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으로 터뜨리는 관음보살의 ‘소리’

불광초대석 | 수어통역사 김철환

2020-11-24     조혜영
수어통역사 김철환.

어느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만약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영화 속 주인공의 말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부처님과 가섭존자처럼 이심전심으로 연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깨달은 자의 보이지 않는 언어일 뿐. 우리에겐 눈에 보이는 언어가 필요하다. 

최근 TV에서 코로나19 브리핑을 볼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다. 발표자 옆에서 수어로 내용을 전달하는 수어통역사다. 세상과 농인들 사이를 수어로 연결해주는 김철환 수어통역사를 만났다.

 

사진. 김동진

 

| 수어로 시작한 장애의 벽 허물기

김철환 수어통역사가 처음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이다. 여느 때처럼 서점에서 불교 서적을 산 후, 절을 하기 위해 서울 조계사로 향하던 길. 그날따라 그의 눈에 띈 현수막이 하나 있었으니 조계사 원심회의 수어 강좌 현수막이었다.

“어쩐 일인지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그날따라 유난히 수어 강좌 현수막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인연이었나 봅니다. 그렇게 수어를 배우게 됐는데, 생각보다 너무 어려운 거예요. 중간에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죠. 원심회 농인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수어를 만난 인연으로 김 수어통역사의 인생은 180도 변했다. 농인들의 도움 덕분에 수어의 매력을 알게 되고 장애인 인권에도 관심을 두게 된 그는 엔지니어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장애인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수어를 배우면서 농인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분들의 삶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더 안 좋았죠. 가족들 내에서도 소통이 단절된 채 생활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왜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 없고, 유산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소외되고…. 집에 가면 가족들이 딱 두 마디만 한다고 하더라고요. 왔냐? 밥 먹어라.”

김 수어통역사는 현재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장애벽허물기)’이라는 장애인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회생활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들을 수어로 상담하고, 장애인 관련 제도 개선안 및 정책을 제안하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쉬고 있지만, 조계사 원심회에서 법회를 수어로 통역해주는 봉사도 꾸준히 해왔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듯이, 한글 경전을 수어로 다시 바꿔서 전달해요. 어려운 불교 교리를 수어로 통역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공(空)’이라는 개념을 통역할 때 ‘비어 있다’는 수어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깊은 의미를 담아내기 부족하죠. 아직 불교 전문 수어통역사는 없습니다. 『반야심경』, 『천수경』 등 경전을 수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원심회에서 해오고 있어요. 비장애인들이 불교 주석서나 해석서를 보며 참뜻을 이해하듯이 농인들에게도 수어로 된 해석서가 필요합니다.”

김 수어통역사가 가장 좋아하는 수어표현, 바로 ‘부처님’이다.

 

| 수어로 듣는 경전, 깊어지는 신심

김 수어통역사는 수어로 통역하기 가장 어려운 경전으로 『반야심경』을 꼽았다.

“설화적으로 풀어낸 경전은 이야기가 있어서 수어 통역이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반면에 『반야심경』은 불교의 본질을 축약해 놓은 경전인 만큼 비장애인들이 문자로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잖아요. 수어로 통역할 때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런데도 농인분들은 경전을 수어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경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자로서 자부심도 생기고, 신심도 더 깊어진다고 하실 때마다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불교 수어 가운데 김 수어통역사가 좋아하는 표현은 ‘부처님’이라는 단어다. 비로자나불 수인에서 엄지를 올린 동작과 이를 한 손으로 받쳐 위로 올려주는 동작으로 표현한다. 위로 올리는 동작은 공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예쁘게 보여주기 위해 살짝 돌려주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이와 표현법이 다르다. ‘관세음’은 세상에 빛을 전한다는 의미로 양손을 펼쳐 보인다.

“수어를 배우기 전에 대인공포증이 있었어요. 사람들 앞에서 제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죠. 그런 제게는 음성이 아닌 몸짓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어가 더 자연스럽게 다가왔어요. 수어는 직접적인 언어예요. 연극배우들이 몸짓이나 표정으로 연기를 하듯이 언어로서 수어가 가진 미묘한 맛이 있습니다. 수어 배우는 사람들끼리 이런 말을 하곤 해요. 수어로 대화를 나누는 꿈을 꾸고 나야 비로소 수어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 거라고. 영어 단어 외우듯이 수어 표현을 외우고 익히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막힘없이 수어를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이제 됐구나 싶었죠.”

 

| 한낱 몸짓,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길

최근 지상파 메인 뉴스에서 달라진 부분이 하나 있다. 수어통역이 실시된 것이다. 오래전부터 ‘장애벽허물기’에서 방송사에 요구해왔던 내용이지만 제대로 수용되지 않자 김 수어통역사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을 냈다. 이후 인권위원회에서 지상파 방송사에 수어통역을 제공하도록 권고했고, 이에 따라 수어통역이 현실화한 것이다.

“오랜 노력 끝에 1999년 TV 자막방송이 도입됐던 것과 이번에 지상파 메인 뉴스 수어통역이 실시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불교방송과 BTN 같은 불교채널의 경우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곤 수어통역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개신교나 가톨릭 방송사에서 농인 신도들을 위해 수어통역을 실시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죠. 수어통역 대신 자막을 보면 되지 않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는데, 농인분들은 한글이 자기 언어가 아니기에 문자에 취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글과 수어는 문장체계가 다르거든요.”

현재 김 수어통역사에겐 몇 가지 원(願)이 있다. 농인들의 불교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바람들이다.

“수어로 된 경전 해설서를 만들고 싶어요. 물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여러 힘이 모여서 농인 불자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 쉽고 깊게 전달될 수 있길 바랍니다. 또 하나 바람이 있다면 장애인도 출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싶어요. 사제 서품을 받은 농인 신부님도 있고 농인 목사님도 많은데, 농인 스님은 없잖아요. 불교계에서는 아직 장애인들에 대해 ‘불쌍하다’, ‘도와줘야 한다’는 시선만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불자로 바라보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어로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더 많은 연구가 이뤄져야 합니다. 불교를 전하는 수어통역사가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영어 수어나 현지 수어로 해외 포교까지 하는 이웃 종교와 비교할 때, 농인들에 대한 불교계 관심은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당연히 김 수어통역사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의 바람처럼 장애인 불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도와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같이 걸어가는 도반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앞으로 김 수어통역사의 힘 있는 몸짓이 빛이 되고 길이 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