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 타고 오신 관세음보살님

보현행자의 목소리, 나의 믿은 나의 다짐

2007-09-16     관리자

"홍선생 올해 나이가 얼마지?"
"마흔아홉이에요."
3년 전 성심사 주지스님이신 명우스님께서 우연히 물으셨다. 깜짝 놀래시며 "실수할 뻔 했구면, 난 홍선생 나이가 삼십오세쯤 될까 했는데... ."
근 십년을 어린이 법회에서 일했는데도 나이를 몰랐다는 것은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고 율동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자신도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새삼 놀랄 때가 많다. 성심사 어린이 법회에 들어올 때는 10년만 어린이 법회 일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는데 벌써 10년이 넘고 내 나이도 50이 넘어 흰머리가 나오니 어찌할 꼬... .
정말이지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나의 힘들었던 기억도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수예점과 중학교 미수강사로 나가던 나는 남편이 운수업을 하겠다며 일을 쉬라고 해서 모든 일을 포기하고 가사일만 했다. 남편의 운수업은 시작하자마자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쉐타공장, 의상실, 밧데리 공장 등등 자본없이 남의 빚을 지고 많은 일은 시작했지만 남편의 사업은 이름만 사장이지 너무너무 힘들었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첫아이부터 아들을 원하는 집안에서 딸을 낳고 또 딸을 낳고 또 딸을 낳으니 딸을 낳을 때마다의 괴로움과 고통은 소설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내 전생에 업보가 얼마나 컸던지 경제적 고통과 아들 못 낳는 고통, 또 다른 고통까지 겸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계속된 나날이었다. 백일기도 끝나면 또 백일기도, 일년내내 절에서 살다시피 기도를 했다. 그러면서 넷째딸을 낳고... .
셋째 딸을 낳고 부터 가세는 너무 힘들어 중학교 미술강사, 유치원 미술강사로 뛰다가 과외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꿈속에서 고불심 보살님을 보았다. 고불심 보살님은 내가 다니는 관음사에 부처님을 시주한 불심이 깊은 신도분이다.
보살님의 건물 앞에는 중학교가 있었는데, 중학교 정문에서 미수전시회가 열렸고, 그 미술 전시회에 여기저기서 보내온 화환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꿈이었는데 그 꿈을 꾸고 그 이튿날 화실을 한 번 해 볼까하고 고불심 보살님을 찾아갔다. 며칠 전만 히도 주산학원이 있었는데 어제 이사를 했다고 하시며 미술학원을 하라고 하셨다. 시간 맞춰 관세음보살님이 나를 인도하셨구나 하고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관세음 보살님 감사합니다."
관음화실이라는 간판을 걸고 화실 운영을 시작하였다. 모든 것이 별탈 없이 운영되었다. 그때만 하여도 미술학원이라곤 하나도 없고 타자학원 주산학원만 몇 개 있을 뿐 학원인가를 내는 일은 참 까다로웠다.
내가 학원을 정식으로 인가 내어 처음으로 온양 땅에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싶어 몸이 달았을 때쯤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나온 돈 많은 여자가 지방으로 시집와서 미술학원을 크게 잘 차린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경쟁자가 생긴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관인을 내야겠다고 생각해 교육청에 관인 미술학원을 신청했다.
며칠 후 교육청 직원이 나와서 검사를 한 걸과 모두 합격이고 평수만 1평 모자랐다. 사정을 해보았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도 없고 옆 건물을 임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아 어떻게 한담!" 앞이 캄캄했다. 지금 이곳도 힘겹게 얻었는데 다시 돈을 빌린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날이 더할수록 불안감은 더 커져 갔지만 용기를 냈다. 몇 해 전에 인연을 맺게된 청우 스님께서 용기와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힘들면 관세음보살을 찾아라. 관세음보살님을 일심으로 찾으면 뭐든지 들어주신다."
나는 간절하게 관세음보살님을 찾았다.
청우 스님께서는 관음기도의 영험담과 아울러 한국의 3대 관음 도량인,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그 중에서도 홍련암 얘기를 잘 해주셨다. 홍련암 관세음보살님을 찾아가서 미술학원 인가 내 주십사 간절히 기도하면 이뤄질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들 넷을 데리고 가지니 그 아이들에게 신경 쓰여 기도가 될 것 같지 않고 두고 가자니 보아줄 사람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생각다 못해 절에 가서 대각심 회장님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관음행, 부처님은 어디든지 다 계셔, 홍련암 안 가도 기도를 열심히 하면 다 들어 주실거야, 아이들을 어떻게 다 데리고 간다고 그래."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너무 고마웠다. 나는 왜 거기까지 생각 못했을까? 맞아 마음인데... . 그 이튿날부터 관음사에서 마음을 모아 열심히 기도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남편이 생할능력이 없으니 나라도 아이들을 열심히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기도했다. 아! 이게 웬일일까?
3일 기도 끝나는 전날 밤 꿈에 낙산 푸른 동해바다 위 공중에서 예쁜 가마를 탄 관세음보살님이 날아오시는데 선녀들이 풍악을 울리며 관세음보살님을 호위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환희에 넘쳐 쳐다보고 있는데 구척같은 관세음보살님이 가마에서 내려 내 앞에 서 계신 것이 아닌가!
감사함과 경이로움에 무조건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했다. 푸른 동해바다 가마 타고 오신 관세음보살님 아! 아! 꿈을 깨고 난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튿날 뭔가 될 것 같은 느낌에 기도를 끝내고 반려된 서류를 들고 교육청에 부랴부랴 들어갔다. 서류를 내밀자 두고 가라고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등록증이 우편으로 왔다.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후 위층에 사무실 3평을 다시 내고 떳떳하게 하다가 서울로 이사를 했지만 그날 이후 반평생을 천진하고 순수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웃고 놀며 미래의 꿈나무를 키워가고 있다.
그리고 딸만 낳았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할 뻔한 나를 또다시 관세음보살께서 살펴 주셔서 막내인 아들이 대학에 다니고 있다.
인연이란 묘한 것, 살다보면 많은 인연을 만나지 부처님께서는 특별히 나에게 아이들과의 인연을 맺어 주셨나보다.
학원 아이들과 지내다보니 이것이 내 천직이지 했는데 은평 포교원 어린이 법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윤지원스님은 불교포교하는 아이템도 너무 좋았고 몇 곱으로 열심히 포교를 하셨다. 금강경, 반야심경, 보현행원품 사경 등등 또 어린이 법회, 청년회법회, 가족법회, 합창단, 조직적이고 질서있게 빈틈없이 하셨다. 명우 스님 또한 수행에 제일이신 분이며 다정다감하시다. 난 정말 복도 많다. 스승 복도 많고 아이들과의 인연 복도 많다 어린이를 무척 좋아하지만 이건 부처님의 특혜라 생각된다. 나이도 없이 아이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노래를 함께하고 , 함께 레크레이선도 하고... .
부처님께 감사하고 스님께 감사한다. 작년에 불광에서 주최한 부처님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성심사 어린이회가 단체상과 그외 다른 상을 탔고. 가을에 도선사에서 대상 우수상등등을, 그리고 또 올해 어린이날 불광의 부처님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대상 금상 등등을 탔다. 이 상들을 타기까지는 한국 어린이법회 최고령자 교사인데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 자신이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찬불가, 부처님 그리기를 많이 연습시켰다.
일주일 내내 일을 했기 때문에 피곤하지만 아이들 앞에만 서면 저절로 힘이 솟고 즐겁다.
남들은 그만 아이들 공부는 손을 놓고 작품이나 하라지만 이미 전생부터 빚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면 불교유치원을 세우고 싶은 원으로 오늘도 분주히 쉴 새 없이 아이들 틈속에서 환한 웃음으로 일하고 있다.
나무 관세음보살.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