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그리워도

빛의 샘, 한가위

2007-09-16     관리자

"제대 하고 자기 여물값이나 벌겠다고 서울에 올라왔을 때였습니다. 성깔이 못되어서 다니던 잡지사를 그만두고는 번역을 한답시고 노량진 본동 산꼭대기 127번지에서 밤낮을 거꾸로 살 고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집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판자집답게 오글오글 모여 살아서 각 집의 숟가락 숫자뿐만 아니라 밤낮으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정도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밤낮을 바꿔 살았으니 낮일은 몰라도 집안의 밤일엔 알 만큼 알아서 특히 각방에서 거의 밤마다 죽일 듯 이 일어나는 쌈질에 아주 질려 있었습니다.
말이 번역이지 따지고 보면 세계문학에 다시 개칠을 하는 것이어서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지 만 급한 김에 덥석 선금을 받아 먹었으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
지겨워서 몸을 비비 꼬고 앉아서 일을 하니 씨억씨억 진행되겠습니까? 추석은 다가오는데 일은 끝내지 못했고, 출판사 사장은 뒷간에 앉아서 보면 63빌딩이 내려다보이는 산동네까지 연락부절로 올라오지요, 올라와서는 추석 전까지 책을 책방에 낼 작정이었는데 번역도 안 끝났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소주병 나발을 불고 앉었지요. 죽겠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먼저 아주 단호하게 선언했지요. "사장님 이젠 오지 마십쇼. 저 추석에 고향 안 갑니다." 말할 때는 별게 아니었는데 막상 추석 전전날이 되어서 바리바리 싸들고 고향가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영 개떡 같았습니다. 엄니한테 큰일 때문에 못 간다는 전화는 드렸지 만 다들 '돌아가는데 나만 남아있구나.'하는 그런 감정, 조상과 고향한테 버림받은 것 같은 감정이 뭉클거리고 가슴을 쳐서, 번역은 무슨 번역입니까. 술만 떡이 되게 펐지요.
그 때 제가 살던 집에는 모두 8가구가 살았는데 모두들 지지리도 못살았지만 주인만 빼놓고 는 모두 떠났는지 집이 괴괴했습니다.
추석날 아침, 문을 여는 식당도 없어서 쓰린 속을 주무르며 라면을 끓여먹을까 아니면 탁주 한 사발로 속을 풀어볼까 망설이며 수돗가에 나앉아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데 "아이구, 총 각도 갈 데가 없었나 뷔여." 어떤 할머니가 정색을 하며 반가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누구시죠." "나? 총각허구 방 등어리루 맞대구 사는 사람인 걸, 몰랐어? 자 가자우." 추리닝 바람으로 따라가 보니, 우리 방과 맞대어 있는 후미진 골방에 전혀 기동을 못하는 아들과 단 둘이 산다던 분이었습니다. 낮에는 시장 한켠에서 좌판을 하신다는 할머니. 말은 들었지만 그날 처음 뵈었거든요. 얼굴은 못 뵈었지만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웅얼웅 얼 불경을 읽는지 기도를 하는지 목소리는 진즉 알았었지요.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가니 어떻게 차례는 지냈는지 탕국과 육전 몇 개, 쇠주 이렇게 상을 봐오셨습니다. 그 분의 아들은 나보다 10년 연상. 벌써 20년째 그렇게 지내신다는 것이었습 니다.
"총각은 어째 못가서?" "예, 어쩌다가 보닝께, 그리 됐슈 ." "괘않아, 괘안아, 내년에두 또 추 석이 있는걸 뭘 그래. 빨리 먹으라우." "저 할머니는 어떻게...?" "말 마라우. 이년 캭 죽고 싶어도 저놈 때문에. 나는 고향이 황해도 연백이야. 못가디 못가. 내가 죽기 전에 갈 수 있 가서?"
그날 나는 보름달이 떴는지, 그믐달이 떴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할머니를 위로한답시고 입만 달싹이는 그 아들과 함께 낮술에 취해서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어쩌구 하다가 일찍 잠들었으니까요. 그 할머니는 그해 겨울, 고향에 일찍 가보고 싶으셨는지 쓰러져 영영 못 일어나셨습니다.

*윤중호님은 576년 충북 영동 출생으로 시집<본동에 내리는 비>,<금강에서>를 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