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불교 생활] 몽쉘통통과 종성칠조

2020-05-29     원제 스님

| 예불 종소리에 맞춰 입는 가사

선원 다각실에 몽쉘통통과 초코파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초코파이보다 몽쉘통통을 더 좋아했기에 커피를 마실 적에 언제나 몽쉘통통이었습니다. 이를 본 도반스님이 반 농담 반 진담조로 분별심을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몽쉘통통만 선택하고 초코파이는 선호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웃으며 한마디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버리려고만 할 게 아니라, 그 분별을 잘 주워다 써먹어야지요.”

무문관 16칙 종성칠조(鐘聲七條: 종소리에 7조 가사를 입다)에서 운문 스님이 말합니다.

“세계가 이렇게 광활하거늘, 무엇 때문에 종소리에 7조 가사를 입는가?”

종성칠조는 수행을 해오며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리는 경계 체험을 해본 사람들을 위한 공안입니다. 이 공안은 생사가 잠시 멈춰지며 세계가 한덩이로서 광활하다는 경계를 치러냈건만, 예불 종소리에 맞춰서 가사를 입어야 하는 식의 생사가 여전히 지속되는 것에 대한 운문 스님의 질문이자 동시에 관문인 셈입니다.

수행하다 보면 세상이 하나의 덩이로 느껴지는 경계를 거치게 됩니다. ‘나’에 대한 집중과 ‘상(相)’에 대한 집착이 엷어지며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한 덩이로서의 편안함을 느끼는 경계를 지나는 것인데, 경중의 차이는 있기는 해도 이를 공의 체험이나 무아 체험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부르는 방식이야 어찌 됐건 이 또한 사실상 경계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모든 경계란 왔다가 가는 것이며, 또한 있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경계 또한 생사의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리 신묘한 경계라 할지라도 여전히 생사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 모든 수행은 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수행은 생사를 멈추기 위함도 아니고, 좀 더 그럴듯한 형태의 생사로 격상시키고자 함도 아닙니다. 사실 생사가 멈춰지는 듯한 경계에 들어서면 그 일체감이나 편안함이 좋아서 이를 붙잡거나 유지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계에 놓여 있어야지만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고, 이 경계가 한결같이 유지되어야만 깨달음이라고 착각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행하다 보면, 경계가 멈춰지고 다시 생사가 펼쳐지는 현실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좌절감에 빠지고 착각 상태를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계에 대한 선망이나 집착이 실상 생사의 모습인데, 생사의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도리어 생사에 깊숙이 빠져버리고 야 마는 것입니다.

 

| 진리도 집착하면 문제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색 그대로 공이며 공 그대로 색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진리 그대로 이미 현상이며, 현상 그대로 이미 진리입니다. 진리와 현상이란 애초부터 한 몸으로서 원융하게 있건만, 수행의 경계를 어느 정도 체험한 사람들 중엔 진리만 붙들고 현상을 저버리는 성향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면 진리라는 하나의 원칙으로 낱낱이 벌어지는 온갖 차별적인 현상의 일들을 억지로 회통시키려 하는 일도 있습니다. 애초부터 진리와 현상이 한 몸인 것을, 둘로 분리해서 보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진리만을 고집하고 현상의 일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데, 한 스님이 그러했습니다.

출가 전부터 수행해온 스님은 ‘진리는 하나다’라는 말을 종종 해왔습니다. 나름 괜찮은 말입니다. 일체가 되어버리는 경계를 종종 체험해 왔기에 그런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스님에게 모든 진리는 하나이기에, 본인이 출가전부터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는 라마나 마하리 쉬도 부처님도 모두 차별 없는 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교의 승려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스님이 이 차별이 없다는 진리만 취하고 이를 고수한 나머지, 법당에서 불경은 보질 않고 라마나 마하리쉬의 책만 가져다 놓고 읽는 데에서 생기고야 말았습니다. 당연히 대중들로부터 시비의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차별 없음이나 하나라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온갖 인연에 따른 차별의 현상들을 무시했기에 이런 결과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진리나 현상에 있는 게 아니고 그에 대한 집착에 있습니다. 현상에 매달리는 것이 욕망이며 집착인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귀하고 위대한 진리라고 해도, 이를 고집하면 진리 또한 집착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진리는 하나다’라는 말은 좋습니다. 하지만 진리며 하나며 ‘진리는 하나다’라는 말 등에 집착하게 되면 그 또한 번뇌며 고통이 됩니다. 말에도 머무르지 않고, 하나로도 억지로 귀결시키지 않으며, 진리를 고집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진리며 성품의 차별 없음을 일별(一瞥)했다 할지라도, 사람과 세상의 차별적인 현상은 여전히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인연과 인과의 원리에 따라서 세상의 일들은 끊임없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잘하는 것이며 깨달음이 익는다는 것은 이 인연에 따른 차별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이 있는 현상이 이미 그 어떤 차별이 없는 진리임을 온전하게 아는 것이고, 이를 자연스럽게 삶으로서 체화하는 것입니다. 차별 없음의 진리를 알아집착이 없게 되면, 생사로 펼쳐지는 삶의 일들을 온전한 그대로 바라보는 지혜의 안목이 열리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차별적인 생사의 일에 복잡하게 빠져들지 않게 되고, 차별 없는 진리에도 매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 걸려드는 자유에서 자유롭기

사람들은 흔히 자유를 두고 걸리지 않는 형태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야지만 자유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인연과 인과의 순리에 따른 현상은 이 세상에서 꾸준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자유로움이란 현상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현상에 걸리면서도 불편하지 않아야 하고, 종국엔 현상 그 자체로서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자유는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걸려드는 자유’입니다. 그 모든 인연에 알맞게 걸리면서도 그 현상에 구속되지 않아야 진짜 자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그 모든 현상을 통제하는 중심에서 벗어나야 하고, ‘나’라는 것도 실상 이러한 인연과 인과의 현상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 또한 현상이고 세상도 현상입니다. 이렇게 현상이라는 순리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갈 적에 본래 있던 자유의 모습들이 드러납니다.

고인(古人)이 말했습니다.

“열반의 마음은 밝히기 쉬워도, 차별의 지혜는 밝히기 어렵다[涅槃心易曉 差別智難明].”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차별 없는 진리는 알기 쉬워도 차별이 펼쳐지는 현상의 세계로 온전히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나’조차도 진리를 아는 중심이 아니라, 수많은 차별 중 드러나는 하나의 현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어느 정도의 진리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현상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진리를 알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나를 현상으로 받아들인다거나, 내가 현상이 된다거나, 내가 현상으로서 노릇을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현상이 된다’ 함은 세상의 그 모든 차별과 현상의 일들을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차별로 벌어지는 현상이 이미 차별없는 완벽한 진리임을 삶으로써 체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버릴 것 하나도 없다

중생을 떠나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생의 일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미 부처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명백하게 확인해야지 비로소 제대로 된 깨달음입니다. 그 언젠가 어느 스님이 수행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어온 적이 있습니다. 저는 ‘중생 놀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놀이’가 아닙니다. 부처는 걸리지 않습니다. 진리란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처에도 머무르지 않고 진리마저도 집착하지 않으면, 중생은 그 온갖 현상에 걸리면서도 자유롭게 됩니다.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됨으로써도 자유로움을 누리는 ‘진짜 중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과와 인연에 걸리며 중생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야 진정한 자유이고 온전한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 놀이’입니다.

몽쉘통통과 종성칠조입니다. 아침 7시엔 씁쓸한 커피에다 달콤한 몽쉘통통을 먹고, 오전 11시엔 가사를 입고 법당의 종을 칩니다. 집착하지 않고 머무르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인연에 따른 그 모든 일들을 완벽한 진리의 모습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분별하며 휘둘리는 마음으로서의 분별심은 되도록 벗어나야 하겠지만, 분별은 결코 떠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의 순리에 맞춰 잘 쓰면 됩니다. 그 모든 분별과 차별이 애초부터 완벽한 진리의 면면이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몽쉘통통이라는 과자라고 해서 모자란 것도 없고, 종성칠조라는 선문의 공안이라고 해서 고귀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 모든 것들이, 그 모든 것들로서 완벽하고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버릴 것 하나도없고, 떠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달마어록』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됩니다.

“천녀는 도를 깨닫고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았고,
찬타카는 진리를 깨달아
자신의 천한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글. 원제스님

원제 스님
2006년 해인사로 출가, 도림법전 스님의 제자로 스님이 되었다. 2012년 9월부터 2년여간 티베트 카일라스를 시작으로 5대륙 45개국 세계일주를 했다. 이후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좌우명으로 지내고 있다.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로 현재 김천 수도암에서 수행 중이다. 저서로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2019, 불광출판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