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한 물건] 물건을 찾습니다

2020-06-23     김현

물건에 할애하는 마음(애정)이란 게 있다면 나는 대체로 ‘첫 마음’을 넓게 잡는 사람이다. 물건을 가졌다는 즐거움보단 물건을 갖게 된다는 데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할까.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 않은 탓에 나는 여행지에서 매번 호들갑스럽게 산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잡동사니 상자에 담아두길 어려워하지 않고, 새로 산 안경이나 카드지갑, 심지어 휴대전화를 잃어버려 놓고도 한참을 모른 채로 지낸다. 사라졌구나, 알아챈 뒤에도 찾으면 좋고 못 찾아도 어쩔 수 없지, 하며 나 자신을 너그러이 타이른다. 언제부터 그랬나, 하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물건을 아낄 줄 모른다며 어머니에게 등짝을 여러 번 맞았던 기억. 그때마다 항변했다. 물건을 아끼지 않는 게 아니고 물건에 미련이 없는 거예요(말하면 어머니는 눈을 흘겼고), 제가 물건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물건이 저를 잃어버린 걸 수도 있잖아요(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등짝에 다시 불이 붙었다).

대학 졸업 후엔 영세한 회사에 다니며 ‘서울살이’를 해야 했기에 물건을 잘 사들이지 않았다. 주의 기울여 관리해야 할 만한 물건 역시 장만하지 못했다. 궁색한 형편이었다. 몇 번 쓰고 버리면 그만인 주방 도구를 사용했고, 한철 지나면 목이 늘어나거나 변색하던 옷들을 입었다. 개성 있는 소품으로 꾸미는 홈 인테리어 같은 건 남의 집 얘기였다.

읽는 것을 좋아해서 월급 일정액을 책과 책장을 마련하는 데 썼지만, 장마철이면 MDF(톱밥과 같은 나무 가루를 강력하게 압착해 만든 판자)로 만든 저렴한 책장엔 금세 곰팡이가 폈고, 책들은 무덤이 되어 필요한 책 한 권을 찾기 위해선 수십 권의 책을 뒤엎어야 했다. 이사 때는 책이 사람을 잡았다. 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는 별개로 책이라는 물건(상품)에 쉬이 정이 가진 않았다.

지하에서 반지하로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연애를 시작하면서) 살림 규모도 차츰 변했다. 밥그릇, 국그릇, 면기, 수저 같은 용품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양초와 와인 잔이 필요한 순간도 찾아왔다. 중고로 산 가전제품들은 차례를 정해 놓은 듯 고장이 났다. 온라인으로 세탁기와 냉장고를 사기 위해 진열 상품과 새 상품의 가격을 비교하다 보면 자연히 낮은 가격순으로 상품을 정렬했다. 값싼 물건에는 값싼 값어치가 있고 값비싼 물건에는 값비싼 값어치가 있다 해도 값비싼 물건 앞에선 일순 마음새가 달라졌다. 그때 물건은 일정한 형체를 갖춘 물질적 대상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복합체였다. 더욱이 ‘집’이라는 물건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선명한 물리적 공간인 척하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에 가까웠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계약 만료 기간이 돌아왔고, 2년마다 통장 잔고는 0이 되었다. 집을 어떻게 채울까보다 집을 어떻게 비울까를 더 많이 계산했다.

그런 시절과 생활 속에서 내가 잠시라도 물건에 담긴 뜻을 헤아려볼 수 있었던 건 내 돈을 주고 산 물건이 아니라 남이 (보내) 준 물건 때문이었다.

부모가 보내온 택배 상자에 담긴 열무김치, 미숫가루, 햇참깨로 짠 기름,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 같은 것들, 자신이 사무실에서 키우던 거라며(처치 곤란이라며) 친구가 건넨 고무나무 화분, 연인과 하나씩 나눠 가진 커플 열쇠고리, 밀린 급여와 퇴직금 대신 받은 자동카메라. 내가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시작된 물건을 통해 나는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비(非)상품으로서의 물건, 물건을 주거나 받는 마음, 값어치로 환원할 수 없는 물건의 가치 같은 것들에 관해 종종 궁리했다. 물건에 담긴 타인의 언어를 해석하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은 물건을 물건으로만 보는 나를 잠시 다른 차원의 집으로 이동시켰다. 그 물건들은 오래지 않아 모두 사라졌지만, 그때의 질문, 사고, 상상을 원동력으로 삼아 쓴 글들은 남아 있다.

 

최근에 두 사람에게서 ‘껍데기’를 선물로 받았다.

한 사람은 나트랑 해변에서 주워온 하얀색 조개껍데기를, 다른 한 사람은 삶아 먹고 남은 뿔소라 껍데기에 리본을 매달아 주었다.

타인을 세심히 관찰하고, 타인의 언어를 경청하며 글을 쓰는 데 익숙한 e는 선물을 건네며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현은 껍데기를 껍데기로 여기지 않을 것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그이는 나에게서 어떤 나를 발견한 것일까. 나도 듣지 못하는 마음의 소리를 그가 들은 건 아닐까. e에게서 받은 조개껍데기를 한밤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보다가 불현듯 울어버렸다. 그가 내게서 본 것이 혹시 슬픔의 알맹이는 아닐까, 기쁨의 껍데기는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타인의 슬픔을 존중할 줄 알고 위로를 적당한 무기가 아니라 최선의 방패로 여길 줄 아는 e라면…. e의 물건, e가 전해온 언어, e에게 연결된 마음 때문에 나는 이러한 물음과 마주 앉아 있었다. 

나트랑 해변에서 주워온 하얀색 조개껍데기와 삶아 먹고 남은 뿔소라 껍데기. 최근 두 사람에게 선물로 받은 껍데기들.

껍데기에는 알맹이가 없는가.

뿔소라 껍데기를 전해준 p는 자신 안으로 밀려왔다가 밀려가고 다시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사랑과 영혼의 대화라고 적을 줄 아는 시인이다. 죽음이 근린공원 벤치 아래에 있고, 일요일의 묘지에 사랑이, 눈송이가 녹을 때 작별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문장으로 표현하는 사람. 한번은 초록 숲과 황새가 나오는 p의 꿈에 내가 등장해서 나는 p로부터 근사한 예언을 들었다. 뿔소라 껍데기는 그 꿈과 예언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p는 말했다. “너와 네 짝꿍의 행복을 축원할게.” 뿔이 난 소라, 껍데기에는 나는 모르는, (어쩌면) p도 모르는, 오로지 꿈을 꾸는 시인만이 알 수 있는 메시지가 함유돼 있는 거구나, 나는 믿었다. 그 메시지를 해석하기 위해 껍데기에 귀를 대보고(파도 소리) 눈을 대보고(어두워요!) 입술을 대보고(진실을 말하죠) 시를 썼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발적으로 물건을 사는 연습이 아니라 타인에게 물건을 받는 수련을 통해 물건의 의미, 타인의 의미, 삶의 의미를 헤아리는, 쓰려는 사람으로 자라온 게 아닌가 싶다. 이제 나는 물건에 대한 ‘끝 마음’이 점점 더 넓어지는 사람이 돼 가고 있다. 요즘은 타인에게 말 걸기 위해 기쁨이 수 놓인 손수건이나 작은 새가 그려진 찻잔 같은 물건을 장바구니에 자주 담는다. 소재가 좋아서 여러 해를 입어도 튼튼할 법한 옷을 고르고, 유해 성분이 덜 함유된 주방 도구를 찾고, 경량 노트북 같은 걸 살 때면 낮은 가격순이 아니라 신상품순으로 정렬해보는 여유로움도 생겼다. 물건을 잃어버리고도 앞뒤 없이 긍정적이던 성미는 옅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건을 곁에 오래 두고 보는, 아끼는, 물건을 그저 물건으로 보지 않는 이와 함께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20년도 더 된 CD 플레이어를 사용하는 그를 보며 간혹 생각한다. 나 같은 게 어디서 저런 물건을 찾아서 만나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물건에 관한 변함없는 믿음은 이런 것이다.

내가 아니라 물건이 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잃어버린 물건은 대체로 당신에 의해 발견된다.

 

글. 김현 

김현
2009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으로 『글로리홀』과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