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원효·의상봉과 능선 사찰이 한데 어우러지니 “불국토가 예 있더라”

북한산과 불교 그리고 북한산성

2020-09-29     박부영

한반도에서 북한산은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며 불교 성지였다.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며 너른 들을 거느리고 경상도, 강원도 내륙에서 서해로 나가는 통로 한강과 한몸이다. 북한산이 방벽을 두르지 않았다면 한강은 유리 안에 갇힌 새 모양 늘 적의 위협에 떨었을지 모른다. 조선이 서울을 수도로 삼기 전부터 북한산을 중시했으니 수많은 절과 절터가 그 증거다.

 

사진. 유동영, 박부영 

계파성능 대사가 승군 총사령관격인 도총섭을 맡아 북한산성 축조를 책임졌다.

 

| 한국불교 큰 맥이 북한산 능선으로

북한산은 북쪽으로 도봉산, 사패산으로 이어져 북으로 치닫는다. 서쪽 끝은 한강 하류에 펼쳐놓은 고양들에 닿는다. 남으로 수도 서울을 품고 북으로 외적을 방비한다. 능선은 화강암 덩어리다. 높고 험한 암벽으로 두른 능선과 봉우리는 과거에는 성벽이었으며 오늘날은 등반가들 성지다. 북한산은 서울 구파발 비봉에서부터 문수봉, 영봉까지를 흔히 주 능선으로 부른다. 주 능선을 등줄기 삼아 의상, 칼바위, 진달래, 원효 등이 능선을 이룬다. 능선과 능선 사이는 깊고 길며 아름다운 계곡이 자태를 뽐낸다. 북한산에 오르는 등산객들은 매 계절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달리하는 북한산 봉우리 그리고 산과 산이 어깨동무하고 지나가는 능선과 계곡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북한산에는 크고 작은 사찰이 100여 곳에 이를 정도였으며 현존하는 사찰은 30여 곳이다. 수많은 사찰과 더불어 불보살의 이름을 딴 봉우리까지 북한산은 불국토다. 불보살과 더불어 봉우리에 당당히 이름을 새긴 두 고승이 있으니 의상과 원효다. 화엄과 정토라는 한국불교 큰 맥을 만든 시조(始祖)답게 두 고승은 북한산에서 보살의 반열에 올랐다. 북한산 주 능선과 서쪽 방면 비봉능선은 중간에 수직으로 꺾이는 데다 가운데 의상 능선이 막고 있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산 전 능선이 보이는 명당 터가 한 곳 있다. 바로 문수봉이다. 향로봉, 비봉, 승가봉으로 이어지는 비봉능선과 의상능선이 만나 주 능선으로 달리는 북한산 허리 격이다. 광화문 등 서울 종로 일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행궁과 승군 사찰이 모여 있는 북한산성의 심장 중흥사 권역을 보호하는 문수봉을 북한산 주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묻는다. 주 능선과 의상능선이 맞닿으며 사대문에서 산성으로 들어서는 통로이자 북한산 중심에 해당하는 봉우리 이름을 왜 문수보살 주석처로 삼았을까? 오대산, 속리산에서 보듯 가장 높은 산에는 보신 화신불의 진신인 법신불 비로자나불을 따서 비로봉이라 짓는다. 북한산에는 비로봉 대신 원효, 의상이 있다. 지혜를 상징하며 행원을 대표하는 보현보살과 짝을 이뤄 석가모니부처님을 협시하는 문수보살은 수행자를 뜻한다. 진리를 체득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자의 산이기에 최고봉은 아니지만, 산의 허리며 중심에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모신 것은 아닐까? 

북한산은 크게 북한동 지역과 종로 구기동 방면, 서울 서북부의 구파발, 우이동, 수유리, 정릉 권역으로 나뉜다. 구역마다 대표사찰이 있다. 북한동 중흥사와 상운사, 구파발의 진관사와 삼천사, 구기동의 승가사와 문수사, 우이동 도선사, 수유리 화계사다. 

상운사에서 바라본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현존하는 사찰 중 북한산에서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사찰은 상운사와 삼천사(661년, 신라 문무왕 1년)로 두 곳 다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 756년(신라 경덕왕 15년) 수태가 장안의 천복사에서 대중을 교화하며 생불이라고 칭송되었던 승가 대사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를 창건하고, 862년(경문왕 2년)에 도선 국사가 도선사를 창건했다. 고려 시대 들어서도 북한산에는 많은 사찰이 들어섰다. 고려 초 국가 방위와 안녕을 염원하며 중흥사를 창건했다. 광종의 왕사와 국사를 지낸 법인 탄문 대사가 보덕암을 창건하니 화계사 전신이다. 궁에서 쫓겨나 어려운 시기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준 은혜를 갚기 위해 고려 현종이 진관 스님을 국사로 모시고 진관사를 창건했으며, 고려 예종 4년(1109년) 탄연이 문수사를, 고려 말 우왕 15년(1388년)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 대사가 중흥사를 중건하고 그 옆에 태고암을 지었다.

원효봉에서 바라본 상운사.

 

| 쫓겨난 스님들이 쌓은 북한산성

고대부터 계곡과 암벽 아래 하나 둘 들어서던 사찰이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 후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북한산성 축조와 방벽을 승군(僧軍)이 맡으면서다. 임진 병자 양란을 겪은 조선은 북한산성 축조 논의에 들어가지만 진척이 없었다. 효종이 송시열에게 축조를 지시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두 번이나 강토를 유린당한 왕권은 힘이 없었다. 별 효용도 없는 성을 쌓는 데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사림 관료들이 순응할 리 없었다. 성을 쌓고 지키는 힘들고 고된 일은 승군 차지였다. 남한산성에 이어 북한산성도 결국 승군에게 짐이 떨어졌다.

임진왜란 때 불탄 화엄사 장육전 중건 책임을 맡아 깔끔하게 처리해 숙종의 눈에 들었던 계파성능(桂坡性能) 대사가 승군 총사령관격인 도총섭을 맡아 북한산성 축조를 책임졌다. 1711년 음력 3월에 시작해 9월에 마쳤다. 성능 스님의 탁월한 지도력과 경험, 지혜, 승군의 헌신이 바탕 되고 여러 조건이 더해져 빨리 끝났을 것이다. 이처럼 빨리 끝낼 공사를 성리학을 추종하는 관료들은 오랫동안 미루며 ‘사보타지(고의적인 태업)’로 여러 임금의 속을 태운 셈이다. 

 구례 화엄사 출신 성능 대사는 남한산성 축조를 지휘한 벽암각성(碧岩覺性)의 법을 이었으니 세월을 건너 스승과 제자가 수도 서울을 수호하는 남북 산성을 세운 셈이다. 임무를 마친 대사는 화엄사로 돌아간 뒤 『산성기사(山城紀事)』를 집필하였으며 『북한지(北漢誌)』를 찬하고 판각하여 오늘날까지 그 전모가 상세하게 전한다. 그 후 대사의 자취는 알지 못하며 화엄사, 해인사 홍제암에 부도가 있다. 태고사 위 봉성암 부도도 성능 대사 부도로 전한다. 

남한산성에 빗대 북한산성이라 불렀다.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있어 삼각산이라 부르던 이 산은 이때부터 북한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북한산에는 사방에 큰 문에다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 무기고 창고, 각종 군사기구를 설치한 사실상 수도가 들어섰다. 이름마저 사대문처럼 대남문(大南門), 대동문(大東門), 대서문(大西門)이라 했다. 북한산성에는 크게 6개의 대문과 보조 출입시설 암문(暗門) 8곳, 계곡을 차단하고 보내는 수문 2곳, 시신을 내보내는 시구문 등 14개의 문과 군사지휘소인 3개의 장대를 두었다. 최근에는 20km가 조금 못 미치는 성문을 전부 돌아보는 등산길이 인기다. 

산성을 짓고 지킨 이들이 승군이다. 13곳에 승군 사찰, 즉 승영(僧營)을 두었다. 도총섭이 주석하는 사령부 중흥사를 비롯해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 원효사, 봉성암이 승영이다. 

승병이 쌓고 주둔하며 지킨 남북산성은 조선 시대 불교의 해방구였는지 모른다. 평지 사대문 안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지만 무장한 승군이 서울을 남북으로 포위하고 주둔했으니 기막힌 역설이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승군이 폐지되면서 북한산을 비롯해 전국의 승군도 해산했다. 자연스럽게 승영도 일반 사찰로 전환됐다. 1925년 조선 전역을 덮친 을축년 대홍수는 북한산을 초토화했다. 홍수와 화재 등으로 파손되고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폐사됐다. 최근까지 새로 복원한 사찰은 중흥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 봉성암, 원효암이다. 노적봉 아래 진국사는 복원하면서 노적사로 바뀌었다. 

원효봉에서 건너편 의상봉이 보인다.

 

| 그 많던 승영은 어디 있을까

승영은 중흥사 권역에 모여 있다. 북한산에서 가장 넓어 행궁 등 산성의 주요 시설이 모두 이 지역에 집중해 있다. 북한산 지형상 이만한 시설을 세울 곳은 여기뿐이다. 의상·원효능선이 좌우를 막아 방어에도 유리하다. 승영 수사찰이 중흥사다. 도총섭이 주석하는 총사령부로 136칸에 이르는 전각과 400여 명에 이르는 승군이 주둔했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였다. 

승영 수사찰 중흥사는 임제선풍을 드날린 보우 국사 주석처로도 의미가 깊다. 현재 조계종은 선과 교로 나뉜 제 종파를 태고보우 국사가 조계종으로 통일한 데서 종단의 연원을 찾는다. 승려도성금지 출입 해제 후 사대문 안에 처음 세운 사찰이며, 근대 최초 도심 포교당인 각황사가 1937년 한국불교 총본산이 된다. 그 과정에서 대웅전을 새로 짓고 이름도 태고사로 바꾸는데 북한산 태고사를 서울로 이운하는 형식을 띤다. 당시 중흥사가 폐사돼 태고사가 그 역할을 맡았다. 임제선풍을 잇는 조계종의 정신적 뿌리인 북한산의 태고보우를 불교 근대화 과정에서 수도 서울로 맞이한 셈이다. 태고사는 해방 후 왜색불교 청산과 청정비구 복원을 내세우는 정화의 본산이 되면서 이름을 조계사로 변경한다. 불교 근대화, 현대화, 청정 정법불교 복원의 역사적 사상적 연원이 북한산과 중흥사에서 시작된 셈이다. 북한산이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은 이처럼 크고 깊다.

북한산의 임제선풍은 수도 서울로 들어갔지만, 그 시초인 중흥사는 폐허가 된 채 방치됐었다. 조계사 주지를 지낸 지홍 스님이 서울 4방위에 각각 포교당을 개설하라는 은사 광덕 스님의 유훈에 따라 중흥사 주변 토지를 매입하고 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0년 넘는 불사 끝에 다시 일으켜 북한산에 다시 조계종을 세운 태고 보우국사를 이을 수 있게 됐다.

중흥사 위 노적봉 아래 노적사는 진국사(鎭國寺)라는 이름의 승영 사찰이었다. 바위 틈 인법당 한 채있던 빈궁한 가람을 신도들이 나서 일부 복원하고 1977년 부임한 종후 스님이 크게  일으켜 세웠다. 

북한산에서 꼭 들려야 할 또 하나 사찰은 상운사다. 의상봉 건너편 원효봉 아래 북문을 지나 영취봉 아래 자리한 상운사는 원효 대사가 수도할 당시 창건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팔공산 갓바위, 경주 백률사와 더불어 3대 약사도량으로 꼽히는 명찰로 경내에 서면 영취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한눈에 들어와 눈이 부실 정도로 장엄하다. 통도사 여수 흥국사와 같은 영축산이 원래 이름이지만 ‘북한지’ 그림에 염초봉이라 표기돼 있어 국립공원공단은 염초봉(廉峭峰)이라고 부른다. 유교 경전에 나오는 단어라고 하는데, 성능 대사가 왜 그림은 염초봉이라 적고 본문에는 영취봉이라고 서로 다르게 적었는지 알 수 없다. 조선을 지배하는 유학자들과 타협책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원효봉 건너 의상봉 아래 국녕사는 1998년 서울 강남 능인선원 지광 스님이 일으켰다. 노천에 조성한 국녕대불 ‘합장환희여래불(合掌歡喜如來佛)’ 좌상이 유명하다. 중국 돈황석굴 도상을 재현한 여래불은 건너편 원효봉에서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거대하다. 

의상능선은 봉우리가 가장 많고 철제 난간과 줄을 타고 오르내리는 북한산에서 가장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의상봉에서 시작하여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으로 이어져 문수봉에 닿는다. 증취봉을 의상봉 아래 법용사에서는 미력봉, 즉 미륵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나월봉은 ‘북한지’에 환희봉이라고도 적었다. 중생에게 이익이 가면 보살은 기뻐한다. 이것이 환희다. 의상능선에 오르면 힘들지만 저절로 웃음이 난다. 

승영 사찰은 아니지만 근대부터 현대까지 북한산성 안에는 많은 절이 들어서고 새로 복원했다. 고종 후궁 순빈 엄씨가 창건하여 마지막 왕자 영친왕을 얻었다는 무량사, 이승만 별장이었다가 사찰로 변한 보리사 등 절은 많은 이야기를 품었다. 높고 웅장한 봉우리, 눈이 부신 능선, 맑고 시원한 계곡, 모든 것을 다 갖췄는데 절과 이야기가 있어 갈 때마다 즐거운 북한산이다.

 

박부영
「불교신문」 상임논설위원. 「불교신문」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불교풍속고금기』, 『조계종단 50년사』, 금오 선사 평전 『금까마귀 계수나무 위를 날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