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크리트로 배우는 불교] 금강경(2) 경명에 관한 이야기

2020-09-30     전순환

『금강경』이란 경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이 경전의 완전하고도 정확한 경명은 아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보리류지(菩提流支), 진제(真諦)의 한역본들에서 볼 수 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도 아니다. 그 이후 달마급다(達磨笈多), 현장(玄奘), 의정(義浄)의 한역본들이 보여주는 『금강능단-반야바라밀다-경』,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 『불설-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1 지난 호에 소개한 뮬러(Müller) 계열의 범본들의 경명에도 ‘금강(金剛)’의 와즈라(vajra)와 ‘능단(能断)’의 체다(CHED-a)가 결합한 산스크리트 표현, 와즈라-체디카(vajra=chedikā)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 각 한역의 대상이 어떤 범본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단서 조항이 붙긴 하지만 말이다. 

경전이든 노래나 영화 그 어떤 장르든 각각에 부여된 원제목은 내용의 전반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다. 그렇다면 원래 제목에서 ‘능단’이나 ‘반야바라밀다’란 표현이 빠져 있는 『금강-경』 또는 Diamond Sutra란 명칭의 사용은 자칫 전체적인 내용의 초점이나 흐름을 잘못 파악하게 이끌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반야부의 다른 경전들처럼 이 경전에서도 중심은 반야-바라밀다(prajñā=pāramitā)이며, 능단-금강은 이를 수식하는 형용사로서 단순 직역하면 ‘금강을 능히 절단하는’이 된다. 

1  보리류지의 한역본(509년)에는 2종(T236a, T236b)이 있다. 현장 또한 본 경전을 648년에 2회에 걸쳐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본문의 『能断金剛般若波羅蜜多経』이 첫 번째 번역이며, 이 한역은 동경홍교서원(東京弘教書院) 『大日本校訂 大藏経』(縮刷藏本, 1880~1885年)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진 두 번째 한역은 『能断金剛分』(T. 220(9))이다. 

 

| 경명의 유래

이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득 ‘능단-금강’이란 수식어가 왜 어떻게 이 경전에 붙여진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전문 서적들을 찾아보고 여기저기 인터넷 검색을 한동안 해보았지만, 의문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서인지, 아직 그 유래에 관한 문제 자체가 제기된 적도 없었다는 것이 현재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능단-금강’이란 표현은 본 경전을 이해하는 데 ‘반야바라밀다’ 다음으로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정답에도 해답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필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의 범본과 한역본 대조 작업을 하면서 찾은 몇 가지 실마리들을 통해 ‘능단-금강’, 특히 ‘금강’이란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범본에서의 금강  ‘금강’과 관련 의문을 갖게 만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6세기에 기록되었다는 바미얀(Bamiyan)의 범본이 경명 없이 바로 경배 문구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 범본의 산스크리트 경명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는 아마도 사본에 쓰인 문자가 해독되고 그 내용이 파악된 후-일본과 중국 등의 사본들에 토대하여 편집되었기에 한역본들의 영향을 받은-뮬러 계열의 범본들에 따라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경명의 누락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적어도 본문에는 ‘금강’을 뜻하는 vajra가 등장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검색했지만, 지난 글에 언급한 6종의 모든 범본에서 이 단어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누락이나 문서 훼손의 문제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vajra란 용어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해주는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한역본에서의 금강  그렇다면 한역본들에서의 상황은 어떠할까? 구마라집, 보리류지, 현장의 역본들은 단 1회이지만 경명 키워드 ‘금강’이 포함된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과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를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등장하는 위치는 13장의 처음 다섯 개의 문구이며, 이는 수보리 장로가 법문의 명칭을 묻고 세존이 이에 답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같은 장소에서 진제와 달마급다의 역본들은 묘하게도 각각 ‘금강-능단’이 빠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 능단피안도(智慧彼岸到)를 보여준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가 현존하는 범본들을 단어와 문장의 단위로 대조한 결과, 특정 단어나 문구의 가감(加減)은 있어도 범본 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범본들을 한역본들과 비교해 보아도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13장의 해당 산스크리트 문구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생겼다. 

 

범본과 한역본의 비교  다행히도 이 문구들에서 뮬러 계열의 편집된 범본들, 그리고 투르케스탄과 바미얀에서 발견된 범본들이 훼손 없이 거의 100%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가 편집하고 번역한 이 부분을 한역들과 함께 소개해본다.

evam․ukte․Āyuṣmān․Subhūtiḥ․Bhagavantam․etat․avocat | kaḥ․nāma․ayam․Bhagavan․Dharmaparyāyaḥ | katham․ca․enam․dhārayāmi | evam․ukte․Bhagavān․Āyuṣmantam․Subhūtim․etat․avocat | Prajñāpāramitā․nāma․ayam․Subhūte․ Dharmaparyāyaḥ | evam․ca․enam․dhāraya |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수보리 장로가 세존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 “세존이시여, 이 법문은 어떻게 불리는 것입니까? | 그리고 이 법문을 어떻게 마음에 새겨야 합니까?” | 이와 같이 여쭙자, 세존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 수보리야, 이 법문은 반야바라밀다라고 불리는 것이며, | 이와 같은 (명칭의)법문을 마음에 새기도록 하여라!” | 

구마라집(T235)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當何名此經?我等云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名為 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보리류지(T236b) 淨命須菩提白佛言: 「世尊!如是經典名號云何?我等云何奉持?」 佛告須菩提:「此經名 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진제(T237) 淨命須菩提白佛言: 「世尊!如是經典, 名號云何?我等云何奉持?」 佛告須菩提: 「此經名 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달마급타(T238) 如是語已. 命者善實, 世尊邊如是言: 「何名此, 世尊!法本?云何及如此持我?」 如是語已. 世尊, 命者善實邊如是言: 「智慧彼岸到名, 此, 善實!法本, 如是此持.」 

현장(T220(9)) 說是語已, 具壽善現復白佛言: 「世尊!當何名此法門?我當云何奉持?」 作是語已, 佛告善現言: 「具壽!今此法門名為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 如是名字 汝當奉持.」 (의정의 한역본(T239)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반야바라밀다의 번역  위의 비교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금강’이나 ‘능단-금강’에 해당하는 수식 표현이 범본에 없고, 구마라집은 이 표현을 임의적으로 반야바라밀다에 덧붙였다는 것이다. ‘임의적 덧붙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범본들에서 prajñāpāramitā가 13장에서 2회, 24장과 32장에서 각각 1회, 총 4회 언급되는 상황에서-위 세 명의 역자들 모두가 위의 문구 이후에 나오는 나머지 3회의 반야바라밀다를 묘하게도 수식어 없이 원래대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또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경명의 탄생 

현재 상황에서 볼 때, vajra의 ‘금강’과 cheda의 ‘능단’이란 단어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형용사 vajracchedikā가 prajñāpāramitā를 수식하는 경명은 아마도 구마라집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명칭은 이후 등장하는 보리류지나 현장의 번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구마라집은 아마도 번역 과정에서 본 경전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리기 위해 ‘반야바라밀다’라는 제목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구체적인 수식어가 필요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구마라집은 문제의 vajra와 cheda의 조합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 낸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 이유는 이 두 단어로 구성되는 합성어가 반야부의 모든 범본 경전들에서 검색되지 않고, 오로지 본 경전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법과의 단절  이 질문과 관련하여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해답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실마리가 뮬러 계열의 범본들에서 찾아지는데, 그것은 바로 본 경전의 17장에서 세존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여래의 명칭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대목이다.

01 Tathāgataḥ․iti․Subhūte․Bhūtatathatāyāḥ․etat․Adhivacanam | 02 Tathāgataḥ․iti․ Subhūte․Anutpādadharmatāyāḥ․etat±Adhivacanam | 03 Tathāgataḥ․iti․Subhūte․Dharmocchedasya․etat․Adhivacanam | 04 Tathāgataḥ․iti․Subhūte․Atyantānutpannasya․etat․Adhivacanam | 

“수보리야, ‘여래’라는 이 명칭은 진실한 진여(眞如)〔를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라는 이 명칭은 불생(不生)의 법성(法性)〔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라는 이 명칭은 법과의 단절〔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라는 이 명칭은 절대적 불생자(不生者)〔를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니라.” 

법은 실재하지 않음을, 법은 결코 인식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반야바라밀다. 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본 경전에서는 키워드가 법이고, 참된 수행을 통해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 법과의 결속을 끊어내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구마라집 또한 이와 같은 중심 개념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03의 dharma=uccheda-를 보고, 범부로서는 사실상 질기고도 질겨 끊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dharma를, 인드라(Inrda)가 지녔다고 하며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vajra로 바꾸어 vajra=cheda~ikā-란 수식어를 생각해내지 않았을까?

 

구마라집의 한역본  그런데 문제가 있다. 구마라집의 번역에는 02, 03, 04에 해당되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보리류지. 진제, 의정의 한역본들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위 전체 문구들에 대한 번역은 달마급다와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데, dharmoccheda에 대해 달마급다는 도단(道斷), 현장은 영단도로(永斷道路)로 번역하고 있다. 앞서 단어와 문장의 단위로 현존하는 범본들을 한역본들과 비교해 본 결과, 내용상의 큰 차이는 보이지 않지만 특정 문구들이 빠지거나 더해지는 경우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위의 예시가 바로 그러한 경우들 가운데 하나이다.

뮬러 계열의 범본들과 달리 투르케스탄, 길기트, 바미얀에서 발견된 모든 범본에서 한결같이 02, 03, 04가 훼손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구마라집 계열의 한역은 그 대상이 투르케스탄 등의 범본들이었고, 당시 존재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뮬러가 편집에 바탕을 두었다는 중국이나 티베트의 사본들보다 한참 이전의 것들 또한 참고용으로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달마급다와 현장의 경우는 이와 반대의 상황, 즉 뮬러 계열의 범본들에 선행하는 원본들이 번역의 대상이었고, 투르케스탄 등의 범본들이 참고용으로 사용되었으리라는 추측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경명의 의미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의 경우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영어의 번역으로 볼 때, 하나는 ‘금강’을 ‘반야바라밀다’와 동격으로 보는 ‘The Perfection of Wisdom that Cuts (Dharma) Like a Thunderbolt’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금강과도 같이 (법을) 끊어내는 지혜의 완성’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마라집과 보리류지가 ‘능단’이 빠진 ‘금강’만을 사용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앞선 내용에 따른다면 두 번째 해석인 ‘Vajra Cutter Perfection of Wisdom’, 즉 ‘금강’을 목적격의 ‘다르마’로 보는 ‘금강을 끊어내는 지혜의 완성’이 본 경전에 가장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장의 ‘능단-금강’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삼백송  경명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지난 536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바이댜(Vaidya) 범본의 경명에는 vajracchedikā 외에도 ‘3백개(의 송으)로 구성되는’을 뜻하는 형용사 triśatikā가 하나 더 붙어있다. 완전한 명칭을 소개하면, vajracchedikā․nāma․triśatikā․prajñāpāramitā이고, ‘능단금강으로 불리는 삼백송(三百頌)의 반야바라밀다’로 번역한다. ‘송’은 쉴로카(Śloka)에 해당하는 용어이고, 1쉴로카는 32음절(音節)로 구성되는 4구(句)를 나타낸다. 따라서 300송은 곧 9,600여 개 음절로 구성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단, 텍스트에서 모음과 관련된 외적 산디(external sandhi)가 철저하게 적용된 상태에 한에서다. 

다시 말하면, 예시된 위의 03문장에 있는 dharmocchedasya etat를 예로 들어보면, -a와 e-가 산디의 적용을 받아 하나의 모음 -ai-로 세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이댜가 편집한 텍스트의 음절 개수를 세어보니 1만 2,707이란 숫자가 나왔고, ‘송’으로 환산하여 약 397송이란 계산이 나왔다. 300송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은 바이댜의 편집본의 경우 산디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 스코옌(Schøyen) 범본의 경우 1만 170의 음절 개수와 318송이 나왔기 때문에 바이댜의 범본과 달리 산디가 비교적 잘 적용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다음 어원 여행은 범본 『금강경』에서 이야기하는 법 등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전순환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대학원 졸업.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인도유럽어학과에서 역사비교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시작된 한국연구재단 지원 하에 범본 불전(반야부)을 대상으로 언어자료 DB를 구축하고 있으며, 서울대 언어학과와 연세대 HK 문자연구사업단 문자아카데미 강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팔천송반야경』(불광출판사),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반야바라밀다심경』(지식과 교양),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신묘장구대다라니경』(한국문화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