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에세이] 다시 만나요 그대, 지구 위에서

2020-12-31     김택근

잎 떨군 나무들이 줄지어 마을로 내려왔다. 집 앞 키 큰 나뭇가지에 새집이 걸려있다. 새들은 날아가고 새집은 비어있다. 가을 따라갔는가, 가을을 물고 갔는가. 새집은 새 날아간 하늘 쪽으로 입 벌린 채 아직도 새들을 날리고 있다. 우리도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날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우리를 날리는 사람은 누굴까. 우리가 빠져나온 둥지는 어디에 걸려있을까. 잎이 지고 나서야 둥지가 보이듯 우리도 벌거벗어야 둥지가 보인다. 영웅심과 출세욕이 희미해지고, 교만과 위선이 엷어지면 나를 키운 둥지가 점점 또렷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둥지로 돌아갈 수 없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어머니, 고향, 친구, 사랑…. 우리가 받들고 있는 것들도 점점 멀어져 간다. 

 

| 달리는 열차에서 쪽잠 자는 인류

나를 거쳐 간 시간은 다시 흐를까, 아니면 어딘가에 화석처럼 굳어 있을까. 지난 세월을 뒤적이면 우리네 인생길은 험했고 삶은 고단했다. 불현듯 이제 누군가의 둥지에 들어 편히 잠들고 싶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시간마저 풀어버리면 아이처럼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잠자는 아이의 표정은 얼마나 맑은가. 아이의 잠 속에는 그 어떤 삿된 것도 섞여 있지 않다.     

“잔다는 것은 탄생으로 인하여 잔혹하게 중지된 태아의 삶을, 매일 아침 고통스럽게 다시 연출해보는 태아의 삶을, 아득한 옛날 처음으로 젖을 빨 때처럼 우유와 잼의 아침 식사로 달래야 하는 태아의 삶을 다시 이어가는 것이다.”(미셸 투르니에 『예찬』)

잘 때 웅크리는 것은 그 옛날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의 자세라고 한다. 그래서 외롭거나 아플 때 나도 모르게 웅크리는 것은 어머니를 부르는 원초적 본능일지도 모른다. 잠은 태아의 평화,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남은 다시 세상에 태어남이다. 그러므로 잠자리는 또 다른 어머니다.

코로나19의 침공을 받은 인류는 편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심성까지 파괴했다. 인류가 오랫동안 갈고 닦은 상식과 이성도 맥을 추지 못했다. 팬데믹에 인간의 존엄과 품위는 형편없이 구겨졌다. 지구촌에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거리에는 증오의 저주가 넘쳐났다. 나만 살겠다고 무리 지어 상대를 공격했다. 

우리 사회도 말[言]들이 충돌하고, 도(道)끼리 싸우고, 가르침이 서로에게 삿대질했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1인으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참으로 암담했다. 허무와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문득 살펴보니 우리는 모두 같은 열차에 탑승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날마다 살벌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공포심은 밖으로 던지고 다행과 요행만을 불러들

였다. 열차는 어디론가 달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 종착역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달리는 열차 안에서 쪽잠을 자는 형국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어디서 내릴 것이다. 그때가 언제며 그곳은 어디일까.

 

| 그대가 있기에 나도 있다

비록 주변에 악행이 넘쳐나고 산하가 오염되었지만, 우리 사는 세상을 벗어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지구는 극락이어야 한다. 하지만 마음의 때를 씻어내야 본래면목이 보이듯이 지구 위의 삿된 것들을 벗겨내야 이 땅이 비로소 본래 모습인 극락으로 돌아올 것이다. 성철 스님은 “세계는 한 집이요, 인류는 한 몸이니 국토와 인종의 차별을 버리라”고 일렀다. 남의 종교를 내 종교로 받들라고 했다. 팬데믹이 덮친 지구의 아주 작은 귀퉁이에서 성철 스님이 남긴 법어에 두 손을 모은다.

“극락과 천당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남을 나처럼 소중히 여기는 한마음에 있습니다.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천당과 극락은 하늘 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발밑이 곧 천당이요, 극락입니다.”(1989년 신년 법어)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난 일들을 매듭지어 강물에 씻기는 헹굼의 시간이다. 곧 세상을 덮는 위대한 어둠이 내릴 것이다. 시간에 복종하며 무릎을 꿇는다. 웅크린 자들을 일으키는 상서로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참회의 기도 소리도 섞여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그대가 살아있으므로 비로소 나는 노래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둥지다. 집, 마을, 나라, 지구라는 둥지에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팔을 베고 잠들고 싶다. 좋은 꿈 하나 만나고 싶다. 꿈 하나씩 찾아들고 다시 만나요 그대, 지구 위에서.

 

김택근
시인, 작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오랜 기간 기자로 활동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용성 평전』 『성철 평전』 『새벽, 김대중 평전』 『강아지똥별, 권정생 이야기』 『뿔난 그리움』 『벌거벗은 수박도둑』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