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미술 세계]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2020-11-23     강우방
(왼쪽부터) 최순우 선생, 이노우에 타다시 선생, 존 로젠필드 교수, 얀 폰테인 관장, 오주석 씨

사람은 태어나 평생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크고 작은 은혜를 입으며 자신의 일생을 엮어나간다. 그런 분들은 책에서 만난 훌륭한 사람일 수도 있고, 감동적인 책을 쓴 훌륭한 분들일 수도 있고, 조형 예술품들을 창작한 장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은 같은 시대에 살면서 운명을 만들어준 고귀한 분들일 것이다. 지난 이야기에서 미처 다루지 않고 남겨놓았던, 살아오면서 만난 각별한 인연을 맺은 분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스승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후원자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여인일 수도 있다. 옛말에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고 했는데, 필자는 그리 덕은 없으나 그들이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반드시 이웃이 있었다. 

 

| 여초 그리고 최순우 선생

미술사학을 평생 독학하면서 가장 크게 갈망한 것은 훌륭한 스승이었다. 고등학교 때 원문으로 읽은 너대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서처럼 항상 위대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다. 대학 시절에 만난 여초 김응현(1927~2007) 선생님은 40세쯤 되었는데 말 그대로 패기 있는 서예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다. 그러나 그가 매우 엄격한 교사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매주 강의를 들으며 그때 배운 바를 토대로 필자의 체험을 피력하며 27세 때에 「서의 현대적 의미」라는 작은 논문을 『공간』에 싣기도 했다. 

김응현 선생님은 필자를 수제자로 삼으려고 편애하셨다. 그는 추사의 전통을 이은 동양의 대표적 서법가(書法家)였고, 청대의 비학(碑學) 사상을 받아들여 북위비(北魏碑)의 글씨를 널리 알렸다. 북위비들의 글씨는 참으로 기세가 뛰어나 항상 경이로웠다. 훗날 미술사학 연구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필자는 서예와 동시에 유화(油畫)를 병행했다. 서양화는 세계적인 화가 손동진(1921~2014) 선생님을 사사했지만 2년 뒤 혼자서 그렸다. 그때 배운 데생이나 크로키도 작품을 파악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대학 시절은 인문학 모든 분야의 섭렵과 작가로서의 수업으로 채웠다. 동양의 서화와 서양의 회화를 함께 시도한 이유는 동양의 붓과 서양의 붓이 어떻게 다른지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역시, 김응현 선생님과 만난 일이다. 아내도 함께 붓글씨 쓰고 사군자를 쳤다. 1968년 결혼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했으니 바로 한국미술사학의 길을 국립경주박물관 시절부터 홀로 개척하여 나아가는 일이었다.

가장 일관되게 후원을 아끼지 않은 분이 최순우(1916~1984, 사진 1) 선생님이다. 최순우 선생님이 국립경주박물관장일 때 필자는 유학이 아니라 연수의 성격으로 1975년 일본에 보내졌다. 귀국해 3년 후엔 다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으로 영문도 모르고 갔다. 얼마 후 미국 각지를 순회하는 <한국미술 5000년> 展이 열렸을 땐 클리블랜드와 보스턴 박물관으로 순회 전시 책임자로 보냈다. 최 선생님은 가장 중요할 때 필자를 어디든 보냈고 그로 인해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의 불상들을 조사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출발지는 항상 천년 고도 경주였다. 

그러는 동안 세계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학자로 점점 각인되어갔다. 이처럼 최 선생님은 필자를 해외에 파견하여 학문의 기초를 다지게 했다. 보스턴에서 발표하지 않았다면 하버드대학 유학도 있을 수 없었으리라. 오늘날의 필자는 모두 최 선생님 은덕이다. 

2003년 선생님이 작고하셨다. 오랜 재임 동안 박물관을 지키고 그 위상을 매우 크게 높이셨고, 모든 분야의 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셔서 서울 박물관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은 그분이 그 위상을 드높인 것이며, 관장일 때 국립박물관의 전성기였다.

 

| 운기화생론 넘어 영기화생론으로

교토국립박물관에 1년간 머물며 깊은 학연을 맺은 분은 이노우에 타다시(井上正, 1930~2014, 사진 2) 선생으로 그 당시 교토국립박물관의 자료 실장이었다. 그의 고구려 벽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새로운 해석은 훗날 필자의 고구려 능묘벽화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 필자보다 11살 위로 40대 중반이었던 그는 필자를 마치 친동생처럼 대했다. 필자의 책상이 있던 고고실에 거의 매일 들러 간단한 맥주 파티가 열렸다. 학문 이야기뿐일 정도로 집중력이 대단했다. 작품을 조사할 때 항상 옆에서 조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운기화생론(雲氣化生論)’은 이미 싹이 트고 있었다. 고구려 벽화와 중국 한(漢) 시대의 조형에서 크게 힘입어 정립한 ‘운기화생론’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물론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만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했던 이유가 아마 제자로 삼으려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전혀 그런 느낌은 없었다. 그는 당시 일본 미술사학계에 크게 실망하고 있던 터였다. 몸가짐도 단정했고 하이쿠(俳句, 일본의 전통적 시)를 짓기도 했고, 음악을 감상했으며 그의 문장은 웅혼했다. 그의 제자에 ‘안도 요시카’가 있다. 열혈 투사적인 그녀는 인도를 20회 답사하며 훌륭한 사진을 찍어서 큰 저서를 준비하고 있었을 때 이노우에 선생이 정성껏 편집을 도와줄 만큼 돈독한 사이였다. 가끔 필자가 끼어들어 인도 미술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듣곤 했다. 우리 세 명은 마음이 통했다. 

이노우에 선생의 ‘운기화생론’을 터득하는 데 무려 30년이 걸렸다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것이다. 우선 화생(化生)이란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경전도 살피고 사전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2000년 초, 마침내 이노우에 선생은 운기화생론을 정립했고 필자는 몇 번이고 탐독했으나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화생의 뜻을 찾아내야 하는데 어디에도 없었고, 잘 아는 학승들에게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단지 사생(四生) 가운데 하나로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라는 말 이외에는 없다. 태생, 난생, 습생, 그리고 화생이라는 네 가지 생명의 탄생방법의 중 하나인데 매우 중대한 용어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없어서 자력으로 터득하리라 결심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중에 이노우에 선생의 운기화생을 만나면서 어느 날 문득 화생이 풀리고 동시에 운기화생도 풀리는 순간, 즉시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이라는 방대한 필자의 폭발적인 이론을 정립하게 되었다. 그분이 일본 미술사학계에 운기화생을 제시한 것은 혁명적 이론임을 알아채는 학자는 없다. 그 이론을 충분히 파악한 사람은 바로 한국의 젊은 학자였다. 그러자 제자인 안도는 스승의 이론의 핵심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았다. ‘연화화생(蓮華化生)’이란 말은 아미타경에 유일하게 나온다. 선업을 쌓아 죽은 후에 극락의 연못에서 화생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모두가 오로지 연화화생만을 알고 있었는데 운기화생을 제시한 것은 동서양 미술사학 연구를 몇 단계 드높인 위대한 업적이라 생각하고 탄복했다. 

그러나 화생의 의미와 운기화생을 터득하자마자 무수히 많은 화생의 폭발적 방법을 깨친 것이다. 마침 고구려 벽화를 연구하며 천장 중앙의 대연화를 분석하면서 연꽃이 아님을 알았다. 그 많은 불교의 상징인 연꽃은 연꽃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불교계는 벌컥 화낼 것이다, 그것을 터득하는데 30년의 세월이 걸리고 큰 깨침을 얻었는데 어찌 한 번 듣고 알려고 하는가. 모두가 틀렸다고 강조한 바 없으나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인 까닭은, 필자가 밝힌 ‘영화(靈化)된 세계’를 현실 세계에 비추어 설명했기 때문이다. 

무늬를 연구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단 세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2005년 봄,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 무본당에서 국제심포지엄을 열었다. 발표자는 이노우에 선생과 안도 요시카 교수, 심연옥 교수와 필자 네 사람뿐이었다. 이것은 문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발표하는 세계 최초의 중대한 첫 심포지엄이었다. 대상은 같았지만, 시각은 모두 달랐다. 발표시간은 대담하게 각각 3시간씩 주어졌다. 심연옥 교수는 복식 연구자로 『한국 복식 2000년』과 『한국 복식 문양 2000년』이란 야심 찬 저서를 냈다. 마침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복장 유물 특별 전시라든지 복식 전시도 열렸는데 마침 복식에 관심이 컸던 차라 심 교수와는 자주 만나는 기회가 있어서 잘 아는 사이였다. 이노우에 선생은 필자가 경주박물관 관장이었을 때 일주일 동안 초청한 적이 있었고, 두 번째 초청이었다. 무본당 개원 2주년 기념으로 열린 문양에 대한 국제심포지엄은 이틀에 걸쳐 진행됐다. 무본당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2009년 필자의 이론이 무르익을 즈음인 2009년 이노우에 선생에게 일본어로 번역된 논문 「대덕사 소장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교정을 부탁했는데, 한 달 만에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다.

“당당한 관록을 느끼게 하는 일작(一作), 감동의 두 글자만이 읽은 후에 남았습니다. 나의 일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의 운문으로부터 운기문으로 전환, 거기에 나의 연구 인생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대의 인생과 연결고리가 이루어져서, 더욱 큰 이론이 되었습니다. 매우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치열하게 이 문제에 골몰했는지 알 수 있다. 필자 논문은 이노우에 선생의 이론을 극복하여 무한대로 확장한 것이어서 그분만이 논문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비록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화생의 방법을 무한대로 확장한 이론이라 불쾌할 수도 있지만, 그분은 열린 마음을 지니었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마침내 그 긴 논문은 2010년 가장 권위 있는 일본 미술사학 학술지 「국화(國華)」 1378호에 실렸다. 

이노우에 선생이 위독하다고 해서 병원에서 뵈었지만, 2014년 8월 14일 타계했다. 그분과의 교류는 인생의 스승이자 동반자로 운명적이어서 그분을 알지 못하면 필자를 알지 못한다. 40년 동안 가르침을 준 그의 제자는 스승의 이론을 크게 뛰어넘어 영기화생론으로 세계미술 일체를 풀어내고 있으니 만일 살아계셨더라면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 하버드에서 맺은 선연들

존 로젠필드(John Rosenfield, 1924~2013, 사진 3) 교수는 하버드대학 박사학위 과정을 권유한 분이다. 1980년 보스턴 박물관에서 개최된 국제심포지엄에서 필자의 발표를 듣고 나서, 그날 저녁 리셉션에서 대뜸 1년간 하버드대학 방문 교수로 초대하겠다고 제의해왔다. 일주일 후 “박사학위가 없으니 대학원 박사과정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방문 교수보다 대학생으로 오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대 독어독문과 졸업 학사 학위가 유일하고 학부 평점은 C 학점이므로 외국 대학에 신청할 자격이 아예 없는 상태였다. 학비도 준비해놓겠다고 했다! 이듬해 1982년부터 1984년까지 2년 동안 그의 지도를 받는 것으로 했다. 

유대인인 그는 원래 인도미술이 전공이었는데 일본미술로 바꾸었으며 하버드대학에서 아시아 학생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필자는 나이 탓에 영어 듣기가 잘 안 되었다. 쓰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으므로 매 학기 리포트를 냈는데 항상 100매 이상 써서 제출했다. 그러면 로젠필드 교수는 문장만 정성껏 고쳤을 뿐 내용은 손대지 않았다. 리포트가 아니라 논문이었다. 필자는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절반쯤 쓰다가 접어두고 미국 전역의 박물관을 다니며 작품 조사에 열중했다. 로젠필드 교수는 한 번도 학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천재 모임의 일원이었던 그는 나를 재촉하지 않고 “당신은 천재다, 그리고 노자는 박사학위가 없지 않으냐”라며 항상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1년 더 연장하여 3년 동안 하버드 스퀘어에서 생활하는 동안 도와준 분이 또 있다. 얀 폰테인(Jan Fontein, 1922~2017, 사진 4) 보스턴 박물관장이다. 그가 바로 미국에서 열린 한국미술 국제심포지엄에 초대한 분이다. <한국미술 5000년> 展이 보스턴으로 가기 전에 클리블랜드 박물관에 머물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심포지엄이 열리는데 발표하지 않겠는가 해서 바로 응했다. 그때 필자는 혹시 무엇인가 발표할 기회가 올지 모르니 도착하자마자 논문을 영어로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신라와 통일신라의 과도기적 양식에 대하여’였다. 경주에 오래 살면서 삼국 가운데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어떻게 해서 통일신라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는지 밝히는 논문이었다. 그래서 과도기적 작품들을 살펴야 했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번 만나 이야기한 게 전부였는데 잊지 않고 발표를 요청해 매우 반가웠다. 

미국 체류 중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분으로 자주 박물관으로 불러서 맛있는 점심을 사 줬다. 그는 네덜란드 사람으로 영어, 불어, 독어, 일어 등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했으며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를 함께 연구하여 저서도 냈다. 한국말도 배워 곧잘 했으며 한국을 자주 방문하여 답사도 해서 이야기하면 즐거웠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3년 전에 타계했으니 장수한 셈이다. 그의 마지막 작업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사원 연구를 저서로 출간하는 것인데 장수했으니 꿈을 이루었을 것이다. 

 

| 하늘이 거둬간 사제의 인연

나이가 들어가매 필자는 제자를 갈망했다. 오주석(1956~2005, 사진 5) 군은 세월이 흐를수록 제자가 되어갔다. 그는 필자를 스승으로 택했고 필자는 그를 제자를 여겼으며, 서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박물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겠다는 그를 붙잡아 두고자 필자의 연구실 옆에 방을 마련했다. 수장고에 있는 회화를 정리하여 매년 미술사학지를 낼 터이니 그 작업에 전념하라고 했다. 수장고에는 작품들이 많았고 도자기, 회화, 금속공예 등도 점차 정리하여 보고서를 낼 계획이었다. 그는 한문도 잘하고 문장력도 있고 안목도 있어 대학자로 키우고 싶었다. 그는 수장고의 회화 작품을 정성껏 조사하여 카드를 만들며 작품을 마음껏 감상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안목은 날로 높아졌으며 한국 회화에 애착을 갖게 되었으나 결국 박물관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여 떠났다. 

그 무렵 호암미술관은 국립박물관과 함께 소장 작품으로 단원 김홍도 전시를 열겠다고 상의해왔다. 필자는 국립, 호암, 간송 세 박물관을 전시 주최로 하고 개인 소장품들도 모아 회고전 성격으로 열자고 제안해 대규모 전시를 이끌었다. <단원 김홍도> 展은 필자가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싶었던 몇 가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작품을 내놓는 일이 없기로 소문난 간송박물관의 협조 여부가 관건이었다. 

간송박물관 최완수 실장과 필자는 각별한 사이였지만, 간송의 단원 작품을 다 내놓으라고 하니 응할 리 없었다. 두 번째 방문 때에도 거절당했다. 세 번째 방문하여 겨우 허락을 받고 다량의 단원 그림을 빌렸다. 그러면서 단원의 연구와 도록 제작을 그에게 맡겼다. 대규모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는 단원 연구의 대가가 되었다. 단원과 그 시대의 정조대왕에 심취하여 한국 회화사의 한 분야를 개척하여 연구의 한 획을 긋게 되었다. 한참 학문이 익어가서 높이 비상하기 시작할 무렵, 백혈병으로 49세에 타계하여 여러 가지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필자로서는 제자를 잃은 것이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나와 함께 큰일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늘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아내 김형단을 빼놓을 수 없다. 건강도 좋지 않고 재력도 없고 직장도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필자는 아틀리에(화가, 조각가, 공예가, 건축가, 사진가 등의 작업장)가 없었다. 한남동 꼭대기 교회 옆의 친구 집에서 유화와 붓글씨를 썼다. 그 친구의 동생이 지금의 아내다. 아내는 불평 없이 내조하여 오늘날의 필자를 있게 했다. 

평생 인연 맺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언급한 분들뿐이겠는가. 여기서 언급하지 못한 분들도 많다. 참으로 많은 사람과 인연 맺으며 삶과 학문을 키워갔으니 부족하나마 이 글을 통해 깊은 감사의 마음 전한다. 외국의 새 문물에 누구보다도 먼저 크게 눈뜨게 되어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그런 골이 깊은 열등감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세계를 선도하게 되었으니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세계 최초로 조형언어를 발견하여 그 문법을 정립했다. 이제 할 일은 그 조형 원리를 널리 알려 오류라는 무지로부터 인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만일 ‘보주’라는 결정적 열쇠를 풀지 않았다면 세계미술의 실상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옴 마니 파드메 훔’이라는 진언을 풀었으니 관음보살의 자비심이 우주에 가득 찰 것이다.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