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불교 생활] 아픈 영혼들(Sick Soul)

2020-07-25     원제 스님

수행 전성시대입니다. 간혹 ‘모든 사람에게 수행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합니다.
“아니요. 수행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고, 수행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은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은 사람의 상황과 필요에 따른 선택 사항이지, 무작위의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은 약 먹을 필요가 없듯, 건강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소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만 수행합니다. 예로부터 깊은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나 종교 지도자들은 정신적 결핍과 삶에 대한 비관을 계기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정신적으로 충족을 느끼고 삶을 낙관하는 상태에서 수행을 시작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이미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이라면 애초에 수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수행을 통달한 부처님도 사성제(四聖諦)에서 고성제(苦聖蹄)를 첫 번째로 천명하셨습니다. 그만큼 고(苦)는 보편적 진리면서 수행의 출발점입니다.

 

| 붓다와 예수와 공자의 공통점

우리가 성인이라 여기는 분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고의 크기나 정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 사색하는 수준이 남달랐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인도 사회 전통에 따라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키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삶에 대한 질문과 사색으로 이끌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난 예수님도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진정한 아버지는 천상 세계에 있는 하느님이지만 현실 세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 남달리 고민했을 것입니다. 공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는 노나라 하급 무관이었던 공흘의 아들이었는데, 공흘은 공자가 태어난 지 3년 만에 죽었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공자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편견을 온몸으로 받으며 평탄치 않은 유년기를 보냈을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예수님, 공자 모두 부모의 부재라는 공통된 결핍 상황을 겪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지만, 어찌 보면 부모의 결핍이라는 상황이 이 성인들의 필연적 운명이었을 수 있습니다. 상실과 결핍은 고통을 수반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에 대한 예민한 감지와 깊은 통찰이 감수성과 안목을 키워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자 보호자입니다. 부모의 부재라는 숙명과도 같은 결핍을 겪은 세 명의 성인들은 유년기 때부터 사색의 깊이가 남달랐고, 정신적 성숙이 빠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상 행복을 느끼는 건강한 사람은 고통에 대해 성찰할 필요를 못느껴 삶의 본질에 관해 탐구하거나 수행하는 데 관심이 적습니다. 삶을 즐기며 누리는 여유가 있습니다. 괴롭고 불행한 사람은 그들과 다릅니다. 삶을 사색하고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 구도의 여정에서 몇몇 사람들은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거나 깨달음을 얻습니다.

 

| 아픈 영혼들을 위한 찬가

고결한 성인들에게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저 역시 유년기부터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부모님이 건재했고 나름대로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나’라는 존재가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겉으로는 나름의 구실을 하며 그런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치 세상에서 5cm쯤 떨어져 세상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없는 듯한 ‘분리감’을 느꼈습니다. 이 때문인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심이 유달리 강했습니다. 그 부작용이겠지만, 십대 때부터 반항심이 유달리 강했고, 사람이나 세상에 대한 미움도 컸습니다. 도대체 왜 세상에 원만히 동화되지 못한 채 분리되는 듯한 느낌으로 고통스러워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이런 저의 오랜 습성을 꿰뚫어 봤는지, 대학교 선배 하나가 혀를 끌끌 차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너 같은 놈은 Sick Soul이야, Sick Soul!!”

1902년,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람을 두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한 종류는 이 세상을 단 한 번 사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한 종류는 거듭남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건강한 마음의 소유자들(Healthy-minded)’입니다. 이들은 낙천적인 성품을 지니고 세상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아픈 영혼들(Sick Soul)’이라 하는데,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며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 수행자의 경우 후자에 해당했던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고통에 대한 인지와 수용이 그들을 수행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선배는 저를 놀리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워하는 심정에서 ‘Sick Soul’이라고 불렀지만, 제게는 이 말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위안이자 희망처럼 느껴졌습니다.

 

| 크게 죽어야 도리어 깨어난다

선문(禪門)에 ‘대사각활(大死却活)’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게 죽어야지만 도리어 제대로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고통이나 의심은 언뜻 삶의 부정적 요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부정적 요소를 깊이 체화할수록 오히려 삶에 대한 깊은 안목과 깨달음이 재탄생한다는 것을 여러 성인의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삶의 진리이기도 한 이 고통을 꼭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패와 좌절, 결핍과 상실이라는 고통이 동시에 그 고통에서 벗어날 기회를 열어줄 자양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란 그런 것입니다. 고통을 깊이 감지하고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수행을 통해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도 합니다. 영혼이 처하게 된 고통은 그 영혼이 자유로 나아가는 관문입니다. 고통이 있으면 그 뒤에 자유도 있습니다.

수행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수행자란 이 고통에 대한 감지 능력이 남달라 괴롭고 힘겨운 사람들입니다. 수행을 그럭저럭해나가고 있는 듯한데도, 왜 이렇게 여전히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께 저는 어쩌면 아직 임계점을 통과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 임계점은 고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김없이 받아들이는 수행을 통해 가까워진다고 덧붙입니다.

고통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조금 앞서 있을 뿐입니다. 고통을 상대하거나 피하려는 데에서는 절대로 자유를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향해 일체로 들어가야만 자유가 펼쳐집니다.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여 고통을 상대하는 나조차 고통으로 완전하게 충만해지는 순간, 모든 고통이 본래 있었던 모든 자유로, 변하는 바 없이 모두 변하게 됩니다.

 

글. 원제 스님

원제 스님
2006년 해인사로 출가, 도림법전 스님의 제자로 스님이 되었다. 2012년 9월부터 2년여간 티베트 카일라스를 시작으로 5대륙 45개국 세계 일주를 했다. 이후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좌우명으로 지내고 있다.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로 현재 김천 수도암에서 수행 중이다. 저서로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2019, 불광출판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