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보살이 溟州[강릉]에 귀향하다

유동영의 선경(禪景) | 보조국사 지눌의 사굴산문 굴산사지

2020-08-25     유동영
사진 유동영.

“어디서 왔는가?” “동국(東國)에서 왔습니다.” 
대사가 다시 묻는다. “수로로 왔는가, 육로로 왔는가?” 
“두 길을 모두 밟지 않고 왔습니다.” 
“두 길을 밟지 않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여기 올 수 있었는가?” 
“해와 달에게 동서(東西)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이에 대사께서 칭찬하였다. “실로 동방(東方)의 보살이로다.”

마조 도일의 1세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제안 스님과 
스님을 찾아 온 범일 국사 사이에 오간 문답이다. 

사진은 학산천을 건너 승탑의 맞은 편에 있는 
보물 제 86호의 당간지주다. 
크기도 으뜸일뿐더러 정으로 한 망치씩 다듬은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걸작이다.

사진 유동영.

당나라에서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 온 스님은 지금의 굴산사지에 굴산사를 개산하고, 영동과 영서를 아우르는 많은 사찰에 선종의 법을 전하며 이 자리에서 40여 년을 주석했다.
범일 국사는 “스스로 마음을 닦아 종지를 떨어뜨리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80세로 굴산사지에서 입적했다. 사지에 남아 있는 부도는 오직 한 기로, 명문은 없으나 예부터 범일 국사의 탑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강릉 시내에 있는 신복사지 또한 강릉읍지에 의하면 범일 국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월정사의 보살좌상과 꼭 닮은 공양상의 미소는 눈높이를 맞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발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사진 유동영.
사진 유동영.

2002년 강릉 지역 일대를 할퀸 태풍 루사는 여래와 전각의 
흔적을 일찍이 잃어버린 굴산사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범일 국사의 탄생설화를 말해주는 석천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
사지를 덮고 있던 두 개 층의 토사와 유물이 휩쓸려 내려갔다. 
한편 세 번째 층의 땅이 드러나 천년을 잠들어 있던
유물들이 드러났고, 이는 새로운 발굴 조사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금당 자리는 찾지 못했다. 
600년의 시간을 담은 저 소나무의 의연함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사진 유동영.

굴산사지 주변에는 굴산사와 관계있는 불상 넷이 있다. 
미륵금이라 부르는 동네의 얼굴이 깎여나간 부처님, 현재의 굴산사 법당 안에 있는 두 부처님, 
그리고 석천 위에 있던 목이 없는 부처님 등이다. 
재미있는 건 네 부처님 모두 비로자나 부처님이란 점이다. 일찍이 영동 지역에 뿌린 내린 
의상 스님의 화엄사상이 범일 국사의 선종과 결합한 연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주의 근본이자 본질인 창조주 비로자나불!

사진 유동영.

강릉 사람들은 천년이래로 
매년 음력 4월 15일이면 대관령에서 
산신제와 국사성황제를 모신다. 
산신제는 신라장군 김유신을, 국사성황제는 
다름 아닌 범일 국사를 모신다. 
이때 범일 국사는 스님이 아니라 
강릉을 보호하며 살피는 성황신이다.
제삿날이면 성황신은 단풍나무에 강림하고
오방색으로 치장한 뒤, 대관령 옛길을 
지나 범일 국사의 고향인 굴산사지의 
서낭당에 잠시 모셔진다. 절은 인연이 
다해 잡초로 덮였으나 그 법이 보조국사 
지눌 스님에게 전해져 조계종으로 흐르고, 
스님을 모시는 제가 천년을 이으니 
범일 국사의 혼이 세상 속에 여전하다.

사진은 2015년 국사성황제.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