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미술 세계] 미술·건축 속 언어 너머 진리 찾기

2020-09-14     강우방

그리스, 터키, 로마, 파리, 베를린 등 여러 나라 유적과 박물관을 답사하고 조사했다. 두 번째 그리스 방문, 9년 만에 다시 찾은 파르테논 신전은 여전히 보수 중이었지만 그동안 발굴조사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한편 국내 답사와 조사는 더욱 활발해져 금강산을 세 번 올랐으며, 고려왕조의 수도 개성도 세 번 답사했다. 고구려 옛 도읍지들과 산성들을 오르는 감격을 누렸고, 장대한 고구려 국토를 횡단하며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불교의 진리는 불경이나 인도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스 최고의 신 ‘제우스’와 ‘석가여래’와 ‘용’은 서로 통하고 있음도 알았다. 그런 광대한 관계를 ‘인드라망’이란 이름으로 비유하여 말했다. 

사람들은 인드라망을 그물로 알고 있지만, 그물이 아니다. 이처럼 세계의 여러 문명의 탄생지를 누비며 조형 예술작품들을 조사하는 까닭은 절대적 진리란 문자 언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형 언어로 된 예술작품에도 고귀한 진리가 숨어있음을 밝히기 위해서다. 

 

|    외면받는 괘불의 조형 언어

세계 여러 나라를 답사하고 발표하며 눈코 뜰 사이 없었지만, 국내 답사는 더욱 치열해졌다. 통도사의 여러 법당은 각각 독창성이 있어서 건축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조사했다. 게다가 통도사 주요 전각들 안에는 중요한 불화들이 즐비했다. 특히 전국의 성보박물관들 가운데 유일하게 건물이 괘불(掛佛)을 걸 수 있게 설계돼 있다. 한 해에 2회 괘불 작품을 바꾸어 각각 6개월씩 전시해 온 지 15년째다. 괘불은 바뀔 때마다 정밀히 조사했다. 그곳 학예원들은 괘불을 내려서 정밀하게 조사하는 사람은 그동안에 필자 이외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은 괘불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픈 일이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이후부터 모든 사찰에 봉안하기 시작한 대형 불화는 높이가 대개 10m가 넘는데 가장 높은 괘불은 14m 내외이기도 해서 걸어 놓고 보면 장관이다. 이러한 위대한 대형 불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다. 흔히 티베트에 더 큰 불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불화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작은 후불탱에서 볼 수 없는 무늬들이 자세히 표현되어 있어서 열심히 관찰하고 촬영하는 동안 많은 비밀을 풀어낼 수 있었다. 2004년 6월 어느 날,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걸어놓은 미황사 괘불을 조사하다가 문득 불화의 본질을 발견했다! 불화를 읽는 법과 화면 전체를 해독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불화 전체에 대한 완벽한 깨침, 즉 정각(正覺)을 성취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감히 정각이라고 말한다. 그 이후 모든 불화가 보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문양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동서양의 불화 연구자들은 오로지 도상 연구에만 치중하고 있을 뿐, 불화 전체가 무늬라는 인식도 없을뿐더러 문양을 올바로 풀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불화는 물론 불상이나 금속공예, 도자기, 나전칠기, 복식 등에 절대적 진리, 즉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그대로 웅변하고 있음을 왜 모를까. 왜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일까? 그리고 세계에 유일한 대형 회화로 동시에 매우 정교한 무늬로 절대적 진리를 웅변하고 있는 위대한 그림임을 강연하고 다녀도 아무도 관심이 없다. 보려는 마음도 없어서 아직도 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 문자 언어로 쓰여진 불경만이 불경이 아니다. 삼라만상이 불법 아닌 것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불화와 불상 그리고 불교 관련 조형 예술품들은 모두가 불경이나 다름없다. 

불교가 대접받으려면 불교 미술품들에 애정을 가지고 해독하여 문자 언어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더욱 광범위하게 불화 연구에 매진했다. 2005년 「월간 미술」에 불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불화가 독자들에게 워낙 낯설고 더구나 처음 밝히는 내용인지라 10개월 만에 연재를 접어야 했다. 그 후에도 여러 불교계 신문사나 잡지사에 연락해 불교미술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연재를 청해 보았지만, 내용이 어렵다고 거절했다. 어찌하여 어려운 불경은 읽으려고 애쓰면서 불상이나 불화 그리고 범종이나 반자 등 금속공예에 표현된 엄청난 진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인가. 앞서 연재에 쓴 것처럼, 재작년 일본 문화청 초청으로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서 교토와 나라 지방의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일본 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10세기 작 국보인 코지마 만다라의 모든 조형을 분석해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한국이 문화적으로 탁월하다는 사실을 알린 역사적인 자리였다. 불화 연구는 한없이 확장됐고, 기독교의 성화(聖畫)도 처음 해독했으니 불교계가 환영할만한 일이 아닌가. 

 

|    건축에도 녹아 있는 절대적 진리

불교건축 조사도 전국적으로 이뤄져 주요 사찰은 거의 모두 조사했다. 물론 건축학계에서는 불가능한 연구다. 고건축 연구자들은 공학적으로 연구할 뿐, 그 상징은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 이미 연재에 썼듯이 사찰건축의 공포(栱包)를 나의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이란 이론으로 밝혀서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건축이 그리도 위대한지 몰랐다는 응답들을 받았다. 이후에도 공포 연구를 지속했고 기와, 단청, 기둥 등 여러 가지 주제들을 발표했다. ‘통도사 적멸보궁 건축의 전체 구성’을 맨 밑의 기단부부터 차례로 주초, 기둥, 공포, 지붕으로 화생(化生)하는 과정(맨 밑에서 위로 분석하는 불화 연구법)을 철저하게 밝혀 발표하기도 했다. 

필자는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첫 건축사학자’가 된 셈이다. 건축 연구를 서양으로 확대했다. 그리스 건축과 중세 기독교 대성당들이나 더 나아가 이슬람의 모스크 건축도 정교하게 조사해 국내에서도 강연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고딕 건축의 세계 최고 권위자인 알랭 에르랑드 부랭당부르흐(Alain Erlande-Brandenburg, 1937~2020)와 대화하며 그에게 고딕 건축의 가장 중요한 주제들을 열 가지를 물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필자의 의견을 말하면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화를 냈기에 열심히 질문만 했다. 그는 매우 흡족해하면서 다음에 만나면 안내를 하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고려 시대 사찰건축도 연구했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운 수덕사 대웅전을 수없이 가서 관찰하고 촬영하며 연구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덕사 대웅전 창건 700주년이 되었는데 어느 건축학회도 심포지엄을 준비하지 않을 기미였다. 그 수덕사 대웅전의 가치를 알기에 그 건축의 상징에 대해 강연하겠다고 제안했고, 성보박물관장 정암 스님 허락으로 황하정루에서 강연했다. 법당이란 건축 공간이 법계(法界)를 상징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법계를 이렇게 장엄하게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음을 수덕사 대웅전에서 발견했으므로 그 건축가와 화가와 공예가들, 즉 그 건축을 창조한 모든 위대한 장인들에 대한 헌사였다. 그 법계에 한 분의 위대한 영웅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을 설할 때, 그 공간은 법계가 되며 그런 상태를 조형화한 것이 건축이어서 모든 건축 부재가 영기문(靈氣文)으로 구성됐음을 밝힌 것이다. 

 

|    민화, 왕릉, 만병 그리고 북녘 사찰

북한으로도 연구 영역이 넓어지는 인연이 닿았다.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북한과 협의한 현대아산이 금강산에 호텔과 부대 관광시설을 완벽히 갖췄고, 금강산과 개성 여행이 가능하게 됐다. 솔 출판사 사장이며 문학평론가인 임우기 씨의 도움으로 금강산 답사를 3회 감행했다. 이제 더는 그리운 금강산이 아니었다. 2004년 11월 하순에 금강산 만물상에 올랐다. 금강산은 전혀 오염되지 않아서 깨끗하고 물이 하늘색이어서 선경(仙境)이었다.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암벽의 괴기한 광경은 장엄했다(사진 1). 구룡연에는 홀로 올라가기도 했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뿐만 아니라 화원들이나 사대부 화가들도 금강산을 즐겨 그렸고, 필자는 민화에 그려진 양식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마음이 설렜다. 민화에서 금강산을 문양화(文樣化), 즉 영기화(靈氣化)시켰기 때문이다. 

사진 1.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2004년 만물상에 올랐다. 선경(仙境)이었다. 

두 번째 여름에 갔을 때는 표훈사나 고승 비석이나 그 밖의 사찰 터에서 마애불들을 조사했다. 표훈사 능파루(凌波樓)는 아름다움을 넘어 감동적인 건축이었다(사진 2). 아마도 우리나라 중층 누각 가운데 주변 풍광과 어울려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건축이리라. 물론 대웅전과 함께 샅샅이 조사했다. 하늘에 걸린 유명한 보덕굴(普德窟) 안에도 들어가 보았다. 세 번째 방문 때엔 신계사 복원 행사가 한참이었다. 이튿날 장엄한 설경의 금강산을 체험했다. 겨울의 해금강 삼일포 풍경은 고즈넉했다. 이상하게도 미술사학자들이나 건축사학자들 가운데 금강산을 다녀온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으니 대화할 기회도 없었다. 

사진 2 금강산 표훈사 능파루 내부 단청도.

개성(개경, 開京)은 고려왕조의 왕경이다. 그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 조선의 왕경은 모두 섭렵했으나 개성과 평양만은 밟아 볼 수 없었다. 마침 기회가 생겨 개성의 사찰, 박물관, 공민왕릉 등 많은 유적을 3회에 걸쳐 답사했다. 가장 관심을 끈 유적은 공민왕릉이었다. 필자는 원래 통일신라 왕릉 제도에 관심이 컸다. 첫 논문이 통일신라 왕릉 제도에 대한 것이었고, 이어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고려왕릉 제도였다. 특히 공민왕릉 쌍릉이 가장 잘 갖추어진 제도였지만 갈 수 없는 곳 아닌가. 개성 답사 때 공민왕릉을 찾아가 구석구석 촬영을 완벽히 했었는데 그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인도의 석가모니 사리탑인 산치 대탑의 난간을 우리나라에서 도입해 창안된 왕릉 난간이 통일신라 이래 고려를 지나 조선 시대까지 맥을 이어오기 때문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사진 3(좌). 개성 천마산 자락 관음사 대웅전 뒷문에 조각된 만병(滿甁).
그림 1(우). 만병과 양쪽 물고기 그리고 윗부분의 쌍으로 표현한 오리 등 모두가 파란색이다. 채색 분석하면서 알았다. 그 모두가 상징도 같다. 연잎 중앙에 보주(寶珠)가 있고, 보주에서 번개가 나온다면 누가 믿을까.

특히 관음사는 인상이 깊었다. 개성 대흥산성 북문을 지나 천마산 기슭에 자리 잡은 관음사 대웅전 뒷문은 두 짝인데 뜻밖에도 만병이 조각되어 있다(사진 3). 강원도 정수사(淨水寺) 대웅전 정면 문에는 유명한 만병이 조각되어 있으나 모두가 꽃병으로 잘못 알고 있다. 네 문짝마다 맨 밑 부분에는 항아리가 있는데 절 이름이 암시하듯 정수(淨水), 즉 우주를 정화하는 물이 가득 들어 있으므로 정수가 가득 든 항아리 만병(滿甁)이라 불러야 한다. 그런데 세계에서 만병이란 말을 올바로 쓰는 학자는 필자 외에는 없다. 만병에서 우주목, 더 나아가 보주목이 나온다는 내용은 필자의 저서를 읽어주시길 바란다. 관음사의 만병 조각은 화조도와 통하므로 채색 분석한 것을 싣기로 한다(그림 1). 아래에는 물고기, 위에는 오리가 대칭으로 각각 있어서 흥미롭다. 이 문짝 표현이 만물생성의 근원을 표현했다고 증명하는 데 수십 년 걸렸다. 바로 부처님 모습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연기법은 오래전부터 여래가 출현하든 하지 않든 항상 법계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 이전에도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정각을 이룬 수많은 여래가 있었으며, 현재에도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여래가 존재하고, 미래에도 역시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여래가 나타날 것이라고. 이 진리는 후에 중생은 불성을 지닌다는 여래장 사상의 씨앗이 된다.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