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불교 생활] 머무름 없이 흐른다

2020-11-26     원제 스님

| 60억 개 관점, 60억 개 세상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 남긴 경제학의 현대적 정의입니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모든 경제 활동은 여러 개인이 추구하는 욕망과 계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인의 이익 추구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시장의 작동 원리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나 가수 홍순관이 노래 <쌀 한 톨의 무게>에서 표현한 ‘보이지 않는 손’의 모습은 애덤 스미스의 관점과 사뭇 다릅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의 우주의 무게를 /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애덤 스미스의 관점에서 세상은 개인과 집단이 지닌 합리적 욕망과 치열한 경쟁의 조합으로써 운영되지만, 가수 홍순관이 바라본 세상은 자연과 인간과 마음, 우주의 이치가 조화된 모습에 가깝습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애덤 스미스의 관점에 수긍하지만, 수행자인 탓인지 홍순관의 노래 가사에 아무래도 더욱 공감이 갑니다.

사람이라면 무릇 관점을 가집니다. 하지만 관점은 단지 바라보는 시선으로만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이치가 있듯, 관점이 곧 세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애덤 스미스와 홍순관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면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상황과 실재처럼 보이지만, 사실 관점에 의해 재창조되고 재해석된 마음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서로 다르게 만들어낸 세상에서, 각자의 의미 부여 방식을 거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만일 애덤 스미스와 홍순관이 동시대인으로 살면서 세상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교류하면 어떨까요. 누구의 관점이 옳든 그르든, 우월하든 열등하든 간에 세상은 여여한 모습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 관점을 허용해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관점이란 마치 하나의 촛불과 같아서, 세상을 만들어내고 밝혀내는 하나의 시선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 수와 같은 60억 촛불이 있다 해도 그 낱낱의 비춤은 서로에게 걸림이 없습니다. 관점이란 이처럼 분명하게 비추어내면서도 서로에게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세상일들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서로 부딪히고 얽히며 개인과 조직 사이에 다툼이 끊이질 않습니다. 사람과 세상이 마음이 빚어내는 관점으로서 드러나지 않고, 실체로서 고정되어버린 까닭입니다.

 

| 연기법으로 바라본 ‘보이지 않는 손’

성철 스님은 우리가 밤에 잘 때 꾸는 꿈은 작은 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큰 꿈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세상은 헛꿈과 같기에 부정하고 외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꿈의 비유는 사실 ‘실체성’이라는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과 나의 실체가 있다는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나면 바른 안목을 갖출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분별심을 벗어나면 자연스러운 분별이 나오는데, 이를 지혜라고 부릅니다. 지혜는 따로 구해야 할 고귀한 앎이 아니라,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분명한 앎이자 시선이고 관점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단지 무위법을 아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모든 유위의 일들이 실체 없음을 통달함으로써, 오히려 유위의 일들을 집착 없이 굴려 나갈 수 있는 여유와 안목이 지혜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조화로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緣起)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도 불교로 들어오면 연기가 됩니다. 무수한 인연[緣]은 실체가 없기에 ‘보이지 않지만’, ‘손’처럼 세상이란 무대에서 흐름으로써 부단히 활동[起]하고 있습니다. 실체를 고정할 수 없음에 진공(眞空)이라 하기도 하고, 활달하게 살아있음에 묘유(妙有)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꿈으로써 자유로워지는 법

법당 안에는 촛불이 고요히 타오르고, 향 내음이 그윽이 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나지막한 염불 소리가 들립니다. 촛불과 향 내음과 염불 소리는 결코 서로를 방해하거나 교섭하지 않습니다. 다만 각자의 인연에 따라 분명하게 나타날 뿐입니다. 빛과 냄새와 소리가 법당의 허공에서 분명히 드러나건만, 서로의 인연이 펼쳐짐에 아무런 장애나 걸림이 없습니다. 실체 없이 비어있고, 모든 인연을 허용해주는 허공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선지 선사들은 종종 허공에 대한 비유를 자주 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허공이야말로 중심입니다. 나와 달리 허공은 중심이 없습니다. 중심 없는 중심, 이것이 바로 진정한 중심의 모습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촛불과 향 내음과 염불 소리처럼 인연 따라 드러난 하나의 모습이며 현상이자 흐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라는 실체를 믿는 탓에 갈등과 다툼을 만듭니다. 빛과 냄새와 소리가 허공 안에서 각자의 인연에 따라 조화롭고 자유롭게 드러나는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나와 세상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현실이라는 꿈에서 깨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꿈이라는 묘한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실체로 여겼던 나와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삶을 대하는 무게가 가벼워지면서 보다 더욱 분명하게 세상일들을 대하며 흘러갈 수 있습니다. 꿈 안에서 살되 꿈임을 분명히 알아, 더는 꿈에 묶이지 않고 오히려 꿈 안으로 들어가, 꿈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나와 세상이 명백한 꿈임을 알되, 꿈에서 벗어나려는 대신 하나의 꿈으로써 지혜롭게 흘러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머무름 없이 흐르는 방법입니다. 유마 거사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무위에 머무르지 않고, 유위를 다하여 끝나지도 않는다.”

 

원제 스님
2006년 해인사로 출가, 도림법전 스님의 제자로 스님이 되었다. 2012년 9월부터 2년여간 티베트 카일라스를 시작으로 5대륙 45개국 세계 일주를 했다. 이후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좌우명으로 지내고 있다.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로 현재 김천 수도암에서 수행 중이다. 저서로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2019, 불광출판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