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코로나19 그후, 우리] 신과 함께 아닌 거리두기 공업 책임지는 인간 종교로

한국종교의 길을 묻다

2020-06-23     윤승용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변화의 시험대로 옮겼다. 비일상의 일상화. 변화의 폭풍은 가라앉고 인류는 살아남겠지만 다른 세상에 살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3월 11일 전염병 최고 위험 등급인 6단계, 즉 ‘감염병 세계 유행’을 뜻하는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1968년 홍콩독감과 2009년 유행한 인플루엔자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다. 5월 15일 현재 코로나19 확진자 현황에 의하면, 누적 감염자가 450만 명으로 집계됐고, 사망자는 3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전 인류의 일상을 가로막고, 전 세계 경제까지 마비시키고 있다. 그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다. 문제는 아직도 사태가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는 세계에서 의료기술이 가장 발전했다는 미국과 일본에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 중이다. 방역에 관한 여러 논란이 트럼프와 아베 정권의 위기까지 초래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일상적인 종교 활동을 크게 변화시켰다. 마스크 착용과 손 소독은 자신과 남을 향한 배려임을 각인시켰다.

 

| 팬데믹과 달라진 세상 

팬데믹으로 전 세계 국가들이 긴장하고 자국 중심 각자도생의 길을 찾는다.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추구해 왔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려놓고 자국 중심 탈세계화의 길로 나서고 있다. 그리고 대량 실업 등 경제적 재앙이 우리 앞을 가리고 있다. 저물가·저성장을 지속하는 일본처럼 장기적 불황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세계적 분업체계의 단절로 기업은 생산에 큰 타격을 입고 있으며, 자영업자와 같은 소상공인들은 개인의 소비가 줄면서 영업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이 모든 면에서 제약을 받으면서 이전의 생산방식과 소비패턴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노동형태가 달라져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비대면의 온라인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대중은 실시간으로 투명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다중의 지혜를 드러내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만들고 있다. 또 성장과 발전에만 집착했던 선진국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공동체 안전을 위한 재난 관련 공공대책을 크게 강화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집단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집회 문화에도 큰 변화를 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전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한편 삶의 목적은 안전과 복지를 추구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위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성장과 발전의 사회 모델은 삶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생존에 필요한 것일 뿐 바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근대 이후 과도한 산업화, 도시화, 자본화로 인간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이 크게 훼손됐다. 개인 중심의 과도한 경쟁과 무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지배이념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장을 크게 파괴했다. 그 결과 코로나19와 같은 큰 재앙이 밀려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19 확산을 개인 잘못으로만 돌리는 것은 또 다른 전염병을 초래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생활 방식과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한, 전염병은 점점 더 큰 규모로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빙하에 덮인 동토층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밀림의 벌채가 계속되면 전염병의 거처는 우리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전염병은 그저 살고자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다닐 뿐이다. 전염병을 부른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그 해결 방향을 찾아야 한다. 

 

| 초월적 믿음만 강조하면 전락

종교와 코로나19에 관련해서는 2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논의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신천지와 같이 공공 방역 규범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행사를 열어 다중을 감염시키는 사례고, 다른 하나는 코로나19를 악령으로 간주해 종교적인 힘으로 침투를 막거나 치유한다는 사례다. 

전자는 공공규범을 무시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종교행사를 강행해 감염자를 무더기로 발생시킨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프랑스나 인도, 이스라엘 등의 종교집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회 금지를 목타게 외치고 있지만, 그들은 믿음과 격려 그리고 기쁨과 긍정적인 기운을 얻기 위해 종교집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항변한다. 심지어 종교 자유까지 들먹인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초정통파 유대교는 집회 금지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따르며 폐쇄적인 생활을 하기에 상대적으로 많은 확진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후자는 종교적 힘이 코로나19를 막거나 치유한다고 주장하는 사례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신종교 단체인 ‘행복의 과학(Happy Science)’을 들 수 있다. 이 단체 홈페이지에는 ‘믿음으로 면역력을 높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물리치자’는 문구가 적혀 있다. 교주는 코로나를 사멸시킬 수 있는 법력(신통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도 ‘중국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 격퇴 기원’이라는 행사를 진행 중이다. 교주가 신통력을 사용해 악령인 코로나19를 퇴치한다는 것인데, 이는 무속의 치병 굿 처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병원균 바이러스 처방이 아니라 병원균을 가져다준 존재, 즉 악령을 쫓거나 위로하는데 집중한다. 이는 축귀 의식을 통한 심리적인 위로지 병에 대한 치료 행위는 아니다. 

종교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세 삶을 사는 인간의 종교여야 한다. 삶을 중심으로 하는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가질 때 인간의 안전과 복지에 복무하는 종교로 전환 가능하며, 절대 진리나 초월 신의 의지도 고통받는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 성찰하는 인간이 없으면 어떤 종교도 현실에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절대 진리나 초월적 신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종교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선택 의지를 배제한다면 그 종교는 단순한 초월적 믿음이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같은 성찰적 인간을 배제한 교조적인 종교는 현장에 너무 많다. 예컨대 삶을 사는 인간이 없는 종교, 이성을 마비시킨 광신, 사랑과 희생이 없는 종교, 신앙조직에 매몰된 종교, 상식을 상실하게 만드는 종교 등은 인간의 종교가 아니다. 현실을 변화시키고 진리를 구현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코로나19 확산의 근원이 된 우리나라 ‘신천지 교회’나 ‘유대교 초정통파’와 같은 사회 공공규범을 지키지 않은 종교, 일본 ‘행복의 과학’이나 치병 굿을 행하는 무속은 인간의 구체적 삶을 극단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이미 인간의 종교가 아닌 절대 진리나 신의 종교로 전락했다. 

 

| 신비·사이버 종교 등장 예고

코로나19 사태가 아직 진행 중이라 이후 한국종교의 변화를 조감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를 고려해서 종교 자체와 한국 개신교, 한국불교 순으로 간략하게 정리해보기로 한다.

우선 종교 자체도 큰 변화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라 간주하던 영역 바깥에서 영성이나 종교성을 구현하는 현상들이 등장할 것이다. 제도화하고, 조직화한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출현한 파생적 종교들이다. 표준화된 제도 종교를 넘어선 영성 종교, 과학과 융합된 신비 종교, 사이버에서만 존재하는 사이버 종교 등 다양한 형태의 종교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신 중심적 종교 개념들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탈종교 현상과 종교 다원화 현상까지 재촉할 것으로 보인다. 또 비대면 소통과 개방을 추구하는 인터넷 문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종교도 비대면 인터넷 집회방식을 더욱 확산시킬 것으로 보인다. 집단감정을 유발하는 부흥회식 집회 방식이나 거대한 대형건물 내에서 행하는 집회방식은 축소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건물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종교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다음은 개신교다. 한국 개신교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세계적인 대형교회들이 대도시에 즐비하다. 50년대 한국전쟁기와 70년대 이후 한국 산업화기에 크게 성장했고, 이후 중산층 중심의 대형교회들이 등장했다. 해방 이후 미 군정을 거치면서 친미반공 미국의 종교로, 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농촌 이주자를 대거 흡수한 도시 종교로, 80년대 중산층을 흡수한 세계적인 대형교회로, 90년대 종교 시장을 주도하는 성공 종교로 자기 변신을 하면서 한국의 주도적 종교가 되었다. 

이 같은 한국 개신교에는 전통문화를 부정하는 정복주의와 지배 권력에 부합하는 정치적 현실주의, 승자 독식을 주장하는 시장주의 등이 도사리고 있다. 이들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미국의 성장 모델과 그 이해에 굳게 결합하고 있다. 해방 이후 미 군정이 들어서면서 한국인은 생존을 위해 미국을 추종해야 했고, 과잉 미국화의 과정을 밟아 왔다. 여기에 편승한 종교가 바로 한국 개신교다. 특히 한국 개신교 주류에 해당하는 한기총과 뉴라이트와 같은 ‘보수 우익의 개신교’다.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제2의 미국으로 만들려고 한다. 실제 이승만의 기독교 건국론이나 이명박의 복음 정부론은 그것의 연장선에 있다. 이런 일들은 한국 개신교의 이미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냉전의 패권을 상징하는 미국의 종교, 성장과 발전을 상징하는 도시의 종교, 성공지상주의의 산물인 대형교회 등이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코로나19 이후 사회 변화를 고려해 본다면, 이들 개신교 이미지는 그 상징성을 상실할 때가 다가왔다. 탈냉전시대에 반공의 미국종교, 연대와 상생 시대에 도시의 종교, 비대면 시대에 대형교회 등은 이미 시대와 연계성을 상실한 이미지다. 더구나 미국은 ‘세계 경찰국가’를 포기하고 자국 우선주의 입장을 취했다. 반면 한국은 K-방역을 계기로 세계 선도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사회 모델을 대변해온 한국 개신교, 특히 성장과 발전만 추구하는 대형교회나 번영신학은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제 한국 상황에 맞는 새로운 토착적 개신교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해방 이후 분열로 근대적 체제 정비가 부족했던 한국불교도 코로나19 이후 시대변화에 대처하는 대안들을 지금이라도 잘 준비해야 한다. 무조건 전통만 고수하면 최소한 존속한다는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할 때다. 스님의 불교가 아니라 이제 스님과 신도가 함께하는 불교로 가야 한다. 

먼저 한국불교는 철 지난 개신교를 닮아갈 게 아니라 새 시대 상황에 맞는 우리식 한국불교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교단 운영에 다중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운영제도를 도입하고, 문명사 전환에 필요한 종단 체제와 교학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욕망의 절제와 사회적 공업(共業) 등 인류 미래에 필요한 불교적 대안과 그 실천 방법을 널리 알려야 한다. 

초월세계의 열반을 가르칠 게 아니다. 사바세계의 중생과 함께 하는 보살도를 가르치고, 중생의 삶 속에서의 연기와 중도, 공업과 사회적 책임 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들이 이 현재 발전 모델을 상실한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다. 문명의 전환시대 불교적 삶의 방식이 우리 사회 새로운 등불로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글. 윤승용
사진. 유동영

윤승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한국종교에 관한 날카로운 지적과 제안을 다루는 글을 쓰고 있다. 서울대 종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철학박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전문위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국신종교학회장, 한국종교문화연구소장을 역임했다. 논문으로 「종교통계로 본 한국불교」, 「한국종교의 사회세력화 형태와 전망」 등이 있고, 저서 및 편저로는 『현대 한국종교문화의 이해』, 『한국갤럽 한국인의 종교 보고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