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크리트로 배우는 불교] 금강경(5)

경전 속 경전 이야기

2021-01-05     전순환

범본 『금강경』이 누구에 의해, 어떤 불전들 토대로 편집됐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이 경전에 들어있는 내용이 어느 한 개인의 독단으로 선택된 것인지, 아니면 특정 집단의 의견 일치로 채택된 것인지도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반야부에 속한 산스크리트 불전들을 텍스트, 문장, 단어, 형태소 단위로 DB화 작업해온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강경』이 구성과 내용의 틀에서 제대로 잘 편집된 경전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제한적인 분량의 틀에서- 간결하게 표현해도 될 부분은 중복이나 반복으로 늘리고, 정작 조금 더 이야기가 필요한 부분은 누락의 방식으로 줄이는 지면 할당 때문이다. 그리고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이처럼 빠진 내용은 결국 우리에게 다소 소모적인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비단 적은 분량의 『금강경』뿐만 아니라 -물론 정도는 훨씬 덜하지만- 많은 분량의 불전들에서도 나타난다. 한 예로 『팔천송반야경』 1장의 첫 문단을 들어 본다. 이 단락은 “세존께서 1,250명의 비구와 함께 계셨고, 이들은…정욕(情欲)이 소멸하고, 번뇌(煩惱)가 없으며, 스스로 완벽하게 통제하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철저하게 해방된 마음과 지혜를 갖춘 아라한(阿羅漢)들…”이지만, “단 한 사람 아난다 장로만은 예외였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Ekapudgalam․sthāpayitvā․yad․uta․Āyuṣmantam․Ānandam. 

그렇다면 과연 아난다는 당시 어떤 위치에 있었던 것일까? 비구들의 성품에 이르지 못했으니, 이와 관련해 여러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답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 궁금증은 『십만송반야경』1에서 풀린다. 이 불전의 1장 첫 문단에서 위의 산스크리트 문구에 śaikṣam․Śrotaāpannam ‘유학(有學)의 단계에 있는 예류자(豫流者)’가 바로 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세존의 정념  『금강경』에서도 위와 비슷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단 여타 번역본들이 아닌 범본에서 그렇다. 1장 마지막 문단에 pratimukhīm․Smṛtim․upasthāpya란 문구가 있고, 이는 “〔세존께서〕 전방을 향해 〔응시하시며〕 정념(正念)에 드셨다”로 번역한다. 이 내용은 구마라집을 제외한 모든 한역본에서 볼 수 있다. 필자가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문구가 -ya로 끝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을 한 후’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 절대사(absolutive)에는 일반적으로 어떤 표현들이 계속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은 아마도 바로 이어 나오는 내용이 너무 길기에 해당 부분을 누락시켰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만오천송반야경』2 1장의 세 번째 단락에서 세존께서 법회가 시작되기 전 어떠한 행동을 보이셨는지 상당히 긴 문구들이 위의 산스크리트 문구에 이어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 가운데 바로 이어지는 몇몇 문구들만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01…Samādhirājam․nāma․Samādhim․samāpadyate․sma… 02 tasmāt․Samādheḥ․vyutthāya․divyena․Cakṣuṣā․Sarvalokadhātum․vyavalokya․ 03 Sarvakāyāt․Smitam․akarot…

“01〔정념에 드신 뒤〕 삼매(三昧)의 왕이라 불리는 삼매에 드셨다… 02 그 삼매에서 나오신 후 천안(天眼)으로 모든 세상을 바라보시고는 03 전신(全身)에서 미소를 내뿜으셨다….”

 

여래의 부촉  또한 그 자체 의미만으로는 해당 단어가 전하려는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금강경』 2장에 등장하는 ‘부촉(咐囑)’이란 단어이다. 모든 한역본에서 볼 수 있는 ‘부탁하여 맡김’이란 뜻의 이 표현은 수보리 장로가 세존께 아뢰는 한 장면에서 나타나며, 필자는 해당 의미를 ‘위탁(委託)’으로 바꾸어 놓았다.

01 āścaryam․Bhagavan․paramāścaryam․Sugata 02 yāvat․eva․Tathāgatena․arhatā․samyaksaṁbuddhena․Bodhisattvāḥ․Mahāsattvāḥ․anuparigṛhītāḥ․parameṇa․Anugraheṇa 03 āścaryam․Bhagavan․yāvat․eva․Tathāgatena․arhatā․samyaksaṁbuddhena․Bodhisattvāḥ․Mahāsattvāḥ․parīnditāḥ․paramayā․

Parīndanayā 

“01 세존이시여,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선서(善逝)이시여, 극도로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02 공양을 받을만하고 올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 여래에게 보살마하살들이 그 정도로까지 최상의 보살핌으로 섭취(攝取)를 받아왔다는 것이 〔말입니다〕. 03 세존이시여,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올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 여래에게 보살마하살들이 그 정도로까지 최상의 신뢰로 위탁받아왔다는 것이 〔말입니다〕.”

 

과연 무엇을 부촉 또는 위탁한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상 『금강경』에서 찾을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그에 대한 여러 견해에 만족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부촉/위탁되었다’라는 산스크리트 parīndita가 특정한 맥락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이다. 이같이 제한된 쓰임은 『팔천송반야경』 28장 「산화여래」편, 세존께서 아난다 장로에게 이야기하시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01…Ānanda․aparimāṇā․Prajñāpāramitā 02 aparimāṇayā․Parīndanayā․Prajñāpāramitām․te․parīndāmi․anuparīndāmi 03 sadevamānuṣāsurasya․Lokasya․Hitāya․Sukhāya 

“01 아난다야, 반야바라밀다는 무한하니라. 02 그러한 반야바라밀다를 나는 네게 무한한 신뢰로 위탁하고 맡아달라고 〔일임〕하는 것이니라. 03 신, 인간, 아수라를 포함하는 세간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32장 「위탁」편에는 그 쓰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01 dvis․api․tris․api․te․Ānanda․parīndāmi․anuparīndāmi․enām․Prajñāpāramitām․yathā․iyam․na․antardhīyeta 02 yathā․na․asyām․tvam․anyaḥ․Puruṣaḥ․syāḥ 03 yāvat․Ānanda․iyam․Prajñāpāramitā․Loke․pracariṣyati 04 tāvat․Tathāgataḥ․tiṣṭhati․iti․veditavyam 05 tāvat․Tathāgataḥ․Dharmam․deśayati․iti․veditavyam 

“01 아난다야, 두 번 세 번 〔말하며〕 나는 이 반야바라밀다가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를 네게 위탁하고 맡아달라고 〔일임〕하는 것이니라. 02 아난다야, 너는 〔반야바라밀다를 전하는〕 최후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03 아난다야, 이 반야바라밀다가 세간에 널리 유포되는 한, 04 여래는 존재한다고 알려져야 할 것이고, 05 법을 가르친다고 알려져야 할 것이니라.” 

‘위탁하다’의 대상이 반야바라밀다이며 이 단어가 위와 같은 맥락에서만 눈에 띄는 것이라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제시한 『금강경』의 해당 문구는, 즉 ‘…최상의 신뢰로 〔반야바라밀다가 끊이지 않게 하는 책무를〕 위탁받아왔다는…’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표현은 문맥상 2장이 아니라 반야바라밀다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13장 이후에 놓였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만든다. 

 

뗏목에의 비유  이밖에도 『금강경』에는 배경 지식을 모른다면 정확히 어떤 의도에서 표현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간명하게 처리되는 문구들이 있다. 그것들은 바로 법이 뗏목이란 단어에 빗대어 이야기되는 6장에 등장한다. 뗏목에의 비유는 반야부의 범본 불전들 가운데 오직 『금강경』에서만 볼 수 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01 Subhūte․Bodhisattvena․Mahāsattvena․Dharmaḥ․udgrahītavyaḥ․na․Adharmaḥ 02  tasmāt․iyam․Tathāgatena․saṁdhāya․Vāk․bhāṣitā 03 kolopamam․Dharmaparyāyam․Ājānadbhiḥ․Dharmāḥ․eva․prahātavyāḥ 04 prāk․eva․Adharmāḥ․iti 

“01…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법〔이란 것〕도 비법(非法)〔이란 것〕도 절대 취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라. 02 그러한 의미에서 여래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것이니라. 03 ‘뗏목에 비유되는 법문을 이해하는 자들은 법〔이라고 하는 것〕들을 버려야 할 것이고, 04 〔하물며〕 비법〔이라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라고 〔말이다〕.” 

 

과연 ‘뗏목’이란 법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이 문구를 처음 보았을 때, 필자 역시 그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이의 출처가 되는 문헌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 경전은 바로 『맛지마-니까야(MN 22)』3이었다. 필자는 한국어로 비유를 번역한 여러 서적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그 중심 내용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핵심 요지를 우리말로 전해 보려 한다. 

세존은 ‘여정에 오른 한 사람이 있고, 도중에 강폭이 넓은 곳에 다다른다. 자신이 서 있는 위험한 이편의 강둑에서 안전한 저편의 강둑으로 어떻게 건너갈 것인지 고민하다가 주변의 나뭇가지나 풀들로 뗏목을 만들어 건너기로 하고, 마침내 위험천만한 강을 건너간다. 강을 건너간 그는 자신이 만든 뗏목이 매우 유용했기에 버려두고 가기가 아까워 마침내 이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가거나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생각을 하게 된다’라는 비유를 든다. 

후에 여러 비구에게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것이지 소유의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니라. 법 또한 이와 같으며, 하물며 비법은 말할 것도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법과 비법은 각각, 앞서 소개한 『금강경』의 dharma와 a-dharma에 대응하는 팔리어 dhamma와 a-dhamma를 번역한 것이다. 후자는 부정의 접두사 a-가 붙지만 지난 호에 언급한 무위(無爲)의 법 공식에 적용되지 않는 단어로 판단된다. 외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dharma는 선-법(善法)을, a-dharma는 불선-법(不善法)을 가리킨다. 선과 불-선은 각각 kuśala와 a-kuśala에 대응한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 경전 외 경전 이야기 

다른 한편으로 현재를 사는 우리는 『금강경』이란 제목 아래 학문적이든 대중적이든, 수많은 버전의 서적들을 보게 된다. 과연 이 가운데 어떤 것을 봐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범본이든 한역본이든, 이 경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 한 곳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를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노력이 깃든 서적을 보아야 하고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범본들을 분석하면서도 한역본들 또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필자는 그러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이유차별  한 예로 구마라집의 한역에서는 다른 한역본들에도 범본들에도 없는 ‘이유차별(而有差別)’이란 표현을 볼 수 있다. 이는 지난 552호에서 소개했던 “…〔여래와 같은〕 성인들은 무위적으로 존재해 온 분들이기 때문입니다”에 이어 나온 문구(一切賢聖皆以無為法而有差別)에 나온다.

범본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표현은 분명 구마라집 자신의 해석에 따라 부가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차별’이란 단어와 여기에 ‘유’라는 단어가 들어간 ‘유차별’을 한역본들에서 검색해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보리류지와 진제의 번역에서 무-유차별(無-有差別), 즉 ‘차별 있음이 없다’라는 번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범본의 내용을 찾아보니, 『금강경』 23장 “수보리야, 실로 법이란 〔항상〕 일정하며, 〔법이라고 하는〕 그곳에서는 그 어떤 차이가 없느니라(Subhūte․samaḥ․saḥ․Dharmaḥ․na․tatra․kaścid․Viṣamaḥ)”에서 확인되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문맥적으로 볼 때, 구마라집에서 본 이유차별(而有差別)의 而는 -누구의 실수인지 알 수 없으나- 無의 오타라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전적으로 필자의 소견임을 밝힌다. 

 

진상  또 다른 예로는 bhūta=saṁjñā를 번역한 ‘진실한 생각’, 즉 ‘진상(眞想)’을 들 수 있다. 이 단어는 『금강경』 6장과 14장에서 같은 의미로 같은 맥락의 문구에 등장한다.

…Saddharmavipralopakāle․vartamāne․ye․imeṣu․evaṁrūpeṣu․Sūtrāntapadeṣu․bhāṣyamāṇeṣu․Bhūtasaṁjñām․utpādayiṣyanti? 

“…정법이 소멸하는 때가 올 때, 이와 같은 불전의 문구들이 읊어지〔는 것을 듣〕게 된다면, 진상을 일으킬 그러한 유정들이 존재할까요?”(6장)

…parameṇa․te․Bhagavan․Āścaryeṇa․samanvāgatāḥ․Bodhisattvāḥ․bhaviṣyanti․ye․iha․Sūtre․bhāṣyamāṇe․śrutvā․Bhūtasaṁjñām․utpādayiṣyanti. 

“…세존이시여, 이 경전이 읊어지는 것을 듣고 진상을 일으킬 보살들은 최상의 경이로움을 갖춘 자들일 것입니다.”(14장) 

그런데 다른 한역본들 모두 일률적으로 ‘실상(實想)’을 보여주지만, 구마라집은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같은 단어이고 같은 의미임에도 4장에서는 ‘실신(實信)’으로, 14장에서는 ‘실상(實相)’으로 번역한다. 이런 차별적 번역은 결국 본래의 의도와 다른 해석들로 이끄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필자는 부분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며 내용을 파악하려 노력 중이다.

  그동안 필자의 글에 관심을 두었던 여러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전순환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대학원 졸업.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인도유럽어학과에서 역사비교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시작된 한국연구재단 지원 하에 범본 불전(반야부)을 대상으로 언어자료 DB를 구축하고 있으며, 서울대 언어학과와 연세대 HK 문자연구사업단 문자아카데미 강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팔천송반야경』(불광출판사),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반야바라밀다심경』(지식과 교양),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신묘장구대다라니경』(한국문화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