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주산 북한산

유동영의 선경(禪景) | 지금은 사라진 그곳의 절터

2020-10-12     유동영

·사진. 유동영 

산을 보고픈데 어느 산이 좋을까  
부왕이라 불리는 옛 선림이 있네.  
해 떨어질 때 봉우리는 물든 듯하고  
단풍이 밝아 골짜기는 음습하지 않네.  
범종소리 목어소리 먼 듯 가까운 듯 들려오고  
산새들도 함께 그윽하네.  
온갖 묘한 이치를 하나씩 알아차리게 하니  
도를 트이게 하는 빼어난 경치로구나.  

추사 김정희의 『완당전집』에 실린 두 편의 ‘부왕사에서’라는 시 가운데 한 편이다. 추사가 동갑내기였던 초의 선사와 막역한 도반이자 신심 깊은 불자로 교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가의 선비로서 절을 노래하는 게 그리 별스럽지는 않다. 다만 시를 두 편이나 남긴 것으로 보아 부왕사의 빼어난 경치를 잊지 못했거나 초의 선사와 같은 또 다른 벗이 부왕사에 머물지 않았을까. 

부왕사는 승군이 북한산성 내에 머물면서 중창이 되긴 했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백일기도를 했던 곳이라고도 하고 풍수가들이 북한산 내 명당 터 가운데 한 곳으로 지목하기도 하니 이미 축성 이전부터 절터였던 듯하다.

절은 한국전쟁 때까지 영산전과 별당을 갖추고 이어져 왔으나 끝내 전쟁의 포격까지 견디지는 못했다. 인민군을 북한산 안으로 유인한 미군은 용산에서 북한산 골짜기 곳곳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 현재 절터에는 누각을 짐작하게 하는 석주 16기와 승탑 1기, 우물, 금당자리가 남아 있다. 그리고 조계종의 한 스님이 움막을 치고 매일 예와 향을 올린다.

보물 제 657호 마애불이 있는 지금의 삼천사는 예전 삼천사의 초입이었을 것이다. 

마애불은 편안하고 두툼한 얼굴이며 가사는 길게 늘어뜨렸다. 삼천사지는 법당자리와 탑비자리 이렇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현 삼천사로부터 부왕동암문 가는 길로 약 20여 분쯤 오르면 삼천사탐방지원센터까지의 거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 위 쪽 일대가 법당자리다. 

몇 발치만 더 오르면 그곳이 절터였음을 짐작케 하는 석축들이 있다. 사지의 법당 자리로부터 엷게 난 길을 어림잡아 다시 20여 분쯤 오르면 ‘대지국사탑비’ 구역에 닿는다. 탑비에 다다르기 직전 나지막한 계곡에는 부도의 몸통과 석등의 기단쯤으로 보이는 복련 연화대가 나란히 박혀있다. 

그동안 삼천사지 구역에서 4차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탑비전 구역 발굴 과정에서는 석조 보살두, 금속제 장신구, 벼루, 도자기, 명문이 새겨진 칠기 등 여러 종의 유물이 발견됐다. 증취봉 아래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은 귀부는 비록 그 위치는 낮으나 위용으로는 증취봉과 맞서고 전면의 나월봉·나한봉을 압도한다. 

북한산성과 승영 사찰의 역사는 함께한다. 나라가 외세에 짓밟히고 스러질 때 산성과 절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나한봉의 치성은 서편이 가파른 암벽이고 다른 성곽에 비해 지대가 높아 자연 치성이 되었다. 지금의 백운대 대피소 자리가 용암사지다. 삼층석탑은 산산이 부서져 몇 개의 옥개석과 탑신 하나 정도만 남았다. 상처투성이의 탑이 안쓰럽고 아프나 이내 우리가 담고 가야할 역사다. 깨어있는 아픔은 단단한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