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국제갤러리 제니 홀저(Jenny Holzer) 개인전 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전시 리뷰

2021-02-02     마인드디자인(김해다)
제니 홀저 | Selection from Truisms: The most profound... (detail) | 2015
Sodalite Blue footstool, 43.2×63.5×40.6cm, Text: Truisms, 1977–79
© 2015 Jenny Holzer, ARS
사진: Joshua White/JW Pictures

우리는 문자를 ‘읽는다’. 읽는 작용으로 내 안에 들어온 문자들은 이미지가 되기도 하고, 냄새나 촉감이 되기도 한다. ‘두근두근’ 네 글자는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고향’ 두 글자는 따뜻한 방구들에 배를 깔고 누워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어 나타난다. 글을 읽을 줄 안다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참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납작한 종이 위 글자들이 소환해내는 감각들은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니 말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로 전하려 했던 입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문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밟고 건너갈 수 있는 세계의 자유자재, 스스로 우뚝설 수 없는 평평한 글자들 너머에 있는 법(法) 혹은 도(道)와 같은 것. 제니 홀저도 말한다. 가장 뜻깊은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THE MOST PROFOUND THINGS ARE INEXPRESSIBLE), 그러니 말로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을 눈여겨보자고.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흐르는 문자, 혼란 속의 정직

언어는 줄곧 작가 제니 홀저의 재료였다. 70년대에는 <진부한 문구들(TRUISMS)> 포스터 작품을 밤새도록 맨해튼 거리에 붙이고 다녔고, 80년대에는 ‘권력의 남용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ABUSE OF POWER COMES AS NO SURPRISE)’, ‘내 욕망으로부터 나를 지켜줘(PROTECT ME FROM WHAT I WANT)’ 등의 문구를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선보이며 도시 전광판을 미술의 장소로 둔갑시켰다. 거대한 빌딩이나 자연환경에 프로젝터 빛으로 메시지를 투사했던 <프로젝션(PROJECTION)> 프로젝트를 비롯해 문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티셔츠가 되었든 자동차가 되었든 가리지 않았던 작가. 이제 그는 대표적인 셀레브리티 미술가가 되었다. (40여 년 전, 그가 맨해튼 곳곳에 붙였던 포스터의 가격은 1,000배 이상 올랐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치 않은 한 가지는 바로 언어와 그것을 전달하는 매개(Medium)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다. 국제갤러리 K3관에 전시된 네 점의 LED 작품에서 텍스트는 흐르고, 멈추고, 반짝이며, 춤을 춘다. 텍스트의 의미도 함께 흐르고, 멈추고, 반짝이며, 춤을 춘다. 말끔하게 정리된 감각들을 실어 나르기만 하던 문자는 절대 정리할 수 없는 감각들을, 흘러넘치는 그 혼란함의 무게를,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LED 작품에 흐르던 선언 ‘자기 혼란은 정직함을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처럼. 상충하는 문장들을 나란히 설치해 신념의 자명함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곤 했던 그의 이전 작업과도 일맥상통한다. ‘어떤 경우에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유익한 일이다’와 같이, 각각 놓고 보면 다 맞는 말 같지만 나란히 놓고 보면 완전히 대립하는 문구들은 서로 충돌하며 언어가 무력해진 자리를 창조해 내곤 했었다. 언어가 ‘언어’ 이기를 멈춘 자리에서 정직함이 피어오르기를 기대하며.

제니 홀저 | STATEMENT – redacted (detail) | 2015
LED sign with blue, green, and red diodes © 2015 Jenny Holzer, ARS
사진: Collin LaFleche
제니 홀저 | Survival | 1989
LED sign with red diodes 13×138.6×7.6cm
© 1989 Jenny Holzer, ARS

“나는 언어가 시연되는 방식을 구상하기를 좋아한다.
언어를 공간적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언어에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 다양한 결과를 도출하기를 좋아한다.”
-제니 홀저

 

감추면 보이는 것들

소개한 작업들이 텍스트를 색다른 방식으로 가시화시키는 전략을 취했다면, K2관에 전시된 일련의 작업들은 텍스트를 감춤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한다. <검열 회화(Redaction Painting)> 연작은 미국 정보 공개법에 따라 공개된 정부의 기밀문서를 확대한 뒤 색을 입히고, 검열된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일부 문구 혹은 전체를 지워내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러시아 정부가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는 의혹에 대한 FBI 수사 결과를 담은 ‘뮬러(Muller)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작한 수채화 작업들도 있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채 남겨져 있거나 수채화 물감이 흐른 자국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글자들을 독해하고자 애쓴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내용 없음’이다. 정부 문서가 공개되는 과정에서 정보들은 이미 검열되고, 삭제되고,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이 은폐된 정보들을 더욱더 은폐시킨 화면들에서 우리는 오히려 세상을 좀 더 생생하게 볼 것을 요청받는다. 우리의 지적 세계에 포획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의 앎이 사실은 얼마나 제한적인지에 대하여. 

 

생생하게 공상하기

전시를 모두 보고 나서, 전시 제목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생생한 공상(an active fantasy)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이야말로 생생한 공상이니, 삶 자체가 중하다는 말일까. 한낮 신기루일지라도 신명나게 꽃은 한번 피워보자는 말일까. 언어를 재료 삼아 언어 이상을 명상하게 하는 제니 홀저의 연금술에 필자의 공상이 더 생생해지는 기분이다.   

제니 홀저 | hacking and/or Assange | 2020
Graphite and watercolor on paper 90.8×69.2cm
© 2020 Jenny Holzer, ARS
사진: Filip Wolak
제니 홀저 | False and Misleading Statements | 2020
Caplain gold, moon gold, and palladium leaf and oil on linen 147.3×111.8×3.8cm
© 2020 Jenny Holzer, ARS
사진: Jonathan Verney

 

 

 이달의 볼 만한 전시

 

홍이현숙: 휭, 추-푸
아르코미술관 | 서울
2020.12.17~2021.02.21 | 02)760-4850
www.arko.or.kr/artcenter

홍이현숙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와의 새로운 연대와 공생의 장소를 상상한다. 바람에 무언가 날리는 소리인 ‘휭’과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인 ‘추푸’라는 의성어·의태어를 사용한 전시 제목은, 인간에게만 한정된 언어 대신 소리를 써 ‘인간/비인간’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았다.

 

서용선×갤러리 JJ: 생각 중
프로젝트집 | 양평
2020.05.20~2021.02.20 | 02)322-3979
www.galleryjj.org

양평군 서종면 북한강로648번길 4, 비어있는 한 농가에서 서용선 작가와 갤러리 JJ가 ‘한시적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펼친다. 철거 직전의 농가라는 공간적 특성, 작가의 글쓰기 작업과 이미지의 번안, 일상 공간에 개입하는 예술이 교차하며 자아내는 흥미진진한 프로젝트.

 

세대공감: 최달용의 서울살이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시실 | 서울
2020.12.08~2021.03.28 | 02)3399-2900
https://museum.seoul.go.kr/sulm/index.do
20세기 후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한강의 기적’을 이뤘던 해방둥이들의 삶. 평생 자신의 삶을 치밀하게 기록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최달용의 인생 궤적을 함께 따라가며, 1950~1970년대 서울살이를 생생하게 체험해볼 기회.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전시장이 휴관했거나 예약제로 운영 중일 수 있습니다. 방문 전 꼭 확인하세요.)

 

글. 마인드디자인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붓다아트페스티벌을 9년째 기획·운영 중이다. 명상플랫폼 ‘마인드그라운드’를 비롯해 전통사찰브랜딩, 디자인·상품개발, 전통미술공예품 유통플랫폼 등 다양한 통로로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문화콘텐츠 발굴 및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