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 스님의 온에어(On Air)] 나와 이별하는 자세

2020-10-09     진명 스님

법구경』의 「무상품」에서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생겨나는 것은 반드시 죽고 사라진다는 진리를 읽을 수 있다. 무상에 대한 가르침은 경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불자라면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고 자기 죽음이 예고되면 앎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를 곱씹으며 부처님부터 조상까지 원망하고 분노한다. 원망과 분노에 휩싸여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마무리할 시간까지 다 잃기도 한다. 

 

| 시한부 인생의 고백 한 통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제목이 ‘스님 감사합니다’였다. 왜 이 청취자가 나에게 감사하다고 할까를 생각하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계절 인사부터 필체와 문장 구성을 보니 나이가 지긋하신 분 같았다. 

“스님, 저는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냈습니다. 삶의 모든 기준이 가족 아닌 회사밖에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새벽 별을 보며 출근하고 깊은 밤 가족이 잠든 시간에 퇴근하며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아이들 성장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을 두는 일은 사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결과 저는 남부럽지 않게 승진도 때에 맞게 잘했고 대기업 임원 자리까지 순조롭게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다 잘해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는 자부심과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습니다. 아주 권위적이고 도도한 상사였습니다. 가족들에게 감사함도 모르는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가 얼마 전 병원에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남은 시간이 길면 6개월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세상 모든 것이 싫었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심지어는 잘 해주지도 못했던 아내까지 원망스러웠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병들게 내버려 두었냐고 탓하며 원망을 토로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에서 스님께서 진행하시는 채널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면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그 목소리에 매료되어 귀를 기울이게 되었지요. 그런데 일반 아나운서 진행자인 줄 알았던 분이 스님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스님이 법문을 들려주는 프로그램도 아닌 서양 고전음악을 전하며 이렇게 편안하게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저는 매일 아침 식사를 스님께서 방송하는 시간에 맞춰 9시에 시작해서 10시 스님 방송이 끝날 때 식사를 마쳤습니다. 그러면서 스님 말씀을 귀담아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어느 날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고 가을바람을 느껴 보세요. 그리고 바람의 향기를 맡아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밥 먹던 숟가락을 놓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정말 그 가을바람이 얼마나 소슬하고 바람에도 향기가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동안 얼마나 주변에 감사한 것들을 잊고 살았는지 한 가지 한 가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앉고 걷기도 어려운 병든 몸을 이끌고 가까운 서울 봉은사에 나가 법당에 참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3배를 하기도 어려웠지만 열 번, 스무 번 삼십 번 오십 번 그렇게 108배까지 하게 되는 기적을 제가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봉은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손수레에 폐지를 담아 힘겹게 끌고 가던 이름 모를 할머니의 손수레를 뒤에서 밀어주며 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게 되었고, 곱게 물든 단풍이 여러 가지 색의 조화로움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또 청명한 가을 하늘에 새털구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모든 자연의 순리와 가족이나 친지, 직장 동료들까지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품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스님께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합니다.” 

 

| 지금 여기 소중함을 위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이 편지의 내용은 나의 선지식이다. 그 이후 그 불자는 많이 회복되어 시한부를 훌쩍 넘기며 희망을 놓지 않고 하루를 1년처럼 귀하게 여기며 살고 있었고, 2년이 지나 방송국 행사에 찾아왔다. “이제 스님을 뵈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제가 분노를 내려놓고 삶을 귀하게 마무리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시간을 더없이 소중하고 즐겁게 살다가 가겠습니다.” 이렇게 인사하고 돌아갔다. 그 후에도 팬레터는 몇 번 더 왔고, 3년이 훌쩍 지나서는 소식이 없었다. 

이 청취자의 글에 깃든 가르침을 「불광」 독자들과 함께하고 싶어 적어본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소중하고 귀한 것들에 감사하며 살아가자고.

 

진명 스님
시흥 법련사 주지. 1982년 청도 운문사에서 정심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84년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88년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운문사 승가대학과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선학과를 수료했다. ‘(사)맑고 향기롭게’ 사무국장,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중국 북경 만월사와 대련 길상사 주지를 역임했다. 문화재청 문화재건축분과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