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미술 세계] 세계의 중심에 세울 조형 언어의 사리탑

2020-09-24     강우방
<사진 1> 비류수에 배를 띄워 오녀산성의 남동 측면을 바라보다.

우리나라 4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는 100여 기의 고구려 능묘 벽화를 연구해 조형들을 풀어나가다 보니 80%에 해당하는 조형들이 뜻밖에도 만물 생성의 근원을 상징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그 모든 조형을 ‘무늬’ 혹은 ‘문양’이라 치부했고, 필자는 조형을 해독해 영기문(靈氣文)이라 이름 지었다. 고구려 역사와 문화의 개척자 서길수 교수가 인솔하는 고구려유적 답사팀에 합류, 2005년 8월 17일 아침 주몽이 첫 도읍으로 정한 졸본(忽本=홀본)과 홀승골성(忽升骨城, 현재 五女山城)으로 향했다. 졸본의 자취가 남아 있는 환인시(桓因市)에 이르기 전 고검지산성에 올랐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가파른 산을 올라 처음으로 고구려의 견고한 성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100여 개 산성을 거느린 고구려는 축성의 마법사 였다. 성벽 안을 바라보니 짙은 안개 속에 아련한 도원의 세계 같았다. 

 

| 무덤 안에 가득한 소우주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忽本城)은 원래 모습을 잃었으나 홀승골성의 자태는 우람했다. 정상의 편편한 바위 위에 돌로 쌓은 천혜의 성이었다. 비류수에 배를 띄우고 홀승골성의 빼어난 모습을 바라봤다(사진 1).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홀승골성은 최초의 산성이라 내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거의 폐허였다. 그 산성 위에서 내려다본 환인 벌판은 드넓었으나 댐으로 물이 차 있어서 옛 무덤 떼의 장관은 볼 수 없었다. ‘오녀산산성유적관’에서 장군묘 내부 벽화를 보게 되었다. 비록 복제이기는 하나 이 능묘벽화는 고구려의 첫 수도에 있는 고구려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임을 직감했다. 현재 ‘환인 미창구 장군묘 벽화’로 알려져 있다. 장군묘는 환인 지역 부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이지만 어느 왕의 무덤인지 알 수 없다. 무덤 사방 벽과 천정에는 온통 연꽃 모양 벽화가, 천정이 시작되는 곳에는 보주 영기문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벽이 시작되는 부분에는 가는 띠에 기하학적인 용들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었다(사진 2).

사진 2  홀본 장군묘 벽화 복제 내부. 

연꽃 모양 벽화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채색 분석하니 연꽃 모양은 이중의 보주를 중심으로 아래로 제2 영기싹이, 중층의 제1 영기싹이 보주에서 나와 양쪽으로 뻗치고 있었다. 그 위로 연꽃잎 모양이 있으나 자세히 보면 연꽃이 아니다(그림 1). 가운데 잎에서 보주를 최초로 조형적으로 표현한 육면체 모양이 보인다. 무본당(務本堂) 아카데미에서 요즘 보주가 동북아 전체에서 최초로 조형적으로 표현되고 전개하여 가는 양상을 강의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보주는 연잎 모양 사이사이로 뾰족한 잎이 나오는 사이사이에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장군묘 벽화의 연꽃 모양 조형의 주제는 ‘보주의 확산’이다. 

그다음 천정이 시작되는 부분에 역시 처음 보는 조형이 있다. 채색 분석하니 역시 보주의 생성과정을 보인다. 역시 보주 최초의 표현인 정육면체인 모양이 변형되어 두 군데 보이지 않는가(그림 2). 이런 조형도 처음 본다. 그다음 벽면이 시작되는 맨 윗부분에 가는 띠 모양에 매우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무늬들이 빼곡히 있다. 한눈에 매우 낯선 기하학적 무늬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그때는 채색 분석을 하면 알아낼 수 있다. 분석하니 두 용이 마주 보며 얽혀 있는 형상이다(그림 3). 다리에 발톱도 있고 머리에는 두 뿔도 있으며 눈 표현도 있다. 두 용 사이에 보주가 있어야 하지만 처음 보는 보주의 조형이어서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지만 매우 기이한 조형이다. 

(왼쪽부터)<그림 1> 벽화 = 연꽃모양만 하나를 크게 채색분석. <그림 2> 벽화 = 보주 영기문, 채색분석. <그림 3>벽화 = 기하학적 용의 채색분석.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는 까닭은 이 벽화가 고구려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형들이기 때문이다. 무덤 내부 벽과 천정을 이처럼 보주를 상징하는 갖가지 조형들로 가득 채워, 사찰건축과 마찬가지로 무덤이라는 소우주에 가득 찬 보주를 상징하고 있다. 대우주에도 보주가 가득 차 있다. 이른바 ‘우보(雨寶)’라는 『화엄경』의 말, 즉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은 이를 두고 하는 것이다. 우보는 감로수여서 중생에게 현세적 이익을 주려는 뜻이 아니라, 매우 고차원적인 의미로 하늘에 내리는 빗방울만큼 우주에 충만한 많은 보주라는 장엄함을 가리킨다.

 

| 고구려의 중심, 옴팔로스에 호태왕 비석

두 번째 수도인 통구(通溝) 평야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폐허를 거닐 때도 가슴 벅찼다. 환인에서 국내성을 거치며 통구와 환도 산성 아래에 수많은 능묘벽화가 많지만, 모두 철저히 봉인되어 볼 수 없었다. 비록 들어간다고 해도 어둡고 허용된 시간이 짧아서 올바로 보지 못한다고 했다. 대신 집안 지역의 박물관에서 귀한 기와를 보았다. 집안 환도성 출토인 추녀마루 기와의 위에 두는 망새 기와(사진 3)다. 세계에서 망새 기와를 최초로 만든 나라는 고구려다. 망새 기와임을 확인하고 매우 흥분되었다. 사찰건축에서 기와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커서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용의 정면(그림 4)을 새기지 않았는가. 채색 분석해보니 전체가 보주와 영기문으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귀면(鬼面)이라고 혹은 도깨비라고 부를 것인가. 부처님이 귀신의 입에서 화생한다고 말할 것인가! 사진은 열악한 현장 사정으로 유리장에 반사되어 좋지는 않으나 그대로 싣는다. 

<사진 3> 환도성 출토 = 추녀마루기와 망새기와 = 고구려(좌). <그림 4>  용의 얼굴.

국내성의 산성인 환도산성에 이르러 성벽과 그 앞에 전개된 거대한 무덤 떼는 장관을 이루고 있다. 총 1,582기라고 한다. 벽화들이 있는 능묘들이 많으나 볼 수는 없었다. 광개토대왕비(사진 4)는 이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 중심에 자리 잡은 세계 최고 최대 비석이다, 이 우람한 비석은 암석 신앙의 기념비적 존재다. 이렇게 육면체 모양의 거대한 자연석을 어디에서 구했는가. 거대한 암석의 네 면에 손을 조금도 대지 않은 자연석 상태에서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새겨 놓았다. 그렇다면 이런 육면체 암석을 보주로 인식했던가. 

<사진 4>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는 ‘옴팔로스’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스 문화도시 델포이에는 아폴론 신전이 있는데, 아폴론 신전을 대표하는 게 신전에 있는 ‘옴팔로스(대지의 배꼽)’라는 작은 구멍이다. 이 배꼽자리에 ‘옴팔로스’라는 대리석 둥근 돌이 놓여 있는데, 그 돌이 무량보주를 나타낸 것임을 알고 급히 달려가다가 발목이 삐었던 일이 떠올랐다. 

광개토대왕비는 세계의 중심, 옴팔로스에 우뚝 선 비석은 고구려의 야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높이는 6.4m이지만, 땅 밑에 묻힌 부분을 고려하면 거의 10m에 이를 것이다. 이 자연 거석은 광개토대왕의 모습이자 고구려, 더 나아가 한국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 부근에는 광개토대왕릉인 태왕릉, 장수왕릉으로 짐작되는 장군총 등 우람한 능묘들이 많았다. 능묘 주인은 학자마다 달리 보지만, 일단 중론을 따르기로 했다. 태왕릉에서는 ‘태왕릉이 산악처럼 편안하고 견고하기를 바란다[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라고 새겨진 벽돌이 발견됐고, ‘신묘년호태왕○조령구육(辛卯年好太王○造鈴九六)’이 새겨진 청동방울도 발견돼 태왕릉이라 부르고 있다. 호태왕이라고 부르기도 하므로 광개토대왕릉이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통구란 말은 집안 지역보다 더 넓은 범위의 통구 평야를 가리킨다. 집안을 포함한 통구 평야에는 환문총(環紋塚), 통구 1호분, 사신총(四神塚), 장천 1호분, 삼실총(三室塚), 무용총(舞踊塚), 각저총(角觝塚), 귀갑총(龜甲塚), 산연화총(散蓮花塚), 모두루총(牟頭婁塚), 산성하(山城下) 332호분, 산성하 983호분, 마선구(痲線泃) 제1호분, 오회분(五塊墳) 제4호분, 오회분 제5호분…. 

앞서 나열한 능묘벽화는 환인 지역으로부터 전승된 벽화 양식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환인 미창구 장군묘 벽화를 특별히 채색 분석해 실은 것이다. 집안 지역 장천 1호분이나 산연화총, 무용총 등에서도 환인 미창구 장군묘의 벽화처럼 벽면을 연꽃 모양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천정 구조도 북방 돈황 석굴 벽화와 유사하다. 집안 지역 능묘벽화는 북방지역의 영향이 크며, 황해도 안악 지역의 능묘벽화는 중국의 영향이 짙다. 평양 지역 능묘벽화는 양쪽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독자적 양식을 띠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고구려 능묘벽화에 대한 저서를 어떻게 출간할 것인지, 그동안 눈앞의 어지러운 안개가 걷히고 목표와 방향이 분명해졌다.

 

| 세계미술사 정립을 위한 서장

고구려유적 답사에서 백두산 천지(사진 5)에 다다른 것은 아침 9시였다. 오르기 시작할 때는 바람도 차서 솜옷을 입고 올랐지만, 정상에 다다르니 바람과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신령스럽고 신비로운 천지는 우리에게 무슨 화두를 던지고 있는가. 처음 섰던 그 자리에 오후 1시까지 꼼짝 않고 천지를 응시했다. 문득 파란 하늘에 반짝이는 하얀 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하얀 나비들이었다. 만일 영혼에 형태가 있다면 저런 반짝이는 흰 나비일 것이리라. 이곳이 바로 신전이라고 수첩에 적었고, “내 반드시 이루리라”고 적었다. 그 서원대로 지금 모든 것을 성취했다. 곧 출간할 『세계미술, 용으로 풀다』라는 저서가 증명할 것이다. 

<사진 5>  백두산 천지.

고구려유적 답사 열흘 동안 간단히 기록한 일지 마지막 장에는 백두산에서 가져온 네 잎 클로버가 있다. 아마도 네 잎 클로버가 그 이후의 삶에 행운을 갖다 준 것 같다. 그리고 2007년 마침내 세계를 변화시키리라고 인쇄소 윤전기 앞에서 중얼거렸던 책, 『한국미술의 탄생, 세계미술사 정립을 위한 서장(序章)』이 탄생했다.

글·사진 강우방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