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사진첩을 보며

물처럼 구름처럼

2007-09-16     관리자

도반들이 보고 싶을 때 버릇처럼 사진첩을 펼친다. 이 사진첩의 이름은 여시아문(汝是我聞).
학인시절의 활동사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일종의 졸업앨범 같은 것이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의 법문과 행적을 정리하고 그 경전의 첫머리마다 '이와 같아 보고 들었 다.'하고 썼듯이, 도반들의 모습과 추억이 행간마다 숨쉬고 있다는 뜻에서 '여시아문'이라 이름하였다. 이 제목이 좋았던지 후배스님들도 동명의 머리말로 몇 차례 졸업 사진집을 만 들었고, 근래에는 이같은 상호로 불교서점까지 개설되었다니 어쩐지 친근감이 느껴진다.
사진첩을 넘기면 해인사 전경이 깔려 있고 입적하신 성철 큰스님의 모습도 보인다. 해인사 에서 큰스님의 덕화를 많이 입었던 탓이다. 밤새 삼천 배를 마치고 백련암 뜰에서 뵈었던 성철 노사(老師)의 형형하던 눈빛을 도반들은 모두가 기억할 게다.
그때 풋내기 학인으로 큰스님께 받은 화두는 간시궐(乾屎 ). '마른 똥막대기'라는 뜻이다.
무문관 제22칙에 나오는 것으로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운문(雲門) 스님이 대답한 데서 연유한 화두이다. 이 화두를 들고서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마냥 당당하 게 일주일 용맹정진에 참여하던 그 시절의 호기가 그립다.
몇 장을 더 넘기면 강원시절의 도반들을 만날 수 있다. 흑백으로 인쇄된 사진의 질감이 자 나긴 날의 추억처럼 애닯기도 하고 가식없이 느껴진다. 중간쯤에는 나의 사진이 한 칸을 차 지하고 있는데 장난끼어린 동안의 그 눈빛이다.
강원도반들 가운데서 내 나이가 가장 적다. 비교적 일찍 출가한 나는 늘 막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철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비구니 스님네는 늘 가장 나이 많은 도반을 백씨(伯氏)스님으로 부른다고 들었다. 우리 도반들 중에 맏형에 해당되는 스님은 지 우 강사(講師)이다. 그 당시 '노장'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아마도 오십줄에 들었을 게다.
전라도 어는 사찰에서 학인들에게 경학을 가르치고 있는 지우스님의 정진력이 부럽다.
이래저래 내게는 막내 인연이 많은 것 같다. 절집안으로 출가해서도 역시 속가에서처럼 서 열이 마지막이다. 위로 줄줄이 사형(師兄)들이 진을 치고 있고 아직껏 사제(師弟) 인연은 없 다. 모두가 어른이라는 가풍의 그늘이 넉넉하긴 하여도 때로는 아랫사람들에게 어른 노릇 하고픈 심사가 생기기도 한다.
사진첩 내용 속에는 강당시절 일상들을 재미있게 편집해 놓은 부분이 있다.
아는 이들에게 이 사진첩을 보여 주면 모두들 이쪽을 꼼꼼하게 읽고 넘어가곤 한다. 안거를 시작하는 결제날에 산중 스님네가 모여서 찍은 사진은 워낙 스님이 많아서 내 얼굴을 찾기 란 쉽지 않다.
그리고 일주일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마치고 찍은 사진을 보면 무슨 산적 모임 같다. 며칠간 수염을 깎지 않아서 덥수룩한 얼굴을 볼 때마다 잔잔한 도반애가 고인다.
경전 한 과목을 다 배우고 나면 종강식을 하였는데 그때 찍은 사진들은 일등병 졸병에서 고 참시절까지의 기록을 보는 착각에 빠진다. 치문(緇門)을 보던 때는 장판때가 덜 묻은 풋내 기 햇중의 모습이고 대교(大敎)를 공부하던 상반(上班)시절은 제법 중물이 들어 위의가 의 젓하다. 중노릇이 쌓여가듯 마음공부도 잘 익어 가면 또 얼마나 좋을까.
종강하던 그날 강주스님의 훈화는 보장금언(寶藏金言)으로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신심과 원력으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똑똑히 분간하여 오직 가야 할 길만을 고고히 걸 어가라."
사연이 있는 몇 장의 사진들도 있다. 다시 복원된 관음전이 헐리는 모습을 담은 것과 옛 정 낭을 찍은 사진은 기록 필름에 가깝다. 관음전은 학인들에게는 전통과 권위의 상징처럼 불 리던 곳. 관음전 앞을 지날 때는 숨도 크게 쉬어서는 안 될 만큼 조심스런 곳이었고, 특별한 용무 없이는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강당의 최고참이 생활하는 공간이기 때문인데 '제 2의 조실채'라 불렀다. 갓 들어온 학인들에게는 조실스님이 계시는 방보다 훨씬 문턱이 높게 느 껴진다.
가끔씩 관음전 스님들이 후배들을 그 넓은 큰방으로 소집하는 날이 있었다.
무릎을 꿇고 몇 시간 동안 훈계를 들으며 하심(下心)과 인내를 배우던 곳. 누구나 또 관음전 시절을 거쳐 학인의 이력을 마치게 된다. 그래서 해인사 강당을 다녀간 이들은 관음전의 추 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게다. 지금은 새집으로 지어져 옛 정감이 사라졌고, 더군다나 예전 과 다르게 신참학인들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 명성이 바래진 기분이다.
역시 건물의 품격은 철저한 수행가풍이 형성될 때 올바로 정해지는 가보다. 또 한 가지 아 쉽다면 예서 해우소(화장실)를 볼 수 없음이다. 스님네가 근심을 풀던 배설의 공간 해인사 변소는 아래가 깊기로 유명하여 일을 끝내고 바지를 추스릴 즈음이면 소리가 난다고 소문이 떠들썩하던 곳이었다.
여름날 냄새를 줄이기 위해 거푸짚을 넣어 줄 때 코를 막던 일이나 모기 때문에 엉덩이가 벌집마냥 얼얼하던 얘기도 옛 해우소에서만 가능하다.
사진첩의 뒷장을 넘기면 도반들의 별명이 적혀 있어 배꼽을 잡는다.
'심목사'라는 별호가 붙은 철운 스님은 말을 할 때 목사님처럼 한다고 해서 속성(俗姓)을 따서 만들었고, 방두 스님은 걸을 때 여자처럼 사뿐 사뿐 걸었으므로 '방순 비구니'라는 별 칭을 얻었다. 축구할 때 헛발질을 잘하는 수보 스님은 '개발 수좌'이고 얼굴이 잘생긴 효담 스님은 '깔끔존자'.
아무래도 별명이 여러 개인 스님은 법은 화상이었다. 그는 만능연예인으로 불러야 옳을 것 같다. 아나운서처럼 운동경기 중계를 꼭같이 흉내 내기도 하고 성우처럼 남의 목쇠까지 만 들어 내는 특이한 재주 때문에 그는 '복사기 스님'이다. 또 법은 스님은 가수 나훈아 모창을 누구보다 잘한다. 얼굴만 보이지 않는다면 진짜로 착각 할 정도인데 노래실력이 밤무대감이 다. 그래서 별명이 '너훈아 스님.' 가지가지 성격과 개성을 대변해 주기 때문일까. 만날 때마 다 법명보다 먼저 불쑥불쑥 별명을 부르게 된다.
강원 도반은 깨복쟁이 친구처럼 가식 없어 좋다. 안거 지내고 나면 맑은 눈빛으로 만날 수 있을 게다.
사진첩의 뒷면에는 누군가가 이렇게 후기를 적었다.

만남은 곧 헤어짐.
이런 일상의 윤회 속에서
많은 인연이 모였다 흩어진다.

뜻밖의 이별은
우릴 슬프게 하지만
준비된 이별은
참으로 담백하다.
비개인 날 아침처럼

더군다나 수행자는
만남보다 더 친절한 헤어짐을
준비하는 허허로운 삶이 아닌가.
우리의 소중한 학림(學林).

수행의 도정(道程)에서
때로는 풋풋한 기억으로
본분사를 챙기리라.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