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철학자의 사색] 숲으로 철학하기

2020-07-28     김용규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에서 철학과가 사라지기 시작한 지는 꽤 됐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이 밥이 되기에 너무 어려워진 세태 탓일 것이다. 당신의 직관으로 나름 세상을 미리 읽고 계시던 나의 선친께서도 유년의 내게 장차 글을 쓰거나 철학을 하며 살지는 말라 하셨다. 삶이 곤궁해지고 위험해질까 염려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 자식이 부모 뜻대로만 되는 존재던가? 또 한 사람에게 운명이란 것이 어찌 그의 의지대로만 다가와 주던가? 그 지침을 주시던 아버지의 나이를 통과하고 있는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숲의 철학자로 불리는 삶을 살고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을 전문으로 연구한 사람도 아닌 나를 사람들은 왜 그렇게 부를까? 숲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니! 십수 년을 숲에 머물며 숲을 읽고 느끼면서 살고 있으니 숲에 대해서는 할 말이 조금 있다 치더라도, 철학이라니! 철학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개념을 갖기 시작한 얼마 전에야 나는 그 맥락을 이해했고 쑥스럽게 여겨지던 그 호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에게 철학은 통상 거창하거나 골치 아픈 것, 혹은 낯설거나 복잡한 것, 심지어 실용이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자칫 삶을 가난하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영역의 일부에 해당하고 더러 타당할 수 있는 인식일 것이다. 깊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철학은 우리에게 공기와 같고 물과 같다. 알고 보면 우리는 날마다 철학적으로 살고 있다. 학제적 엄밀성을 벗어버리고 조금 편하게 생각해보면 철학은 크게 네 덩어리다. 논리와 관점, 윤리와 실천이 그것이다. 우선 논리를 바탕에 깔고 다음으로 관점으로 시동을 건다. 예컨대 ‘돈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고로 돈은 만능이다’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치자(인식론). 이제 그는 돈에 관한 자신만의 규범과 윤리를 세우고 그것으로 무장하게 된다(윤리론).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실천론). 이제 그는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는 태세로 삶을 살 가능성이 크다. 통상, 이 일련의 흐름에는 자신만의 논리가 깔려 있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으로 철학을 정의하고 바라볼 때 내게 숲으로 철학하는 삶이 시작된 것은 마흔이 넘은 어느 날이었다. 생뚱맞게도 그것은 한 그루의 소나무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 어릴 적 소나무는 뒷동산과 앞동산에 지천이었다. 그 시절의 소나무는 내게 인간의 일상에 이로운 나무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송편을 찔 때 시루에 깔기 위한 솔잎, 구들방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쓰기 위한 솔잎, 그리고 땔감으로 쓸 삭정이, 집 지을 때 쓰는 목재, 대보름날 쥐불놀이 때 밑불로 쓸 관솔을 제공하는 이로운 나무 정도로만 경험되고 인식된 것이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완벽하게 인간에게 필요한 자원의 하나에 불과했다. 나는 소나무를 그저 대상적 지위로만 바라보고 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날 나는 수락산의 소나무 한 그루에서 그의 삶을 보게 되었다. 융기한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의 한복판, 흙 한 줌 고이지 않은 자리에 소나무가 그 바위를 뚫고 높지는 않으나 당당한 굵기로 자라고 있었다. ‘저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저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의 가난한 탄생에서부터 삶의 장엄한 분투와 꽃을 피우기까지의 생이 스크린처럼 흘러갔다. 그날 나는 열일곱 즈음에 품었던 내 삶에 관한 근원적 의문 하나를 풀었다. ‘나는 왜 스위스 같은 나라가 아닌 분단국가, 그리고 서울이 아닌 깊은 골짜기 산촌 가난한 아버지, 글 모르시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것일까?’ 소나무가 말 없는 말로 내게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태어난다는 것은 본래의 것이라네. 그것은 오직 주어지지. 산다는 것은 그 주어진 자리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며 자기 꽃을 피워 나가는 것이라네. 절벽 끝 불모의 땅에 떨어진 진달래가 어떻게 사는지도 보시게. 옹벽 위에 떨어진 민들레 씨앗이 어떻게 자기를 제약하는 관계를 넘어서며 삶을 받들어 제 꽃을 피우는지도 만나보게. 온 생명이 그렇게 살아 자기의 길을 갈 때 그 사소한 듯 보이는 숭고함이 사방팔방에 피어나며 세상을 밝히지 않던가? 마침내 제 삶을 사랑하고 제 길을 걷는 모든 존재들의 생, 그 향연이 화엄(華嚴)을 이루지 않던가!’ 

순식간에 찾아온 놀라운 경험이었다. ‘자원’으로만 바라보던 소나무에 대한 관점(인식론)이 나와 다르지 않은 한 생을 사는 ‘존재’적 관점으로 전환되자 나의 윤리와 실천은 차츰, 그러나 전면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만 아픈 존재가 아니라 풀도 나무도 새도 뱀도 지렁이도 지네도 모두 아픈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 밖의 세상을 향한 연민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삶은 훨씬 평화롭고 풍성해졌다. 숲으로 철학 하기는 관점의 전환,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된다.

 

글. 김용규

김용규
숲의 철학자. 숲을 스승으로 섬기며 글쓰기, 교육과 강연을 주로 한다. 충북 괴산 ‘여우숲’ 공간을 연 설립자이자 그곳에 세운 ‘숲학교 오래된미래’의 교장이며 ‘자연스러운 삶 연구소’의 대표다. 숲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고 마침내 진정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저서로는 『숲에게 길을 묻다』, 『숲에서 온 편지』, 『당신이 숲으로 와준다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