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불교 생활] 당신의 삶으로 증명하세요

2020-10-29     원제 스님

| 아카데미 4관왕의 영예 봉준호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부문에서 유력 후보로 올랐을 때, 늦은 밤 컴퓨터 앞에서 시상식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팬이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고등학생이던 1995년, 그가 찍은 단편영화 <지리멸렬>을 처음으로 본 이후 그의 모든 영화를 섭렵했습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수상 소식은 시상식 다음 날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온 나라가 흥분했습니다.

시상식 중 무척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이 감독상 코멘트를 할 때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 공부할 때 늘 가슴에 새긴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바로….”

봉 감독이 한쪽으로 손을 뻗치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위대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께서 해주신 말입니다.”

그러자 카메라들이 일제히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으로 향했습니다. 봉 감독의 코멘트가 끝나자 시상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기립박수를 보냈고,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울컥거리며 감동했습니다. 그런 노장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났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을 존경한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수상의 순간 세계적인 거장에게 표한 오마주는 봉 감독 스스로에겐 영광이,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는 가슴 벅찬 감동이 됐습니다.

이후 <기생충>이 아카데미 최고의 영광인 작품상까지 받으면서 모든 관계자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영화 제작자인 곽신애 대표가 수상 소감을 말했습니다. 곽 대표의 소감이 끝나자 무대에 선 모든 사람이 한 자그마한 여성을 중앙으로 이끌었습니다. 필자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곽신애 대표의 코멘트로 수상 소감이 마무리됐다고 생각한 주최 측에서도 무대 중앙 라이트를 꺼버렸습니다. 그러자 시상식에 모인 사람들이 불을 켜라며 일제히 ‘Up!’을 외쳤습니다. 코멘트를 이어간 사람은 영화 배급사 대표인 CJ 이미경 부회장으로, 영화 제작에 거액을 투자한 인물이었습니다.

 

| 영화판 개선한 예술가와 자본가의 협업

영화 <기생충>은 블록버스터가 아님에도 무려 150억 원의 제작비가 들었습니다. 제작진들의 임금을 올리고 표준 근로 계약을 준수했기 때문입니다. 또 아역배우를 보호하기 위해 추가로 제작비를 투여해 CGI(컴퓨터 그래픽 이미지) 작업과 추가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야간 촬영이 많았는데 아역배우가 일찍 잘 수 있도록 배우들과 촬영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촬영 일정도 길어졌습니다. 필자는 주변에 영화판에 속한 사람들이 있어서 영화 촬영 현장 분위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촬영이 길어질수록 영화 제작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배우와 스태프들은 최대한 짧은 시일 내에 촬영을 마치려고 고군분투합니다.

영화는 여러 사람의 노력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공동의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입니다. 자금 지원이 넉넉해야만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고, 영화를 만드는 작업 환경의 수준을 높일 수 있습니다. 영화 작업 현장의 대부분은 봉준호 감독이 한 것처럼 표준 근로 계약을 준수하고, 아역배우를 보호하기 위해 스케줄을 조정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늘 자금 문제로 허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봉준호 감독은 영화 현장의 노동 복지나 아역배우 보호를 주장했고, 이미경 부회장은 자금 손실에도 불구하고 감독을 믿고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영화 <기생충>은 독창적이고 사려 깊은 예술가와 이 예술가의 안목과 역량을 믿어준 자본가가 협업해 이루어낸 훌륭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봉준호 감독이 아니었다면 영화판에서의 복지가 실현될 수 있었을까. 물론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노고와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탄생에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작가이자 감독인 봉준호라는 사람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 봉준호 감독 이전에도 많은 사람이 영화판의 환경 개선을 주장했습니다. 표준 근로 계약서를 준수하고 배우와 스태프의 복지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정당한 견해였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현실로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이를 봉준호 감독이 해냈습니다. 결실의 배경에는 봉준호 감독의 역량과 끈기가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쌓고 다져온 역량과 끈기 말입니다.

 

| 백천 가지의 주장보다 위대한 증명

역량과 끈기는 영화판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하고 진리를 구한다는 도판(道判)에서도 역량과 끈기가 필요합니다. 수행이 보편화한 지금 이미 많은 사람이 도(道)나 진리, 삶에 대한 선의나 정견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이나 SNS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이러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위 깨달음의 민주화 시대가 펼쳐진 것입니다. 하지만 선의와 정견을 현실로 이룰 충분한 역량과 끈기를 갖추는 것은 이와 별개입니다. 말은 언제나 바르게 할 수 있고, 주장은 늘 합리적입니다. 문제는 이를 현실에서 구현해낼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내용의 주장과 방향이라도,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터전에서 입증되지 않으면 한낱 말의 잔치로만 끝나버리게 됩니다.

필자는 봉준호 감독을 존경합니다. 입바른 소리를 하거나 올바른 견해를 주장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수십 년의 노력 끝에 본인의 역량과 끈기를 영화라는 결과로서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영화감독이 영화로 입증한다면, 수행자는 삶으로 증명합니다. 그럴듯한 견해와 주장만 갖추는 것과 본인의 역량과 끈기로 삶에서 실제 결과를 일구어내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견해와 주장은 누구든 갖출 수 있고 어떻게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량과 끈기를 가지고 삶이라는 결과물로 입증해내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간혹 수행은 이렇게 해야 하고, 한국불교는 이러한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 대부분은 남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혹은 바깥 조직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운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며 주장입니다. 판단은 본인이 하고, 실행은 바깥 대상으로 미루는 전형적인 불일치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말로써 주장을 펼치고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설득이나 감화는 삶으로 증명됩니다. 삶이 이미 그러하다면, 우리는 말 없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견해와 주장의 말 잔치가 본인의 삶보다 앞서는 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돌직구를 던지기도 합니다.

“백천 가지의 주장은 그만두시고, 이제 당신의 삶으로 증명하세요. 자신의 삶보다 확실하고 위대한 증명은 없습니다.”

삶으로 증명해야만, 그렇게 삶으로서 제대로 살아가야만, 진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