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과의 일상다담] 마음을 하늘에 도장찍듯

대흥사 주지 법상 스님

2020-07-27     최호승
해남 대흥사 | 법상 스님
1992년 은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93년 송광사에서 보성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2003년 통도사에서 보성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2019년 종덕 법계를 품수했다.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 상임감찰, 호법과장, 포교원 신도국장, 무안 법천사 주지, 대구 안일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벌써 1년이다. 2019년 7월 주지 임명장을 받았다. 다른 교구본사 주지스님보다 비교적 젊은 축에 들었다. 세납 46년, 아직 50대 전이었다. ‘신뢰’를 앞세웠고, 선택을 받았다. 취임 전 소감이 “어른스님 깍듯하게 잘 모시며 화합하고 정진하겠다”였다. 중간세대로서 심부름꾼 역할도 자처했다. 

궁금했다. 중간세대가 모시는 대흥사라는 큰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지.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전각들과 초목이 주는 세월의 자연스러움, 그 안에 깃들어 살아 움직이는 신심, 친절한 스님과 종무원들, 코로나19에도 도량을 찾아오는 객들…. 차 한 잔 마시러 찾았던 두륜산 해남 대흥사는 온몸으로 답을 하고 있었다. 주지 법상 스님은 우전차(雨前茶, 곡우를 전후해 딴 찻잎으로 만든 차)를 내렸다.


| 소풍 같은 울력과 차 그리고 옛길 

숨부터 골랐다. 주지스님 일정은 빽빽했다. 법상 스님은 차담을 나누기로 약속한 날 오전에 해남군에 다녀왔다. 대흥사의 옛 모습을 되살리려는 회의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지금은 객을 맞이하는 동국선원(東國禪院) 일로향실에서 스님과 다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곡우(穀雨, 4월 20일) 전후에 찻잎을 따 구증구포(九蒸九曝, 9번 찌고 9번 볕에 말림)로 덖은 따뜻한 녹차를 마셨다. 자연스럽게 오전에 있었던 회의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님은 처음 아이디어와 달라진 계획을 우려했다. 랜드마크 등 갖가지 조형물을 길에 설치하는 제안이 못마땅했단다. 

“대흥사에 드는 진입로를 옛길로 복원하는 일인데, 콘셉트가 ‘길과 정원’입니다. 차가 다녔던 넓은 아스팔트 길을 사람이 걷는 흙길로 만드는 겁니다. 대흥사가 세계유산인 이유는 천혜의 자연과 목조건물의 자연스러운 배치, 신행과 예불 그리고 역사 등 그 자체가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200년 300년 뒤에도 대흥사를 찾는 사람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스님은 복원한 옛길 설계 완성까지 TF팀 등 논의기구에 대흥사 참여를 요구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대흥사 옛길 복원이 엇나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초목이 길 위 하늘을 수놓고, 부드러운 흙이 길 아래를 감싼다.’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차 맛도 좋다. 

우전차는 대흥사 자랑이기도 했다. 선다일여(禪茶一如)의 경지였다는 초의 스님이 대흥사 일지암에 주석했고, 대흥사는 지금도 차밭을 가꾸며 차를 덖는다. 법상 스님이 내린 차는 올해 스님 20여 명의 울력으로 덖은 차다. 일상다담 인터뷰 섭외 전화 때 찻잎 따고 있다던 스님의 답변이 떠올랐다. 바쁜 사찰 종무행정에도 대흥사 전통을 잇는 주지스님의 울력이 고마웠다. “내가 주지”라며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했지만, 아니었다. 찻잎 따고 야외 움막에서 차를 덖는 울력에 몸은 힘들었지만, 사중스님들과 야외에서 도시락으로 함께 점심공양을 하니 소풍처럼 좋았단다. 

 

| 방황 끝에서 찾아온 대비주

교구본사라는 큰 사찰 주지스님이 직접 목탁 들고 주력 수행을 이끄는 점도 신선했다. 그것도 취임하자마자 곧바로 주력 수행공동체를 시작했다. 매월 첫째 주 토요일에 ‘천수대다라니 108독 기도’ 법석을 열었다. 8개월을 이어갔다. 불교세가 약했던 지역에 수행 바람이 불었다. 초하루법회 때 100여 명도 안 모이던 대흥사였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 수행 첫 법회에 70명 정도 모이더니, 3~4개월 지나자 200명, 300명이 됐다. 시쳇말로 탄력을 받았다. 코로나19가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코로나19가 끝나면 다시 시작해야죠.” 스님은 무척 아쉬워했다. 세계적인 대유행이 돼버린 전염병이 제동을 걸어서다. 그냥 넘기긴 아쉬운 대목이었다. 물었다. 종무행정 맨 앞자리인 주지 소임자가 왜 수행공동체 맨 앞자리에서 목탁을 치는지. 뜻밖에 오래된 고민의 해법이었다는 답을 들었다. 

법상 스님은 어릴 때 입산했다. 부처님 시은 입고 출가수행자가 됐지만 특별히 남들보다 장점이 없다고 느꼈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에게 화두 받고 열심히 정진했다. 공부는 더뎠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고, 스님으로서 가치관 혹은 원력의 부재는 컸다. 그냥저냥 시줏물 축내며 절집에 살 수는 없었다. 방황이 시작됐다. 27세 때 일이다. 

“세속에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없었고, 절집 안에서도 불안정했어요. 안팎이 그랬습니다. 위기였죠. 위기 때 어떤 마음을 내느냐가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절집 공부가 헛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력 수행하면 지혜가 생기고 업장도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스님으로서 살림살이가 나아질 거라 믿었죠.”

우문을 던졌다. 왜 신묘장구대다라니(=대비주)인가. 왜 대비주(大悲呪,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찬탄하고 관세음보살의 삼매를 나타내는 다라니)였을까. 스님은 “관세음보살이 좋다”며 웃었다. 『천수경』의 중추인 신묘장구대다라니는 관세음보살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천 개 손과 천 개 눈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는 관세음보살의 마음이 좋다는 스님이다. 

법상 스님이 몇 가지 이야기를 더했다. 경허 스님 제자 수월 스님은 물론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았던 숭산 스님도 참선 입문 전 100일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 수행을 했단다. 

법상 스님도 대흥사 북미륵암에 올라 하루 4차례씩 21일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정진에 몰두했다. 2년쯤 정진했을까. 바랑을 주섬주섬 들쳐메고 인도와 중국으로 향했다. 부전 소임을 살며 모은 보시금을 경비로 썼다. 오토바이를 탔다가 덜컹거리는 버스 의자에 앉았다가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했고, 인도나 중국에 절을 세우고 포교하는 자신을 그려보기도 했다. 

“고민이 깊었던 만큼 절절하게 기도했어요. 가치관을 정립하고 불보살의 가피도 입은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참 복에 겨운 삶이었네요.”

대흥사에서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 ‘반야(흰색)’와 ‘보리(검은색)’가 법상 스님과 스킨십을 나누고 있다.

| 젊은 주지스님의 고집, 기도

법상 스님이 꺾기 싫은 고집(?)이 있다. 종교를 떠나가는 시대라고 불리는 지금, 다시 기도를 꺼내 들었다. 수행이 곧 기도이며, 기도가 바로 수행이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시작했단다. 고리타분할 수도 있지만, 스님 생각은 확고했다. 사실 불교 관련 정보나 지식은 속된 말로 인터넷에 차고 넘친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해보지 않으면 누구도 모를, 체험의 영역 안에서 종교를 찾아볼 수 있다. 기도였다. 

“과거에는 기도와 스님들 위의, 불보살 가피 등이 불교의 주 테마였고 이미지였어요. 기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정성스럽게 공양미 이고지고 법당에 와서 기도했습니다. 복원이랄까?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불자다움’을 고민했고 기도가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기도가 깊어지면 삶의 지혜도 열립니다.”

기도로 얻는 삶의 지혜가 궁금했다. 스님은 조심스럽게 살림살이를 꺼냈다. “깨달음이라고 하긴 뭐하고, 의식의 전환은 생긴다”고 했다. 어떤 원인이 ‘나’와 접촉하면 경험적 지식과 감정들의 집합체가 ‘반응’해서 ‘결과’를 내는데, 기쁘거나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화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 그것이 또 ‘나’로 축적된다고 스님은 설명했다. 기도가 깊어지면 반복의 고리를 알게 되고, 고리를 끊고자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스님이 얻은 통찰이었다. 가령 어제 미웠던 사람은 오늘 만나는 사람과 다르니 굳이 과거 감정을 꺼내 미워할 일이 없단다. 애써 과거의 부정적인 감정 소용돌이에 휘말려 오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처럼 들렸다. 

식은 차를 급하게 들이마시고 물었다. “스님,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삶이란 점멸하는 불꽃입니다. 영겁이라는 긴 시간 속에 우리 삶은 눈 한 번 깜빡하는 순간이죠. 환하게 빛 발하며 타오르다 갈 일입니다. 불꽃처럼 점멸할 때 마음을 하늘에 도장 찍듯 겉과 속이 같고, 겸손한 출가수행자로 살아갈 일입니다.”

천천히 차를 마시는 법상 스님의 손에 눈길이 갔다. 찻잔을 받쳐 든 가지런한 두 손, 스님은 같은 답을 내놓고 있었다.

 

글. 최호승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