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 Don't tell'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강의를 많이 하다보니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 | Show! Don't tell(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2021-02-02     백승권

글쓰기 강사의 보증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력을 먼저 소개한다. 주최 측이 하기도 하지만 강사 스스로 하기도 한다. 강사 생활 초기엔 주로 주최 측 소개에 의지했다. 자화자찬이기 마련인 프로필을 본인 입으로 얘기하는 건 왠지 쑥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숫기가 참 없었다. 

2, 3년 경력이 쌓이자 소개는 스스로 하겠노라고 자청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보낸 프로필을 교육 담당자가 진땀을 빼며 떠듬떠듬 읽어내려가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기가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희한한 일은 담당자들이 적혀 있는 글을 그대로 읽는데도 꼭 한두 개씩 틀리게 발음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란 사실이다. 강사 이름을 ‘박승권’이라고 개명하거나, 회사 이름을 ‘실용글쓰기연구소’라고 작명하거나, 동양미래대학을 ‘동양대학’이라고 바꿔 부르거나.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내용이라 필자가 나서서 굳이 그걸 정정하진 않았다.

본격 강의에 들어가기 전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는 것이 제일 힘들고 어색했다. 마땅한 오프닝 멘트가 떠오르지 않아 당황할 때가 많았다. 오프닝 멘트로 프로필을 얘기하자 그런 고민이 싹 사라졌다. 특별한 경우를 빼고 소개는 스스로 하는 일이 돼버렸다. 결과적으로 교육 담당자의 곤란한 처지를 벗어나게 해준 꼴이 돼, 그가 고마운 마음마저 갖게 만드는 망외(望外)의 소득까지 덤으로 따라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기자 생활을 하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서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지냈습니다. 대통령 메시지, 대통령 보고서를 작성하고 외부에 발표되는 각종 정부 문서를 리라이팅(Rewriting)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후반부엔 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 여덟 권과 참여정부 다큐멘터리 5부작 제작을 총괄했습니다. 청와대를 나온 이후 2010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직장인을 위한 업무용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대기업, 중앙부처, 지자체, 공공기관 직원을 대상으로 한 해 평균 200여 차례, 800시간 이상 강연하고 미국 순회강연도 세 차례 진행한 바 있습니다.”

2~3분 이어지는 강사 소개엔 나름의 전략적 계산이 들어가 있다. 강사 생활 경험이 쌓이면서 알게 된 중요한 사실 하나. 수강자들은 듣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듣는다는 점이다. 강의내용을 꼼꼼히 듣고 이 강의가 들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단 믿을 만한 강사인가 아닌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글쓰기 명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메시지보다 메신저다.” 수강자들에게 메신저로서 신뢰를 주지 못하면 메시지가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수용되지 않거나 겉돌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글쓰기 강사로서 청와대 경력은 정성적 능력과 경험을, 강의 대상과 횟수는 정량적 능력과 경험을 보증한다. 수강자들의 눈동자에 살짝 겉돌지도 모를 의심의 기운을 빠른 시간 안에 걷어버리는데 이 프로필만큼 효과적인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 물론 강의 초반에 수강자들에게 킬러 콘텐츠, 즉 ‘한칼’을 보여주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짧게는 한두 시간, 길게는 4박 5일 이어지는 강의는 이 보증을 보드(Board) 삼아 고저와 완급의 파도를 서핑(Surfing)한다. 강의를 마치고 수강자들의 눈빛을 보면 필자의 서핑보드가 여전히 쓸 만한 것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초전법륜, 붓다의 보증

정각을 이룬 싯다르타, 즉 붓다는 고민에 빠진다. ‘내가 만난 깨달음을 누구에게 전할 수 있을까?’ 붓다는 그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린다. 정신의 해탈만이 아니라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무여열반(無餘涅槃)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이때 범천이 나타나 붓다에게 고통에 빠진 중생을 위해 깨달음을 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한다. 

“세존께서 법을 설하지 않으시면 탐욕의 강물에 떠밀리고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 이 세상은 결국 파멸로 치닫고 말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에는 그래도 때가 덜 묻은 이들이 있습니다. 여래시여, 이 세상에는 그래도 선과 진리 앞에 진실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마소서. 그들마저 기회를 놓치는 건 참으로 슬프고 애석한 일입니다.”(『부처님의 생애』)

붓다는 범천의 끈질긴 청법(請法)을 받아들여 마침내 전법의 길에 나선다. 그러나 전법의 길에 나서겠다고 결심한 붓다를 위해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깨달음을 보증해줄 사람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었다. 혼자서 깨달음을 전해줄 사람을 찾아야 했고 혼자서 깨달음의 가치를 그에게 이해시켜야 했다. 전법의 대상에게 보여줄 수행의 프로필이나 깨달음의 포트폴리오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붓다는 이런 악조건을 돌파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첫 번째 전법의 대상을 누구로 할 것인가. 그가 바로 깨달음의 보증인이 돼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붓다는 출가 초기에 만났던 스승들을 선택한다. 그들이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엔 한계가 분명했지만, 그들이라면 자신이 깨달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믿은 것이다. 알라라 깔라마, 웃다까 라마뿟따를 차례로 찾아갔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차선책으로 마지막까지 자신과 고행을 함께 했던 사슴동산 와라나시의 다섯 비구를 선택했다. 목숨을 건 수행의 길을 같이 걸었던 도반들이라면 편견과 장애 없이 이 깨달음을 받아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것이다. 붓다는 정각을 이룬 부다가야에서 출발해 두 스승의 수행지를 거쳐 사슴동산까지 무려 320km가 넘는 거리를 맨발로 걸어갔다. 하루를 꼬박 걷는다 해도 열흘이 넘게 걸리는 여정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사슴동산에 도착했지만 다섯 비구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안락을 취하려고 신성한 고행을 저버린 변절자를 반갑게 맞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붓다는 이 냉담자들의 불신을 어떻게 불식시키고 깨달음의 가르침을 수용하게 했을까? 이 대목에서 경전은 엄청난 비약을 보여준다. 

“맑고 환한 얼굴빛과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금빛 광채에 다섯 수행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이 다가오자 그들은 불붙은 조롱 속에 갇힌 새처럼 안절부절못하였다. 다섯 수행자는 각각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발우를 받아 들고, 앉을 자리를 준비하고, 발 씻을 물을 가져오며 반갑게 맞이하였다.”(같은 책) 

다섯 비구는 “마을로 나가 공양이나 받는 등 타락하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차례 던지기도 했지만 이내 붓다에게 마음을 복종하고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하고 만다. 그리고 닷새 만에 깨달음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아라한의 경지에 다다른다.

 

공감과 동의 얻는 ‘보여주는 말글’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Show! Don`t tell’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다. 헤밍웨이는 글을 쓰거나 말할 때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고 충고한다. 우리가 부리는 말과 글은 ‘보여주는 말글(Showing)’과 ‘설명하는 말글(Telling)’로 나뉜다. 청자, 독자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주면 ‘보여주는 말글’이고 머리를 굴리게 하면 ‘설명하는 말글’이다. 머리를 굴리는 행위를 ‘인지적 노력’이라고 하는데 그 유무가 두 영역을 가른다. 글솜씨가 없는 사람의 글은 설명하는 것이 되기에 십상이다. 필자는 아름답다고 썼지만 독자는 무엇이 아름다운지 체감할 수 없다. 필자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적었지만 독자는 그 노력이 무엇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글솜씨라고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글의 내용이 필자의 삶에 착 달라붙어 체화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반대로 보여주는 말글엔 구체성과 개별성의 징표들이 포함된다. 고유명사와 숫자가 등장하고 육하원칙과 오감(색성향미촉)의 정보가 들어 있다. 필자가 실제로 겪었거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사실의 장면 장면을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주려 하기 때문이다. 말과 글을 나누는 순간 필자와 독자, 화자와 청자는 이 경험과 체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설명하는 말글은 ‘이해’라는 소극적 수준의 반응밖에 끌어낼 수 없다. 보여주는 말글을 써야 비로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감과 동의’라는 적극적 수준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아마도 붓다는 다섯 비구를 만나 깨달음의 가르침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었을 것이다. 다섯 비구 앞에 나타난 붓다의 존재 자체가 이미 ‘Showing’이었을 것이다. 

프로필을 앞세워 강의에 대한 보증을 얻어내는 필자는 과연 무엇을 한 것일까? 우리는, 한국불교는 지금 ‘Showing’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Telling’을 하고 있을까?    

 

 

글. 백승권
글쓰기 컨설팅 전문업체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로 업무용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