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허 찌른 언어유희 너머 ‘찐(眞) 히어로’ 그리다

불광 줌人 | 그림왕양치기 작가 양경수

2020-10-28     불광미디어

2016년이 시작되던 겨울 어느 날, 양경수 작가를 처음 만났다. ‘새로운 붓다의 탄생’이라는 주제로 양경수 작가를 취재했는데, 붓다를 ‘히어로(hero)’의 모습으로 표현한 그의 그림이 꽤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홍대 클럽에서 디제잉을 하는 붓다라니-팔상도(八相圖)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양경수 작가의 작품 <붓다, 히어로의 일생> 중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의 무대가 된 곳이 바로 클럽이다. 그 발칙한 발상에 한동안 매료됐다. 그리고 그해 가을, TV에서 양경수 작가를 보았다. 어느새 그는 대한민국 회사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기 작가가 되어 있었다.

 

사진. 유동영

 

| 사람이 선물하는 상상의 시간

말이 잘 안 나오고 매사에 의욕도 없고, 혼자 있고 싶다는 환자에게 의사가 말한다.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 양경수 작가는 책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으로 대한민국 모든 ‘갑’들에게 사이다 같은 한 방을 날렸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이 흘러 2020년 양 작가를 다시 만났다. 한 명의 인터뷰이를 두 번 취재한 경우는 처음이라 그간의 변화가 궁금했다.

“그동안 책도 내고 웹툰도 그리고, 강연도 하면서 많은 분의 사랑을 받았죠. 4년 전과는 삶이 많이 달라졌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예요.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외부 일정은 거의 최소가 되었지만, 기업이나 지자체 광고 작업을 하면서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양경수 작가의 책이나 웹툰을 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특유의 언어유희와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 웃고 즐기는 사이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양 작가만의 전매특허다. 직장생활을 해본 적 없는 작가가 어떻게 직장인들의 마음을 꿰뚫어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직장생활을 해본 적은 없지만 20대 때부터 일을 많이 했고, 그때마다 저는 늘 ‘을’의 입장이었거든요. 그래서 직장인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 친구들에게서 영감을 받기도 했어요. 홍대 클럽에서 레게머리하고 음악 얘기, 이성 얘기하며 놀던 친구들이 회사에 들어가더니 만나면 직장 상사 얘기만 하는 거예요. 그 친구들에게서 소재를 많이 얻었죠.”

‘어릴 땐 동자, 지금은 노동자’, ‘빚이 많아 Busy’ 등 양경수 작가의 글에는 랩 가사 같은 리듬감과 라임이 살아있는데, 이 또한 래퍼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레 습득된 것이라 한다. 본인 스스로 사교적인 성격이라 말하는 양 작가에게 ‘사람’은 영감을 주는 존재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주는 귀한 존재들이다.

“젊은 불자들의 모임인 ‘Young108’에서 활동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됐어요. 그전에는 같은 분야의 또래 친구들만 주로 만났다면, ‘Young108’ 모임을 통해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면서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됐죠. 웹툰 <잡JOP다多한 컷>을 그리면서 간호사, 은행원, 사회복지사 등의 직업인들을 인터뷰했었는데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최근엔 개그맨들과 친해져서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도움을 얻고 있어요.”

직장인들의 애환을 대변하는 양 작가의 그림.

개그맨 이야기가 나오니 언젠가 MBC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개그맨 박나래 씨 집에 양경수 작가의 작품이 걸려있던 것이 기억났다. 앞서 말한 클럽에서 디제잉하며 설법하는 붓다 그림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한 컷이었지만 단번에 그의 그림임을 알아봤다.

“박나래 씨가 디제잉도 하잖아요. 친해져서 제가 선물했어요. ‘나래바(Bar)’에 놀러 간 적이 있거든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양 작가에게 상상의 시간을 선물한다. 나름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관찰하고 상상하다 보면 그림 한 컷, 이야기 하나가 완성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이 대략 600컷 이상 된다고 하니 그 그림들 속에 양 작가가 만난 사람들과 그 시간의 숨결이 함께 녹아있지 않을까.

“예전에는 한쪽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봤다면, 나이가 들면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소위 ‘꼰대’라고 불리는, 직장 상사의 부조리함을 비트는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최근 들어 반대로 상사들이 오히려 약자가 되는 경우도 보게 되고…. 예전에는 약자로 지칭되는 특정 부류가 있었는데, 요즘은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예전 같은 그림은 못 그리겠더라고요. 조금씩 다른 방향을 찾는 중이에요.”

그런 변화 중의 하나로, 최근 광복절을 즈음하여 양 작가의 새 책, 『대한독립, 평범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가 출간됐다.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른 선조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복원한 작업이었다.

“영화 <암살>이나 <밀정>,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등 작품으로만 독립운동가와 의병 이야기를 접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든 수감자 카드를 직접 보고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자신의 삶을 지키며 살아가던 평범한 우리 이웃 같은 사람들이었죠. 모진 고문으로 피폐해진 그분들의 사진 속 모습을 평화로운 시대의 삶을 누리는 모습으로 복원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번 작업을 하며 학창 시절에도 안했던 역사 공부를 제대로 했다는 양 작가. 그래서 그런지 한 분 한 분의 모습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우리가 익히 아는 독립운동가들 보다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훨씬 많아요. 수감자 카드를 보면 강완주라는 분이 있는데, ‘양주군 부평리 봉선사 스님’으로 기록돼 있어요. 봉선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비밀리에 선언문을 만들어 민가에 배포하다가 붙잡혀 서대문형무소로 오게 됐다고 해요. 1903년 당시 18세 여학생이던 한수자라는 분은 3·1운동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수감됐는데, 책이 나오고 이분의 증손자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할머니를 멋있게 그려주셔서 감사하다고…. 저도 뭉클하고 감사했어요.”

독립운동가도 평범한 우리 이웃이었다.

 

| ‘진짜’를 찾아가는 여정

불교미술로 시작해 회사원들의 마음에 공감하는 웹툰,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복원하는 작업까지…. 작가로서 소재와 주제를 넘나드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 중심엔 불교가 자리하고 있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닌, 부처님 가르침 그 자체를 나침반 삼아 삶을 살고 있다는 양 작가. 그의 작업은 자신의 재능을 세상과 나누는 소중한 기회이자 자신을 돌아보는 수행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20대 때는 고생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수입이 많아진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능력 이상의 욕심을 내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됐어요. 최선을 다해보니 제 그릇의 크기를 알겠더라고요. 장기적으로 작업을 하려면 제 그릇에 맞게 욕심을 내려놓고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아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겠죠.”

다음 작품으로 양 작가는 최인영 수의사와 함께 『개스트셀러』(가제)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반려견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Q&A 형식으로 알려주는 책이라고 한다. 2년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다는 반려견 루피가 인터뷰 내내 옆에서 가만히 양 작가를 응원하고 있었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가족, 루피가 요즘 양 작가의 기쁨 중 하나란다.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로서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불교가 매력적으로 다가와요. 티베트불교, 선불교 등 불교 문화권마다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 다르거든요. 예술로서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진짜’를 찾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진짜’를 찾아가는 여정 속, 양경수 작가가 그려낼 붓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그가 만들어낼 ‘찐(眞) 히어로’의 모습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