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무본당(務本堂) 아카데미 열다

2020-06-23     강우방

알렉산더대왕의 최측근 프톨레미 1세가 기원전 4세기에 지은 세계 최대 규모였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나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나 하버드대 와이드너 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는, 문자언어로 쓰여진 책들에는 여래의 본질을 말하는 문구는 한 줄도 없다. 그러나 지구를 장엄하는 모든 건축과 조각과 회화에서 조형언어로 쓰여진 조형 예술 작품들을 찾았다. 그리고 여래의 본질을 웅변하는 침묵의 언어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본당(務本堂) 아카데미를 열었다.

 

| 홀로서기라는 운명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게 놀라거나 가슴 벅차게 환희작약(歡喜雀躍)한 적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일이 있는지 물어보면 모두가 있다고 말하기는 한다. 어떤 체험인지 물으면 거의 하찮은 일들이다. “로또가 당첨되면 누구나 놀라겠지요.” “베토벤 제9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 가슴 벅차겠지요.” 그런 것은 환희작약에 해당하지 않는다. 어떤 큰 장애물을 스스로 힘으로 극복했을 때 환희작약한다.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하고 나면 그때 감격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에베레스트산만큼 거대한 정신적인 장벽을 극복하면 어떨까? 그것은 육체적인 등정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기쁨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에베레스트산은 아무리 높아도 등정을 마치면 다시 내려와야 한다. 정신적인 장벽에는 하산이 없다.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없어서 내려오는 법이 없는데 그것은 살아있는 한, 인식의 과정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식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문제는 달라진다. 만일 그런 놀라움이나 환희작약한 적이 없다면 당신의 삶은 항상 같은 상태에서 머물고 있다는 증거이자, 단지 알음알이에서 만족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알음알이를 크게 경계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력신앙(自力信仰)의 철학이고 신앙이다. 신앙은 확신이다. 만일 『화엄경』을 읽으려면 어느 고승이 그 경전을 주석한 매우 두툼한 책을 사서 읽기 마련이다. 화엄경을 참으로 이해하고 싶으면 주석이 없는 경전만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서 자력으로 해독해야 한다. 어느 고승이 주석한 책을 읽으면 그 고승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지 경전의 말씀은 터득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타력을 빌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자력으로 터득하면 그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과 환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경전을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경전에 나오는 ‘법계(法界, 우주 만법의 본체인 진여)’라든가 ‘인드라망(因陀羅網, 세상을 덮고 있는 한 없이 넓은 그물)’ 그리고 ‘우보(雨寶, 비처럼 쏟아지는 중생을 이익케 하는 보배로운 가르침)’라든가, 그리고 ‘선재동자가 관음을 찾아가서 절대적 진리를 묻는 장면’ 등을 스스로 익혀서 생활이나 학문이나 창작활동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아마도 싯다르타 태자는 정각을 성취했을 때 가장 크게 환희작약했을지도 모른다.

불상에서 ‘석가여래 삼존불’이라 하면, 석가여래의 양옆에 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도상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래는 대장부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협시보살은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화려한 모자[寶冠]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寶髮]이나 목걸이나 팔찌, 그리고 화려한 옷들을 보고 아직 세속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싯다르타 태자는 왕궁의 담을 넘어 숲에 이르러 모든 화려한 옷이나 장식을 벗어서 마부인 찬타카에게 넘겨준다. 불화와 불상에 나타나는 보살을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것은, 출가 전의 세속적인 모습이라고 대부분 스님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와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보관이나 몸에 두른 여러 가지 장식은 단지 그런 장식이 아니다. 그래서 아직도 여래와 보살을 구별하지 못한다. 다른 점을 설명해 보라면 올바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석가모니의 양쪽에 서 있는 보살의 얼굴을 보면 양미간의 백호나,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으므로 여성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수염이 아니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양어깨를 타고 내려와 허리까지 이르므로 연구자들도 혼란에 빠진다. 경전에 보살을 두고 ‘착한 남자야’라고 부르고 있는데도 여성으로 알고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이 글에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큰 주제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제1영기싹’과 관련이 있다. 앞으로 ‘제1영기싹’은 만물생성의 근원임을 더 설명하게 될 것이다. ‘제1영기싹’은 1만 점 이상의 작품을 필자가 개발한 ‘채색 분석법’이라는 조형 해독법으로 얻은 결론이므로 설명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 진리는 세계 최초로 발견하여 지금까지 연구를 해오고 있으므로 2007년 이후에 출판된 저서들을 정독해 주시기 바란다. 

여래의 양 협시는 사람이 아니고 여래가 지닌 가장 큰 덕목인 ‘지혜’와 ‘실천’을 의인화(擬人化)한 것이다. 지혜는 배워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실천도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얻으면 스스로 실천하기 마련이니 지혜와 실천은 불이의 세계에서 하나가 된다. 싯다르타 태자가 정각을 성취한 후 얻은 지혜를 철저히 실천하며 진리를 보여 주는 것이 ‘석가여래 삼존불’의 참된 의미이다. 

미술사학을 평생 독학했다. 공무원 신분이었으나 학예직이란 전문직이었다. 박물관에서 조형 예술품과 함께 살아오면서, 스스로 가진 문제의식으로 주제를 잡고 꾸준히 논문을 써나갔으며, 저서도 여러 권 냈고 일본이나 미국 등 해외에서도 학술 활동을 했다. 한편 줄곧 문화부나 문화재청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점들을 비판하거나 그 당시 대통령 이름들도 거론하여 모두를 곤혹스럽게 만들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필자를 견제할 수 없었던 것은 박물관과 한국을 대표하는 학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미술사학계를 향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그러므로 책상 위의 학자가 아니라 실천적인 행동인이였다고 자부한다. 

남들처럼 학교 점수에 연연하는 학생이었다면 현재의 필자는 없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는 학교에서 정식으로 초청한 유학생 신분이었으며, 학위에 연연하지 않고 작품 조사에 몰두했다. 대학에서는 미술사학 강의를 들은 바도 없고 하버드대학원에서는 영어 듣기가 안 되어 그 덕분으로 학문적으로 덜 오염이 된 것 같다. 지금에 이르러 자력으로 고구려 벽화 80%를 차지하는 무엇인지 모를 무늬를 밝히기 시작하면서 불상 광배와 목조건축인 사찰 법당의 공포를 풀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즈음 삶과 예술과 학문에 큰 소용돌이가 일었다. 고구려 벽화와 함께 연구한 것이 바로 ‘용(龍)’이며 그 연구 성과로 앞으로 닥칠 암담한 현실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벽화와 용을 연구하면서 불상의 광배를 풀어내고 사찰건축의 공포를 풀어내는 한편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엄청난 세계의 오류와 홀로 맞서야 할 운명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만든 낯선 용어들이나 고차원의 어려운 해석을 사람들에게 쉽게 전해야 하고, 서로 소통하는 난문제를 스스로 풀어내야 하는 것도 운명이었다.

무본당 현판. 중국 서당에 걸었던 현판, 19세기.

 

| 조형 언어 연구·교육 베이스캠프 설립

큰 소용돌이를 거쳐서 망망대해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플라톤이 그런 것처럼 아카데미를 열어야 했다. 그 아카데미가 ‘무본당(務本堂)’이었다. ‘무본(務本)’이란 말은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데, ‘무본 본립이도생(務本 本立而道生)’에서 따온 것이다. ‘근본에 힘써 근본이 정립되면 방법[길]은 저절로 생긴다’라는 말이다. 인류 역사상 아무도 가르친 적이 없는, 세계에서 조형 언어를 가르치는 유일한 학교이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했다. 고구려 벽화 연구를 계기로 필자의 관심은 무제한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건축-조각-회화-도자기-금속공예-복식 등 모든 장르로 퍼졌다. 그러나 체계적이어야 하고 이론을 튼튼히 정립해야 하고, 방황하는 교수나 학생을 널리 올바로 가르쳐야 했다.

마침내 2004년 9월 1일, 이화여대 후문 쪽에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一鄕韓國美術史硏究院)’을 열었다. 현판은 『삼국유사』를 집자(集子)하여 새겼다. 무본당(務本堂)은 당호다. 일향(一鄕)은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한 마을[一鄕]로 삼았네’라는 노래에서 땄다. 1층, 2층 합하여 100평 공간이어서 넉넉했다. 그즈음 가족과 인사동에 갔다가 어느 중국 작품 파는 곳을 지났다. 저 높이 매단 나무 조각을 자세히 보니 100년 전쯤 중국 어느 서당에 걸어놓았던 현판이었다. 중심에 중국이나 한국의 아카데미인 서당(書堂)이 조각됐고 앞에 공자가 서 있었으며, 서당 현판에는 ‘무본당(務本堂)’이라 새겨져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용과 봉황과 보주와 제1, 제2, 제3영기싹 영기문이 빼곡히 조각됐다. 

1층 강의실에 서당 현판을 걸어놓았다. 2층은 개인 연구실로 삼고 드디어 매우 정교한 고구려 벽화 연구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기 시작했고 1층에서 매주 2회 강의했다. 수요일에는 고구려 무덤벽화를 강의했고, 목요일에는 특히 고구려 벽화에서 건축 관련 조형만을 강의했으며 이화여대 공대 건축과 대학원생들이 와서 열심히 들었다. 수요일 강의에서 100여 기에 이르는 고구려 무덤벽화를 자세하게 강의하는 데 꼬박 한 해가 걸렸다. 이런 강의는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으며 수강생도 대학원생들 외에 대학교수나 화가, 조각가, 작가도 많아 매우 수준 높았다. 무본당을 세계 문화 연구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야심은 아직도 식지 않고 있다. 고구려 벽화에 대한 강의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무본당을 개원하고 고구려 벽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크게 놀랄 수 없는 놀라운 진리를 깨쳐나갔다. 그때마다 용후[龍吼, 사자후(獅子吼)란 기존 용어 대신 만든 말]했다. 동시에 분노의 외침이기도 했다. 이전 연구는 벽화의 내용을 대략 살폈기 때문이다. 

 

| 고구려 벽화 연구의 길로

고구려 벽화 연구자는 한국은 물론 일본-중국-독일-미국-영국 등 전 세계에 매우 많은 편이다. 그들에 비해 필자는 가장 늦게 시작한 편이다. 무본당 개원 후 국내외에서 발간된 고구려 벽화에 관한 저서나 도록을 모두 수집했다. 일본에서 발간한 『고구려 고분벽화』는 가장 중요한 책이다. 1985년 조선화보사에서 출판한 대형판의 책은 고구려 벽화의 중요 작품은 거의 망라한 것이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책을 비롯하여 국내외에서 발간한 여러 고서를 구하기도 하고, 당시 갑자기 고구려 벽화에 대한 수많은 전시가 이곳저곳에서 열려서 수많은 도록도 발간되었다. 유난히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고구려 벽화 모사품 전시가 많았다. 그래서 빠지지 않고 몇 번이고 가서 세밀히 조사했다. 

또한 한국 정부 관련 기관들은 북한에 가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직접 촬영하여 도록들을 경쟁적으로 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찾아가 그 조사원으로 함께 가고 싶다고 해도 고구려 벽화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곤 했다. 

무본당에 건 현판
一鄕은 내 아호이며 글자는 삼국유사에서 집자.

고구려 무덤벽화는 모두 북한의 황해도 지역과 평양 지역, 그리고 집안 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나 모두 보존 관계로 밀폐되어 있어서 남한 학자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고구려 벽화는 우리나라 미술사학 연구를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회화임을 절감했다. 필자는 고구려 벽화가 한국 미술사 전체를 해독할 것을 이미 확신했다. 모든 벽화 무덤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각각 밑그림을 그려서 채색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100여 기 무덤벽화를 심층적으로 해독하고 나니 고려불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그런 조형들과 관련 있는 조선불화나 금속공예나 조각 등 모든 시대의 모든 장르를 함께 다루느라 고구려 벽화 전체를 강의하는데 이미 말한 것처럼 한 해가 걸렸다. 매일매일이 드라마였다. 그리고 매년 처음에 알지 못했던 조형을 밝혀내고 잘못한 해독은 수정하기를 몇 회를 계속하여 15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강의하고 있다. 고구려 벽화에 대한 저서를 아직 내지 못하고 있으나 아마도 몇 년 후에는 『고구려 벽화의 신(新)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 성과가 세상에 나오리라 믿는다. 

21세기 들어서서 IT 정보기술이 급격히 발달하지 않았다면 어찌 뜻을 펼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작품 사진을 많이 찍고, 매일 채색 분석하는 최근 작업은 특히 컴퓨터와 디지털카메라, 스캐너, 프린터 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복잡한 분석 작업은 불가능할 뿐더러 개척한 새로운 세계를 단계적으로 채색 분석해 대중에게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기기들 앞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무본당을 열고 답사가 잦아지고 박물관 조사가 매일 이루어지므로 컴퓨터 앞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집중적으로 15년 동안 찍은 사진들은 대강 10테라바이트가량 된다. 10테라바이트는 1,000만 메가바이트이니 사진 수량은 엄청난 것이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필자의 이론은 아마 정립하기 어려웠으리라. 

무본당 개원 후 어느 해 10월에는 독일 베를린 자유백림대학이 주최하는 고구려 무덤벽화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한국, 일본, 이탈리아, 독일 등 전 세계 학자가 참여한 국제심포지엄이었다. 학자들은 기왕의 내용을 반복했다. 이 심포지엄은 필자가 고구려 벽화로 세계무대에 선 첫걸음이었다. 그럴 즈음 갑자기 그리스 여행의 기회가 생겼다. 하늘의 뜻인가. 첫 그리스 여행은 삶과 학문을 다시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글. 강우방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