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영의 선경(禪景)] 백성의 나라 용왕의 땅, 감포

왕이 머물다 문무왕릉·감은사지 그리고

2020-11-16     유동영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또 옆에 굴을 판다. 재물을 쓰고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장례는 역사에 꾸짖음만 있을 뿐 사람의 넋을 구원하지 못한다. 죽고 나서 10일 뒤에 곧 도성 밖 뜰에서 인도의 의식에 따라 화장을 하라.”

-『삼국사기』 권7 문무왕의 유언의 일부 의역
 
서기 681년 음력 7월 1일 문무왕은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의 침략을 물리치는 등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그의 파란만장한 이승의 삶이 다한 것이다. 살아생전 지의 대사를 볼 때마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말을 해 온 왕의 유지에 따라 감포 대왕암에 유골이 뿌려졌다.

 

태풍의 중심은 벌써 북으로 올라가 멀어졌지만 바람은 여전히 땅위의 모든 것들을 휘청거리게 했다. 밤새 휘몰아친 바람에 대체 어느 곳까지 전기가 끊겼는지 도로의 신호등과 전화기도 먹통이 됐다. 바로 옆에 원자력 발전소와 수력원자력 본사가 있으나 사나운 바람 앞에서는 무력했다. 대왕암을 향한 삼각대 위의 카메라는 말할 것도 없다. 한 컷을 찍고 난 뒤 다음 컷부터는 화면이 틀어졌고, 저 멀리 있던 파도가 어느새 몰려와 발목을 타고 넘으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게 어려웠다. 

대왕릉이 높은 파도에 수없이 사라지고 있는 한 편으로, 두터운 구름에 진하게 스민 여명은 맑고 아름답기가 그지없어서, 금방이라도 해수관음이 구름 사이로 나툰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만파식적! 동해에 피리가 울리자 사납던 바람도 거친 파도도 정체 없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숲은 온통 갈갈이 찢겨 힘겨운데 바다는 평온 했던 모습 그대로라니. 갈매기는 떼 지어 날고 무속인들은 왕릉과 해를 향해 기도한다.

 

감은사 터를 잡은 이는 문무왕 자신이다. 그래서 감은사를 문무대왕릉의 능사로 본다. 문무왕은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대왕암을 자신의 묘자리로 잡고 가끔 이곳 감은사지에 들러 묵었다 한다. 지금과는 다르게 예전에는 바닷물이 감은사지 아래까지 찬 것으로 보아 대왕암까지 접근이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묘자리를 미리 그곳에 잡은 것은 삼국통일을 위해 사명을 다한 지도자의 나라와 백성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엿보게 한다.  

 

용왕이 된 왕은 왕릉에서 금당까지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야 했다. 아들 신문왕은 금당의 섬돌 위에 장대돌을 놓아 공간을 두고 동쪽으로 구멍을 냈다. 감은사지 탑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탑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클뿐더러 처음으로 돌못을 사용함으로써 통일 신라 석탑의 전형을 만들었다. 돌못 사용은 삼국을 통일한 뒤 합류한 백제의 유민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감은사지로부터 대종천을 따라 토함산 방향으로 약 20여 분을 달리면 장항리사지가 있다. 금당 자리에 대좌가 남아 있으며 동·서 탑으로 불리는 탑신에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금강역사상이 부조돼 있다. 일제 때 사리함을 노린 도굴꾼들에 의해 폭파 되는 수난을 겪고 복원됐으나, 동탑은 지반 붕괴로 계곡 아래에 흩어져 탑신을 잃고 겨우 현재의 모습으로 수습됐다. 동탑은 본래 금당의 좌측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조각나 있던 불상은 복원돼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다. 절 터는 그리 크지 않으나 탑의 크기나 금강역사상의 조형미로 보아 예사로운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직 이름을 찾지는 못했다. 

상상한다. 감은사에 들른 용왕은 대종천을 타고 장항리까지 그리고 다시 토함산의 석굴암에 이른다. 흔적 없이 가고자 했던 왕은 역설적이게도 부활해 국운을 이끄는 만파식적을 울리고 있다. 

 

글·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