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신화] 수행자는 안주(安住)하지 않는다

2020-05-29     동명 스님

| 광활한 벌판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왕자의 신분을 버린 싯다르타에게 광활한 벌판이 펼쳐졌다. 어디로 갈 것인가? 안락해지기 위해 출가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갈 곳이 분명치 않은 여행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가도 가도 세상은 그저 길이었다.

세상의 보통 사람에게 길은 집으로 가기 위한 통로에 해당한다. 생각해보자. 직장인들은 아침에 집을 나와 기나긴 길을 지나 직장에 간다. 열심히 일하고 나서 퇴근 시간이 되면 직장을 나서서 또 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온다. 여행을 떠나도 마지막 목적지는 집이다. 길의 종착지가 집이건만 출가자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다. 오늘날처럼 어엿하게 승가(僧伽)가 형성되어 세상에 수많은 절이 있는 시대에는 절이라는 또 다른 집이 있는 셈이지만, 출가 직후 싯다르타에게 길은 그저 허허벌판으로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와타나베 쇼코(渡邊照宏)는 출가사문 싯다르타가 아노마강을 지나 마이네야에서 동쪽에 있는 쿠쉬나가라로 간 다음, 그 근처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간다크강과 갠지스강 주류의 샛길을 따라 바이샬리로 갔다고 말한다.

다시 바이샬리를 떠난 싯다르타는 라지기르로 향하는데, 바이샬리와 라지기르 사이에는 파트나가 있다. 따라서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쿠쉬나 가라를 거쳐 라지기르까지 가는 이 길은 부처님께서 반열반을 앞두고 라지기르를 출발하여 파트나, 바이샬리를 거쳐 쿠쉬나가라로 가는 길과 거의 일치한다. 부처님께서 출가의 길을 역으로 밟아서 열반의 길로 삼은 것도 당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와타나베 쇼코,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 그 생애와 가르침』, 동쪽나라, 2005, 122쪽 참조.)

 

| 싯다르타의 옷도 하늘에서 탑이 되다

본격적으로 길을 떠나기 전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른 싯다르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출가사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은 까시국에서 만든 너무 호화로운 옷이다. 이 옷은 수행자에게 적절치 않다.’ 이때 천신가띠까라(Ghaṭīkāra) 범천이 싯다르타에게 출가자에게 필요한 필수품을 보시했다. 그것은 가사, 허리띠, 발우, 바늘과 실, 양치용 막대기를 만드는 칼, 물 여과기 등이었다. 싯다르타는 옷을 가사로 갈아입은 후 자신이 입고 있었던 화려한 옷을 공중으로 던졌다. 이를 가띠까라 범천이 받아서 색구경천(色究竟天)에 복장탑(服裝塔)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하늘나라에는 청년 싯다르타의 머리카락을 보관한 탑과 의복을 보관한 탑 등 부처님의 출가와 관련된 두 개의 탑이 생겼다.

싯다르타는 마부 찬나에게 다시 한번 당부한다. “찬나야, 너는 왕궁으로 돌아가서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드려라.” 찬나는 왕자의 애마 깐타까와 함께 돌아섰다. 깐타까는 왕자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꾸만 뒤돌아보더니 왕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제 다시는 주인을 만날 수 없구나’라는 생각에 너무도 슬픈 나머지 그 자리에서 목숨을 놓아버렸다. 깐타까가 죽은 장소에 훗날 스투파(Stūpa, 탑)가 세워진다.

혼자가 된 사문 싯다르타는 멀고 먼 길을 하염없이 걸었으리라. 신화에 따르면 천신들이 끊임없이 싯다르타를 돕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다. 궁궐에서 편안하게만 살던 왕자에게 그 여정은 참으로 힘든 것이었다. 수많은 벌레를 만났고, 수많은 물고기를 만났고, 수많은 새를 만났고, 수많은 들짐승과 산짐승을 만났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으리라. 어떤 생명체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고통을 벗어난 일은 없었다. 싯다르타에게 그런 생명체들을 돌볼 여유가 있었을까?

거친 들판을 걷고 또 걷다 보니 자신의 몸이 먼저 만신창이가 되었다. 발바닥은 부르트고, 무릎도 아프고, 배는 고프고, 목도 말랐으니, 어쩌면 출가를 후회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범부의 것이다. 전생에 이미 다진 원력으로 출가하신 분에게 후회란 없었다.

 

| 바이샬리에서 고행자 박가와를 만나다

“모든 생명체가 병듦과 늙음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이 화두를 붙잡고 사문 싯다르타는 걷고 또 걸었다. 황야를 걸으면서 싯다르타는 아마도 자신에게 이 화두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줄 스승을 고대했을 것이다.

영웅신화의 관점에서 인류 최고의 영웅 부처님이 스승을 만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지만, 최고의 스승이 다른 스승을 만나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소명의식을 가진 영웅은 초자연적인 조력자를 만난다고 하였고, 캠벨의 연구를 스토리텔링에 응용한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이를 ‘정신적 스승과의 만남’으로 구조화했다. 신화적인 논리로는 청년 싯다르타가 영웅이 되는 길에 스승을 만나는 것이 필요하지만, 싯다르타의 미래인 부처님이 최고의 스승이란 점에서 청년 싯다르타가 만나는 스승은 일시적인 스승일 가능성이 높다.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고대의 문헌에 따르면 출가사문이 된 싯다르타는 세 명의 스승을 만나는데, 고행주의자 박가와(ⓟBhaggava, ⓈBhārgava), 명상가 알라라 깔라마(ⓟĀḷā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aka Rāmaputta)였다.

부처님 전기에 따르면 고행주의자 박가와는 알라라 깔라마, 웃다까 라마뿟따에 비해 사문 싯다르타가 뭔가를 배운 스승은 아니었다. 그래선지 팔리어 문헌에는 고행주의자 박가와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산스크리트 문헌 『붓다차리타(Buddhacarita)』나 한문 문헌인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는 청년 싯다르타가 바이샬리 근처 고행림(苦行林)에서 박가와를 만나는 장면을 꽤 비중 있게 그리고 있다. 특히 『불본행집경』에 따르면, 박가와와 부처님은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바이샬리의 불교 유적지 콜후아(Kolhua). 이곳에 중각강당(重閣講堂)이 있었다고 하며 아난다스투파와 아쇼카 석주,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연못 등이 있다. 사진. 동명 스님
 
천진난만한 바이샬리의 어린이들. 사진. 동명 스님

『불본행집경』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 특별한 두 그루의 금빛 나무가 박가와의 고행림에 솟아올랐다고 말한다. 두 나무는 대단히 높고 장대했다. 그런데 그 두 그루의 나무는 청년 싯다르타가 출가하던 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나무가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높고 장대한 만큼 뿌리도 깊었을 텐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두고 천신이나 악마의 장난이라고 여긴 박가와는 두 나무가 솟아올랐을 때 상서롭게 생각하여 기뻐한 만큼 불길하게 여기고 걱정했다.

‘나의 기운이 이제 쇠잔해진 것이 아닐까? 뭔가 불길한 일이 있을 것 같다.’

박가와가 이런 걱정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준수한 청년 사문 싯다르타가 고행림으로 왔다. 박가와는 반가우면서도 두려웠다.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가와에게 싯다르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존자여, 무슨 까닭에 얼굴빛이 근심스러우며 머리를 숙이고 앉아 계십니까?”

“사문이시여, 지난날 나의 거처에 두 그루 금빛 나무가 땅에서 솟아나 참으로 높고 장엄하게 이 고행림을 장엄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두 그루의 나무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불길한 조짐 같아서 이렇게 근심하고 있습니다.”

“존자시여, 그 두 그루의 나무가 이곳에 솟아난 것은 언제쯤입니까?”

“지금부터 29년 전입니다.”

“존자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그루의 나무는 29년 전 내가 태어날 때 나의 복력으로 생긴 것입니다. 내가 전륜성왕이 되면 이곳에 원림(園林)을 만들 수 있도록 나무가 솟아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출가하자 이곳에 전륜성왕의 원림도 만들어질 리 없으므로 두 그루의 나무도 사라진 것입니다. 불길한 징조가 아니니 존자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륜성왕이 되었다면 원림을 만들 장소에 싯다르타가 수행자가 되어 왔으니, 부처님과 박가와는 분명히 각별한 인연이었을 텐데 문헌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다. 박가와를 안심시킨 후 싯다르타는 고행림 곳곳을 둘러보았다. 싯다르타는 여러 수행자에게 물었다.

“나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자비심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알려주소서.”

이에 한 수행자가 말했다.

“사람 사는 마을이 아닌 곳에서 나는 깨끗한 물과 나뭇잎과 과실과 나무뿌리를 양식으로 하는 고행림에서는 갖가지 다른 도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자는 사슴같이 풀을 먹고, 어떤 자는 새와 같이 열매를 먹고, 어떤 자는 뱀과 같이 바람을 먹습니다. 어떤 자는 돌로 부순 것을 먹고, 어떤 자는 이빨로 낟알을 씹고, 어떤 자는 남이 남긴 것을 먹습니다. 어떤 자는 머리를 말아 올려 물로 적시고 만트라를 두 번 외우며 호마(나무를 불에 태워 신에게 바치는 의식)를 하고 어떤 자는 물속에서 거북이와 삽니다. 오래도록 수행하면 뛰어난 자는 천상으로 가거나 적어도 인간계로 갑니다. 이처럼 고행으로 안락을 얻는 것이 우리 수행자들의 목표입니다.”(『붓다차리타』의 원전 번역서 정태혁 옮김, 『부처님, 이렇게 오셔서 이렇게 사시다 이렇게 가셨다』, 여시아문, 1998, 93쪽.)

싯다르타는 이 고행림의 수행으로는 결코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음을 알고 그 수행자에게 말했다.

“몸을 괴롭히는 방법으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면 괴로움에 의해서 괴로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고행자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나 그중 나이 많은 수행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여기에 오셨을 때 이곳은 활기로 가득 찼습니다. 이제 떠나시면 이곳은 텅 빈 들판같이 될 것입니다. 부디 자애로움을 버리지 마소서. 간곡히 청하건대, 좀 더 머물러주십시오.”

싯다르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친절하신 당신들을 버리고 떠나려니 저도 마음이 허전합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들과 수행하는 목적이 다릅니다. 당신들은 천상에 태어나려고 수행하나 저는 삼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 수행자는 안주(安住)하지 않는다

나의 첫 배낭여행, 뉴델리의 파하르간지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충격과 당혹감을 떠올려본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는 릭샤왈라들, 물건을 사달라고 들이미는 사람들, 길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소들로 북적이는 거리는 이방인의 정신을 앗아가 버렸다. 붓다의 신화는 청년 싯다르타가 천신들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수행자의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어쩌면 왕자의 옷을 버리고 황야에 뛰어든 싯다르타의 당혹감은 배낭여행자의 낯선 충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것이었으리라.

그런데도 붓다의 신화는 싯다르타의 출가 여정이 신들의 도움과 탁월한 인품에 힘입어 그저 평온했음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가 고난의 연속으로 그려진 것과는 대조되는 느낌이다. 예수님의 경우 고난과 수난 속에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유일신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신화가 필요했던 반면에, 부처님의 경우 태생을 중시하는 인도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태생부터가 위대한 분이어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는 신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출가사문 싯다르타는 처음으로 만난 스승 박가와를 떠나 다시 길을 떠난다. 진리를 구하는 수행자는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안주하지 않는다. 길에서 태어나셔서 길에서 교화를 펼치시다가 길에서 반열반하신 부처님의 생애가 주는 교훈이다.

 

글. 동명 스님

동명 스님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지홍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았고, 2015년 중앙승가대를 졸업한 후 구족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북한산 중흥사에서 살고 있다. 출가전 펴낸 책으로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