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성학] 사람이 아닌 사람들

삶의 여성학

2007-09-16     관리자

아침에 산보를 나가보면 7월인데도 바람이 시원하고 하늘은 맑고 푸르기만 하다. 자연은 이 렇게 아름다운데 어째 사람 사는 세상은 어둡고 깜깜하다 못해 숨이 막히는 일들로 가득한 지 모르겠다. 딸을 상습적으로 구타해온 사위의 폭력을 막아 보려던 칠순의 친정 어머니가 살인죄로 재판을 받는 사건을 보면서 가정폭력 방지법이 빨리 만들어져야겠다고 개탄한 것 이 엊그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보다 더 아연실색할 일이 아산의 한 마을에서 저질러졌다. 한마을에 살 고있는 아저씨와 오빠들이 가난한 소녀가장을 돕기는커녕 남자들 14명이 집단으로 11살 먹 은 어린 학생에게 성폭력을 한 기막힌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자취하며 학교를 다니는 중학교 여학생을 집주인 부자가 성폭행을 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쳤다. 인간도 아니다. 아니 사람이 이럴 수가!'라는 참담한 심정, 인두겁을 쓰고 의지가지 없는 어린아이를 자살 지경까지 매몰아 부친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첫 번 째이고, 이미 소문으로 알고 있으면서 수수방관함으로써 공범자가 된 동네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그 둘째이며 마지막으로 사회를 이 모양 요꼴로 만든 우리 자신들에 대한 분노로 가슴이 떨려 왔다.

우리가 죽은 듯이 쉬쉬하며 엎드려 있는 동안에 폭력적인 성문화가 제멋대로 뻗어나간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다. 뿐만 아니라 딸은 순종하고 여성답게 키우면서 순결을 강조하고 아들 은 기를 살려 저 하고 싶은 대로 놓아 키우면서 성 경험 정도는 눈감아 주며 키운 어머니 들, 한국의 어머니인 우리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남자답게 키운다는 것이 자칫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키운 것은 아닌지... . 우리 가족만 안락하게, 우리 딸만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담 장 밖의 일에 무관심한 채 살아오는 동안 담장 밖에서는 무수한 딸들이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상기할 때 견고한 가족 이기주의 속에 안주했던 우리가 부끄러웠다. 나아가 미래 의 일꾼이며 어머니, 아내가 될 우리들의 어린 딸들을 건강하고 밝게 키우지 못하고 파렴치 한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게 만든 우리 사회가 부끄러웠다. 그것도 한 동네 잘 아는 할아버 지, 아저씨, 오빠 모두가 사람 아닌 짐승으로 변한 기괴한 현실 앞에서 우리 어른들은 어린 딸에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고 아픈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다.

이런 사건이 커지면 집집마다 부모들은 내 딸 단속하느라 비상이 걸린다. 늦게 다니지 말라.
야한 옷 입지 말라 등 개인수준의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들의 잔소리는 성폭력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반영하고 있다. 아들에 대한 격정보다는 딸에 대한 걱정이 더 많다. 여자로서의 자신의 경험으로나 세상 돌아가는 세태가 딸에게 '훨씬 더 험한 세상'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강간은 폭력이 아니라 조금 난폭한 성관계쯤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의외 로 많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야한 옷차림새와 행동이 남자들의 성충동을 유발하여 성폭 력이 일어난다며 여자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가난한 소녀 가장이 야한 옷으로 아저씨들을 유혹했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했겠는가?

강간범은 정신이상자도 아니고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회인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번 성 폭력 사건은 현재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문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남자는 욕망을 언제 어디에다 풀어놓아도 된다는 무절제한 성 의식이 이러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른 것이다.

십여 년 전 여성의 전화에서 남편에게 매맞는 아내를 위한 상담을 하면서 당시 사회의 무관 심 속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아내폭력 실상에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온 몸에 피멍이 들고 코뼈가 부러지고 다리와 갈비뼈가 부러진 매맞는 아내들을 보면서 '세상에! 자기와 함 께 살고 있는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가 있나?'라는 한탄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이 들 남편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멀쩡한 남자들이라는 데에 한번 더 놀랐다. 당시 일 본의 상담사례 중에는 친부에 의한 근친강간사례가 있었는데 그런 패륜적인 사건들이 우리 사회와는 무관한 희한한 사건으로 생각했었는데 요즈음 한국에서도 같은 사건이 사회표면으 로 떠오르고 있음을 본다.

상담통계에 의하면 약 45%에 이르는 가정주부들이 남편에 의해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 으면 가정파괴 성폭력, 직장과 사회에서 빈발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성추행과 성희롱, 아산 의 집단 어린이 성폭력, 일본군의 강제적인 군위안부 징발 등의 사건들이 각각 다른 사건이 면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 특징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사건의 범죄 주대상이 여성이란 점에서 보면 경중에 관계없이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나는 일직선상에 모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인과의 이치로 따져보면 이 죄를 어떻게 다 받으려고 그런 못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내구타를 일삼는 아버지도, 외도와 성희롱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하는 아버지도 내 딸만 큼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남의 딸을 성희롱하면서 내 딸이 직장과 사회에서 또 다른 아버지와 오 빠의 성희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험한 세상'을 탓하면서 내 딸과 내 아내는 험한 세상속에서 안전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나는 '바담풍'을 하더라도 너는 '바람풍'이라고 바르게 발음해야 한다고 윽박지른다. 애시당초 모델이 잘못되었는데 없는 모델을 보고 어떻게 배울 수 있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사회와 개인 모두가 새로운 성문화를 만들어 내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때 '맹모삼천'이란 말을 자주 인용한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아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고 보고 듣고 모델이 좋아야 그대로 따라 배운다는 뜻일 것이다.

딸의 행복을 바란다면 특히 결혼 후 건전한 가정과 행복한 부부가 되기를 바란다면 딸의 귀 가시간 못지 않게 아들의 귀가시간도 함께 신경을 써야 한다. 딸을 가진 모든 부모들은 동 시에 아들을 함께 가진 부모들이지만, 아들을 가진 부모들이 가부장 사회의 아들로 키울 것 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키워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험하디 험한 세 상을 살아오면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그립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