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로 만나는 선지식] 목숨을 걸어라[立雪斷臂]

혜가(慧可) 대사

2020-09-25     범준 스님

| #1 중국 선불교, 꽃을 피우다

달마의 문하에는 뛰어난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법을 이어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달마는 제자들이 공부한 소견을 점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머지않아 이곳에서의 인연이 다하여 천축국(인도)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스님들은 그동안 각자 수행하여 얻은 바를 말해보시오.”

맨 처음 도부(道副)가 “저는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不執文字], 문자를 벗어나지도 않는 것[不離文字]을 도의 작용으로 삼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달마는 “도부 스님은 나의 피부를 얻은 것이오”라고 답했다. 두 번째 총지(總持)가 “제가 이해한 불법은 아난 존자가 동방의 아축부처님이 계신 세계[阿佛國]를 한 번 보고는 세상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이 불세계(佛世界)의 경지에는 미칠 수 없음을 알고 더는 세속을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달마는 “총지 스님은 나의 살을 얻은 것이오”라고 답했다. 세 번째 도육(道育)이 “사대(四大)가 본래 공성(空性)이라 오온(五蘊)도 없는 것이기에 하나의 법도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無一法可得]”라고 말하자 달마는 “음, 도육 스님은 나의 뼈를 얻은 것이오”라고 답했다. 마지막 혜가(慧可)의 차례가 되었다. 혜가는 어떤 언어도 사용하지 않고 달마 앞으로 나와 스승에게 삼배를 올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혜가의 행위를 지켜보던 달마는 매우 만족하며 “정말 장하시오. 혜가 스님은 나의 골수를 얻은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한자리에 모여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옛날에 부처님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 존자에게 부촉하여 전하고, 그것이 또 전해져서 나에게 이르렀습니다. 나 또한 사명을 이어야 하니 지금 혜가 스님에게 여래심법[如來心法]의 사명을 부촉합니다. 당부하건대 혜가 스님은 마땅히 여래의 정법안장을 잘 보호하고 유지해서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가사를 남겨서 법을 계승한 신표로 삼을 것이니 모두 힘을 다해 법에 의지하여 화합하기를 당부합니다.”

혜가는 더 이상의 언어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견해를 보여 달마의 법을 이었고, 드디어 중국 선불교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 #2 진리[法]를 구하는 자세

달마를 만나기 전에 혜가는 ‘신광(神光)’이라는 법명의 스님이었다. 30세 무렵에 출가한 신광은 유학과 노장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통달하여 막힘이 없을 정도로 이론적 지식이 해박했다. 특히 『시경(詩經)』과 『주역(周易)』에 이해가 깊었다. 그러나 신광에게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처럼 진리에 대한 갈망이 남아 있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제가의 경전을 쭉 훑어보다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출가한 지 10여 년이 지나 세납 40세가 되었는데 아직도 길을 몰라 헤매고 있다니 참으로 부끄럽다.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은 예법, 통치의 책략, 풍속, 규범을 말하며, 『장자』와 『주역』의 글도 세상을 운행하는 미묘한 이치를 다 설명하지 못하는구나. 그런데 근자에 들어 천축국에서 온 달마 대사가 소림사에 머무른다는 말이 들린다. 이렇게 가까이 성인이 계시니 찾아가 진리의 세계, 현묘한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마땅한 도리 아니겠는가?’

신광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확신이 섰고 성인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소림사에 도착한 신광은 대중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곧바로 달마가 수행하는 달마동굴[達磨窟]로 향했다. 청하지 않은 손님이었기에 신광은 밖에 선 채로 인기척을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러나 동굴 안에서 벽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성인은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자신의 수행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러 날 아침과 저녁으로 달마를 참배하며 정성을 다했건만 시간만 흐를 뿐 어떠한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신광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경전에 의하면 옛날 수행자들은 진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뼈를 깎아내기도 하고, 골수를 드러내어 보이기도 하고, 육체에 피를 내어 다른 생명에게 보시하고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까지도 기꺼이 행하였는데,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이 여기까지 이른 신광은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진심을 보이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눈 내리는 어느 겨울밤, 신광은 달마동굴 앞에서 쌓여가는 눈을 맞으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밤은 깊어가고 눈은 점점 쌓여 무릎 높이까지 차올랐다. 어느새 주위는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하늘의 기운과 쌓인 눈에서 발광하는 빛[雪光]으로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시간이 멈추고 주위 만물이 경계를 잃어버린 상태로 박제되어 가는 그때 천지의 고요를 깨는 달마의 한마디가 울렸다.

“그대는 무엇을 구하고자 밤새 눈 속에서 부질없는 고생을 하는 것인가?”

신광은 감격하며 목구멍에서 기어 올라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스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감로법문으로 저와 같이 미혹한 중생을 널리 제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 #3 목숨을 걸다[爲法忘軀]

이제야 신광의 존재를 인식하고 한 마디 던지는 달마의 자비로움에 감격한 신광은 온몸이 뻣뻣이 굳어 가는 것조차 잊고 달마에게 자신이 바라는 바를 말했다. 달마는 지금까지 신광이 보여준 기세만으로도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았으나 다짐하듯 다시 한번 신광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부처님의 가장 높고 미묘한 가르침은 오랜 세월 부지런히 수행해도 얻기 어려운데 그대는 어찌 조그마한 복덕과 작은 지혜로 참다운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가? 부질없이 고생하지 말고 돌아가라.”

달마의 단호한 거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광은 오늘의 결심을 위해 미리 준비해온 칼을 꺼내 자신의 왼쪽 팔을 잘라 달마 앞에 놓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신광의 행동에 달마도 더는 신광을 물리치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모든 부처도 처음 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희생했는데 그대가 지금 내 앞에서 팔을 자른 것도 법을 구하고자 하는 그대의 결연함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부터는 이름을 ‘혜가(慧可)’로 하고 자신을 소중히 보전하여 진리에서 물러나지 말라.”

드디어 관문을 통과한 혜가가 달마에게 물었다.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변하지 않는 법의 진리[法印]를 듣고자 합니다.”

이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변한 두 사람의 대화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달마는 혜가의 질문에 대답했다.

“불변하는 법의 진리는 사람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애써 찾으려고 하지 말라.”

혜가는 스승의 말씀이 끝나기를 기다려 더 직접적인 질문을 했다.

“저는 진리[法]에 대한 갈망으로 마음이 항상 안정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수행 방법도, 경전을 탐독하는 것도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기에 갈수록 조바심만 날 뿐입니다. 스승님께서 제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달마는 혜가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혜가가 드디어 자기의 문제를 인식한 것이다. 관념의 덩어리로 뭉쳐진 ‘불변하는 법의 진리’의 문제에서 자신의 내면을 괴롭히는 ‘불안한 마음[不安]’이라는 당면한 문제로 인식이 전환된 것이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현재 처한 다양한 상태를 주의 깊게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달마가 말했다.

“그대의 마음이 편안치 않다. 큰일이군. 그렇다면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지.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그대가 나에게 협조해 주어야 할 것이 있다. 그대의 불안해하는 마음, 편안치 않은 마음, 조바심 나게 만드는 마음의 실체를 나에게 보여 봐라. 그 실체를 보여준다면 내가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것이다.”

순간 혜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불안한 마음의 실체를 달마에게 보여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편치 않은 마음’과 ‘안정된 마음’으로의 분별로는 ‘마음의 실체’를 찾을 수 없고, ‘마음’이라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눈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스승은 이제 제자의 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제자에게 던진 공이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난 혜가가 “마음은 찾아도 끝끝내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달마는 그제야 명쾌하게 한마디 보태어 말했다.

“그대의 마음이 이제 편안해져 버렸네[安心法門].”

 

<해설>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출현했던 중국 선종사에서 달마와 혜가의 이 이야기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도 드물다. 많은 사람에게 회자한다는 말은 이 이야기가 선종의 종지(宗旨)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쭙잖게 사족을 붙이는 것조차 부끄럽다. 

출가수행자에게 ‘진리를 구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究竟正覺 饒益衆生]’에 우선하는 사명은 없다. 그런 측면에서 진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한몸을 바치는 혜가의 자세는 수행자에게 결단심(決斷心)이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진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한몸을 바치는 것을 ‘위법망구(爲法忘軀)’라 한다. 혜가의 위법망구 정신이 ‘눈 속에 서서 팔을 끊는[立雪斷臂]’ 행위, 즉 ‘결연한 의지의 표명’으로 표출됐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선을 대표하는 정신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진리를 구하는 수행자의 정신’에 있다.

스승의 무심함과 자신의 무력함이 만나 더는 한 걸음도 물러날 수 없는 경지에서 혜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죽기 살기로 덤비는 것이다. 더 이상의 기회도 없다. ‘예,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라며 물러날 수도 없다. 그 절명의 순간에 혜가에게 무엇이 아깝겠는가? 목숨을 걸었기에 깊은 밤 하염없이 눈만 쌓여가는 적막 속에서 ‘자네, 무엇을 위해 이리 고생하는가?’라는 달마의 한마디로 천지의 고요에 균열을 깨는 순간을 얻어 낸 것이다.

혜가의 ‘목숨 걸기’에 후대의 많은 수행자가 찬사를 보냈다. 조선 시대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선사는 혜가의 수행자로서의 기개를 이렇게 칭송했다.

서릿발 같은 칼날 휘둘러 단번에 
봄바람을 베어버리니[一揮霜刃斬春風]
한가득 눈 쌓인 뜨락에 
붉은 꽃잎 떨어진다[雪滿空庭落葉紅].
이 순간 겨우 시비 분별을 
마치고 보니[這裏是非才辨了]
찬 겨울 반달이 서쪽 봉우리에 
걸려 있네[半輪寒月枕西峰].

달마와 혜가의 ‘편치 않은 마음[不安]’에 관한 문답은 선가에 널리 전해져 중국 선종사에서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불리는 역사적 명장면이 되었다. 마치 어미 닭이 껍데기 속에 든 병아리를 위해 힘을 조절하며 외부에서 쪼아 균열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스승의 자애로움이 빛나는 순간이다.

 

범준 스님
운문사 강원 졸업. 사찰 및 불교대학 등에서 불자들을 대상으로 불교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봉은사 전임 강사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