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탐방] 팔공산 파계사 고송(古松) 큰스님

불교는 범부의 몸으로 성현이 되는 도리입니다.

2007-09-16     사기순

고송큰스님은 1906년 10월 10일 경북 영천군 신령에서 출생하였으며, 1920년 팔공산 파계사에서 상운(祥雲)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석응(石應) 스님께 사집을 배우고 발심, 19세에 양산 통도사 선방에서 정진을 시작으로 금강산 마하연 동지에서 수행정진 하였다. 1923년 용성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쉬, 1925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30년 결사를 하였다. 방한암 스님께 고송(古松)이라는 법호와 함께 "경도 읽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며 말없이 상재하니 이 무슨 종(宗)인고, 풍류 아닌 곳이 풍류가 넘치니 푸른 묏부리에 천년 묵은 고송이 빼어났네(不讀金文不坐禪 無言相對是何宗 非風流處風流足 碧峰千年秀古松)"라는 전법게송을 받았다. 족P종 감찰원장, 파계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파계사 조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서 중생들에게 잔잔한 수행의 그늘을 드리워주고 계시다.

불두화꽃 이 만발한 파계사 내원 뜨락의 정경은 진정 평화로웠다. 맑고 투명한 산사의 내음, 풋풋한 그 향기... . 92세의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리를 꼿꼿이 펴시고 앉아 계시는 고송 큰스님의 적정은 짐짓 경이로웠다.
"큰스님, 큰스님"하며 여쭙자, "큰스님 여기 없소. 키 큰스님은 아랫절에 많이 있을 거요." 일성을 터뜨리신다. "그래 어디서 왔지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울에서 왔으면 그 전에는 어디서 있었노?" 하시며 빙그레 웃으신다. 그 미소가 너무도 천진했고 그 질문은 또한 너무나 날카로웠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라, 부모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 있었는가. 온 곳도 모르고 가는 것도 모르며 살아가는데 그것만 알면 됩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자비가 녹아 있는 중생사랑의 법문이었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해결의 말머리인 화두를 주신 스님, 스님께선 이미 주셨지만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그릇이 작아서 이러저러 여쭐 수밖에 없었다.
"내 모양이 어디 보이겠나, 제 얼굴도 못 보면서 남의 얼굴을 그려가겠다고. 참말로 웃긴다. 내 말이 중요한게 아니예요. 세월 퍼뜩 갑니다. 공부하세요.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란 말입니다. 밖에 있는 게 아니고 제 안에 있어요. 모두가 부처예요. 알겠어요. 아이고 오늘도 쓸데없는 소리 많이 지껄였네. 저녁공양시간이니 가서 공양 드세요. 찰나찰나가 중요한 겨예요. 이 시간 지나면 다시는 안 옵니다."
하룻밤을 묵으며 가진 스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우문현답, 진리는 안전에 없고 오로지 목적달성을 위한 어리석은 질문을 해대는 기자에게 스님은 자기 안에 본래 깃들어 있는 불성 드러내는 길을 은연중에 보여 주셨다.

스님께 몇 말씀 더 듣고 싶어 왔습니다.
"내 살림살이 여기에 다 들어 있어요. 볼 수 있으면 보고 가세요. 살림살이 이래 궁색하게 사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저기 저 꽃한테 배우고 가세요. 저 꽃이 지금 한창 만발해 있지요. 저게 영원하겠어요. 아니예요. 며칠 후면 시들기 마련이에요. 꽃이 피고 시드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꼭 같아요. 젊을 때 공부해야 해요. 늙으면 몸이 녹슬어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움직이기도 힘들거든요. 공부는 젊을 때 용맹정진해야 하는 겁니다."

스님, 공부방법을 일러주십시오.
"나(我相)를 버리는 공부, 욕심을 버리는 공부를 하세요. 나라는 놈만 끊으면 부천데 그게 쉽지는 않지요. 한번 질이 들으면 죽어도 끊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나에 집착하는 데 사람이 질이 들어서 그래요. 자기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면 나와 남이 따로 잇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의존해 있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요."

스님, 평생 동안 참선수행해 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자기 본래면목을 찾는 방법이 참선이에요. 끊임없이 화두를 들고 의심해 들어가다 보면 얻는 게 있어요. 그러나 얻을려고 하면 얻지 못해요. 깨달음 이라는 것도 깨달으려고 하면 장애가 생겨 깨달음은 팔만사천리로 멀어져 갑니다.
모름지기 알음알이를 떨쳐버려야 해요. 참선은 아는 것은 다 버리고 모르는 데로 들어가는 공부예요.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다 알라고 설치고 안다고 설치고 제가 옳다고 설치기만 해요. 참으로 자기는 모르면서 참으로 자기를 알 수 있는, 아는 데서 모르는 데로 들어가는 것을 하려들지 않아요. 참으로 모를 때 알아지는 것입니다. 참선은 백날 설명해도 모르는 것이지요. 실제로 하루에 한 시간씩이라도 해보면 차츰 알게 돼요. 참선을 하다보면 마음 자리를 알 수 있고, 번뇌망상이 저절로 스러집니다."

가끔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참선을 할 때가 있는데 참선하기 전보다 더 산란해지는 것 같던데요?
"그게 다 공부가 돼가는 겁니다. 평소에는 바깥경계에 푹 절어 잇기 때문에 번뇌망상이 얼마나 치성한지 느낌조차 없었던 겁니다. 고요히 앉아 있다 보면 처음에는 속이 더 시끄러운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에요. 그 망상분별심이 없어서는 또 안 되요. 그게 성불하는 데 비료인 겨예요. 그래 말이 있잖아요. 번뇌 즉 보리(菩提)라고.
처음 참선할 때 넘나들던 번뇌망상의 그 단계를 넘고 또 넘어서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산하대지가 확 열리는 경지를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경계에 속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스님, 불교를 한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혁범성성(革凡成聖)이라, 불교는 범부의 몸으로 성현이 되는 도리입니다. 어렵다고 보면 한없이 어렵지만 한 생각 돌이켜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아주 쉬운 길이에요.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보니 일체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결국 불교는 본래 제 몸 속에 지닌 부처를 드러내는 길입니다. 중생이다 하는 그 관념이 전도된, 그러니까 거꾸로 된 견해라는 겁니다. 그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바로 놓아 부처되어 사는 길이 바로 불교입니다.

세상에는 악한사람도 있고 착한 사람도 있고 근가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모두에게 똑같이 불성이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일반인들에게는 납득이 잘 가지 않을 듯합니다.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불성존재(佛性存在)라는 점에서는 다 똑같아요. 그때 그때 경계에 따라가서 변화무쌍하니 문제지요. 악한 데 가면 악한 노릇하고 착한 데 가면 착한 노릇하는 게 범부예요. 그러나 또 그 몸 가지고 부처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수행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너절한 것 다 버리고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마음을 얻는 것이에요. 착하고 악한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집중하여 한 생각 돌리면 부처가 될 수 있어요."

한결같은 마음, 한 생각 돌리면 부처... 스님, 그 마음이란 게 또 묘한 것 같습니다. 마음이란 말을 늘상 쓰고 있으면서도 정작 마음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심여수(心如水)라.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 저 낙동강 물을 보면 어릴 때 보던 물과 지금의 물은 다른 것 같지요.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되고 형태가 다 달라보이지요. 그러나 언제라도 변하지 않는 물의 성품이 있어요. 물은 젖는 게 목적이지요. 언제 어느 때라도, 더러운 물이든 깨끗한 물이든 수증기든 얼음이든 젖는 성품에는 변함이 없지요. 마음도 그것과 똑 같습니다.
마음이 덤벼드는 것은 애나 늙은이나 다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몸은 비록 늙을지라도 마음은 늙지 않아요. 늙어 빠져 종래에는 버려야 하는 이 육체를 가꾸는데 힘쓰지 말고 철저하게 늙지 않는 이 마음은 뭔고 하며 궁구해 보세요. 그렇게 하다보면 마음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선이 뭐다 얘기해줄 수 없는 것처럼 마음 역시 말로는 설명이 안 되요."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쉽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네요.
"그러니 말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수행해야 그것도 목숨 내놓고 철저하게 자기를 내던져서 수행해야 자기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바깥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자기를 바로 보면 우주 자연의 이치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성불(成佛)을 견성(見性)했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스님, 15살 되던 생일날 산이 좋고 절이 좋아 홀연히 출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중이 날마다 출가하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야지 따로 출가가 어디있겠어요. 하루라도 참으로 공부해야지 온전한 출가라고 할 수 있지요. 산 넘어가 우리 본가인데 그야말로 나도 모르게 이끌려서 왔어요. 마음이 편하고 좋아서 머무르게 되었지요. 인연이 어디 하루 이틀 인연이겠어요."

스님, 도봉산 망월사에서 하신 30년 결사에 대해 여쭤도 될는지요?
"수행이야기라는 것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백용성 스님, 동산스님, 고암 스님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선지식을 모시고 결사에 들어서 석 달만에 일을 끝냈지요."

30년을 어떻게 석달로?
"찰나간에 끝내는데 무슨 시간이 필요한가요. 하루 이틀 시간에 속지 말아야해요. 날마다 하루예요. 순간 순간 찰나찰나에 삶과 죽음이 넘나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6.25 때 다른 스님들은 다 피난을 간 해인사를 지키셨다는 얘기며, 인민군에 쫓겨오신 구산 스님을 구하신 이야기를 주윗분들에게 감동적으로 들었습니다.
"다들 부산으로 피난가고 그때 당시 인민군 위원장이 해인사 주지를 맡는 등 어수선 했지요. 나는 나이가 많아서 동원령에서 빠질 수 있었고, 법당 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큰 화는 면할 수 있었지요. 노전에 거처하고 있을 땐데 한밤중에 시커먼 게 뛰어들어오는데 구산 스님이라, 근데 어디 숨길 데가 있나요. 방 한쪽에 조그만 지재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숨게 하고 문에다 누더기를 걸러놓았지요. 인민군이 내놓으라 하는데 모른다고 잡아떼니 도끼눈 Em고 방안 구석구석을 돌아 보고는 나가더군요."

위급한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지혜로이 대처하신 것, 그게 바로 법력, 참선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지. 참선을 하면 내 중심이 딱 서고 만사에 태연자약할 수 있는 뱃심이 길러지는 것은 사실이에요."

스님, 예전에 와사풍이 오셨을 때 기도해서 나으신 이야기, 꿈속에서 관세음보살님께서 침을 놓아주셨고, 또 재작년인가는 미끄러지셔서 허리를 다치셨을 때 별 치료 없이 완쾌되시어 의사도 혀를 내둘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선수행을 워낙 오래 하셔서 자연 치료가 됐다고... .
"그건 또 어디서 들었노. 나도 다 잊어버린 이야기가 언제 소문이 났노. 그런 일은 예사로운 것이에요. 관세음보살은 대의왕입니다. 누구라도 큰 원력을 세워 기도를 하면 가피를 내려 주십니다. 요즘사람들은 참선을 무슨 신비한 묘약으로 생각하는데 그건 삿된 생각이에요. 맑고 깨끗한 본성자리를 찾자는 것이지 건강이나 병을 났구는 것이 걸리면 안됩니다."

스님,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말씀 해주십시오.
"요즘 사람들을 보면 대개 얼굴에 불안이 가득 차 있어요. 마음이 공중에 둥 떠있는 것 같고... 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뻐기고 있지만 편안해 보이지는 않지요. 왜 그런고 하면 아상에 찌든 욕망이 꽉 차서 그래요. 욕망대로 안 되면 불안해하고 허둥대는 인생이 많아요 .그 욕망 때문에 인간도 죽고 아무 죄 없는 자연도 죽습니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을 끊으면 그대로가 평화로운 불국토에서 살라갈 수 있을 겁니다. 평생에 익힌 것이 탐심, 진심, 치심뿐이라 쉽게 끊어질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불자라면 노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손바닥과 손등은 하나예요. 욕망에 탐착하여 불안한 것도 손바닥 뒤집듯이 확 한생각 돌리면 훨훨 대자유의 경지에 들 수 있습니다."

스님, 끝으로 우리 불자들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덕목 한 가지만 당부해주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야 합니다. 포교는 스님네들보다 오히려 불자들이 담당할 몫이 더 커요. 사섭법 중에 동사섭(同事攝)이 제일입니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덮어놓고 해서는 안 되고 나를 철저하게 버리고 중생의 근기따라 몸을 나타내되, 중생과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진리의 길로 자연스럽게 이끌어야 합니다. 부질없는 육신에 집착하지 말고 닳고 닳도록 끌고 다니면서 좋은 일에 힘쓰세요. 모쪼록 자만심을 머리고 동사섭해서 불국토를 가꿔 나가세요."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