불교정화운동 때는 “일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는 어르신들은 모든 일에 합리적이어야 한다. 질 좋은 토양에 좋은 씨를 뿌려 결실을 보기까지 알맞게 퇴비도 주고 지속해서 관찰해야 한다. 아무리 나쁜 상황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여기서 일을 집행하는 이는 사회 지도층일 수도, 기성세대일 수도, 한 집안의 어른일 수도 있다. 결실을 보기 위해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한 대상은 사회생활에서의 후배일 수도 있고, 자라나는 청소년일 수도 있다. 현재 전 세계적인 팬데믹 현상 속에서 많은 이들이 공포에 빠져 있다. 스님 말씀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나와 우리 서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님 말씀에서 시대를 초월해 각 시대를 대변하는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말이 주는 무게감이 참으로 크다.

부처님의 정골을 모신 적멸보궁은 불교사적으로 의미 있을 뿐만 아니라 근현대 큰스님들이 거쳐 가며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스님들의 서원과 기도 내용이 속세에서는 다를 수 있지만, 부처님의 세상 안에서는 일맥상통할 것이다. 현대의 대중 역시 가족, 친구, 학업, 경제, 연인 등 수만 개의 각기 다른 원력을 가지고 적멸보궁을 찾지만, 이는 결국 ‘잘~’, ‘좋은~’, ‘행복한~’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는 ‘Why(왜)’의 문제로 시작해서 ‘Good(좋은)’, ‘Well(잘)’을 지향하지만, 큰스님들은 수행에서 ‘Why’와 ‘Good’, ‘Well’ 사이에 ‘How(어떻게)’의 문제를 생각했다. ‘어떻게 좋아질 것인가’, ‘어떻게 잘 살 것인가’의 화두를 적멸보궁에서 풀고자 했던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지미령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천대학교, 동국대학교 등에 출강했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