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소통이 진부한 이들을 위한 ‘찐 소통’

붓다 빅 퀘스천 | 에디터’s pick 리뷰(3) | 소통

2020-11-20     허진

소통? 진부한 주제다. 내용? ‘나를 이해해야 한다’, ‘상식대로 살아야 한다’,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 단 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도 추천하는 이유는 이 뻔한 내용을 뻔하지 않게 풀어내는 이야기꾼 강사진들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있다. 강연이 끝나면 다이어트에 집착했던 나를, 자식을 닦달했던 나를, 노숙자를 피했던 나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 무지를 인정하면 보이는 것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나를 알기는 쉽지 않다. 내가 말하는 나의 이야기는 언어의 한계로 왜곡되며, 생각하는 시점, 듣는 사람에 따라서도 계속 변한다. 조금이나마 나에 대해 알아냈다고 해도 그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부여된 역할과 기대로 ‘조건 지어진’ 모습, 즉 내면화된 타자의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결국 ‘나’라는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존재다. 그럼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나는 도대체 누굴까?

명법 스님은 수수께끼를 풀 열쇠로 ‘무지(無知)의 지(知)’를 제시했다(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은 사실 ‘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완벽하지 않은 나를 배려하고 이해하게 된다는 것. 나에 대한 배려와 이해는 곧 내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인에 대한 이해로까지 확장된다.

“타인의 시선, 보편적 관점에서 벗어나 내 몸을, 내 시간을, 내 생각을 배려하고 살피면서 써 내려가는 나의 이야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요. 나는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든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습니다.”

 

| 너에 의지해 존재하는 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강조되는 사회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서로 다르기만 한 걸까? 도법 스님은 70억 인구가 지구별이란 한배를 타고 있으며 그물의 그물코처럼 전부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너’와 ‘나’는 마치 한 몸의 왼손과 오른손처럼 ‘일심동체’라는 것. 이 근원적 진실을 토대로 소통해야 갈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게 도법 스님 생각이다.

“‘너’에 의지해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나만 사는 길, 나만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이어 도법 스님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 혼란, 고통, 불행 등에 대해 우리가 상식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진단하며 상식의 길을 걸으라고 당부했다. 도법 스님이 생각하는 상식의 길은 ‘중도’다. 중도란 함께 이야기 나누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적용하면 바로 실현되며, 잘 이뤄지는지 바로 증명할 수 있는 길이다.

“부모가 자식의 학교 성적에 아쉬워하는 대신 자식이 건강하게 살아있음에 고마워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상식대로 살면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여기, 지옥에서 연꽃을 피우는 방법

이 세상은 지옥이다. 행복은 내가 널 위하고 너도 나를 위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신기루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비의 마음은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생긴다.

우리는 자본가가 자비를 행하기 어려운, 혹은 어렵다는 핑계로 자비를 행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기업은 불경기에 정리해고를 단행하지, 손해를 감수하면서(이익을 포기하면서)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강한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는 이 지옥 같은 곳에 불교는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강신주는 자비의 힘이 압도적으로 커져서 자본의 힘을 누그러트리길 바란다며 그만의 행복론을 펼쳤다.

“세상에는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한 ‘유치한 행복’과 사랑하는 이에게 내 것을 덜어줄 때 행복한 ‘무소유의 행복’ 두 가지 행복이 있습니다. 지옥에 빠진 사람은 첫 번째 행복밖에 모릅니다. 불자 여러분,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 보시합시다. 다 들어내면 맑은 물이 차오르는 우물처럼 맑아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