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철학자의 사색] 우리 삶의 리듬을 빼앗은 것들

2020-10-08     김용규

불일치와 리듬의 상실, 그것이 삶의 멀미를 일으킨다(통권 550호 참조). 그렇다면 무엇이 불일치를 만들고 리듬을 빼앗았을까? 생명 근원에서 솟아나는 충동과 현실의 삶이 지나치게 불일치할 때, 그리고 생명 작동의 원리와 너무도 다른 방향으로 오랜 시간 삶을 작동시킬 때 그 삶은 지독한 멀미를 만날 수밖에 없다. 

 

| 어떻게 살라고 배웠나

오늘날 우리는 어느 쪽을 추구하며 살라고 배웠던가? 글 상자 안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해가며 읽어보시기 바란다.

당신은 일생 단단해지라 배웠는가, 
아니면 부드러워지라 배웠는가?
더러 흔들리며 살라고 배웠는가? 
아니면 흔들리는 건 나약한 것이라 배웠는가?
내내 이기며 살라고 배웠는가?
아니라고, 더러는 지면서 살아도 된다고 배웠는가?
매사에 분명하라 배웠는가?
분명치 않은 것도 있으니 때로 모호해도 된다고 배웠는가?
빠르고 신속하라 배웠는가, 
아니면 느리고 한가로워도 괜찮다고 배웠는가?
완벽해지라 배웠는가,
이따금 허술하고 불완전해도 된다고 배웠는가?
금욕적인 것이 선(善)이라 배웠는가?
아니면 욕정도 생명 작동 프로그램이라고 배웠는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배웠는가?
아니면 우리 안에 부도덕성도 함께 있다고 배웠는가?
조금이라도 더 젊게 사는 게 좋다 여기는가? 
아니면 잘 늙어가는 나날을 경배하는가?
모험하며 살라고 들었는가?
아니라고, 철옹성의 안정이 최고라고 배웠는가?

대개 우리는 일생 강해지는 법만 배우며 살았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온통 이기는 법만 가르쳤고 요구했다. 우리는 또한 삶이 단단해지는 방법을 주로 배웠다. 잘 흔들리기보다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하여 결국 부드러워지는 법을 얻지 못했다. 느긋하게 늙는 방법을 놓치고 바삐 젊게 사는 방법만을 모색했다. 젊게 살아야 한다면서도 모험하는 삶의 기쁨은 잃었다. 이기는 법에 갇혀서 지는 법은 알지 못한 채 살게 되었고 어쩔 수 없는 것들 앞에 항복하는 방법도 놓쳤다. 우리는 부드러운 삶의 가없는 아름다움을 놓쳤다. 흔들리며 사는 길을 잃었고 나약함을 수용하며 살 때 얻는 인생의 안도감도 빼앗겼다. 또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고 한가로움을 참지 못하게 되었다. 선명하고 신속하지 못한 것을 백안시하게 되었다.

도덕적으로도 완벽해지기 위해 이따금 내 안에 스멀거리는 음욕과 부도덕의 실핏줄들을 교묘하게 은닉하고 위장하는 법만 익혔다. 그리하여 차라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백하고 용서 구하는 용기를 잃었다. 반대로 타인에게서 내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떤 탐욕의 누출을 발견했을 때 연민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상실하게 되었다. 오히려 타인의 그것을 맹렬히 비난함으로써 거짓 자유를 구한다. 자신의 무의식에 똬리를 틀고 은밀하게 기거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그 불완전한 모습들을 표적이 된 그에게 몽땅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죄의식에 자유를 부여해 보려는 간교함을 익혀왔다. 슬프게도 우리는 자기 자신과 타자에 대한 너그러움과 관용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 하루만큼 살고 죽어가는 진실

모든 것이 삶의 반쪽 진실만을 끌어다가 있지도 않은 완벽한 삶을 완성해보려 분투한 결과다. 삶을 이루는 반쪽의 실체를 온전한 진실이라고 바라보고 계속 추구하면 결국 삶은 멀미를 만나게 된다. 만물과 삶의 실체는 어떻던가? 만물은 대극(對極)의 모순적 특성을 맞대어 실체를 완성한다. 그것은 결코 이분(二分)되지 않는 세계다. 하루는 밤과 낮으로, 생명은 암과 수로, 삶은 탄생과 죽음으로…. 또한 만물은 강하면서 동시에 부드럽다. 흙도 물도 불도 바람도 그 두 속성을 모두 머금어 각각의 실체를 이룬다. 풀과 나무, 새와 뱀, 나비와 거미도 모두 그러하다. 인간 역시 그러하다. 

나는 아름다우며[善] 추하고[惡], 도덕적이며 동시에 부도덕한 구석이 있다. 강하며 약하고, 분명하며 모호하다. 조급하며 또한 느긋하다. 나는 여전히 젊고 동시에 직전보다 늙어가고 있다. 나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 얼마나 준엄한 진실인가! 대극 중 하나의 극만을 떼어내 판단하거나 하나만 갖겠다는 이분의 분별은 오직 편향된 마음의 작용일 뿐이다. 그곳에 멀미의 씨앗이 있고 그래서 삶의 리듬을 잃게 된다. 갑자기 든 생각이다. ‘멀미하다’의 반대말을 만든다면 무엇일까? ‘리듬을 타다’, ‘춤을 추다’ 정도는 어떨까? 당신과 나의 삶이 대극의 모순성을 포용하여 마침내 리듬을 타며 춤을 추듯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김용규
숲의 철학자. 숲을 스승으로 섬기며 글쓰기, 교육과 강연을 주로 한다. 충북 괴산 ‘여우숲’ 공간을 연 설립자이자 그곳에 세운 ‘숲학교 오래된미래’의 교장이며 ‘자연스러운 삶 연구소’의 대표다. 숲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고 마침내 진정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저서로는 『숲에게 길을 묻다』, 『숲에서 온 편지』, 『당신이 숲으로 와준다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