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들]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하며 밥 먹듯이 기도하라_‘사람 철학자’ 이현주 목사

2020-05-29     최호승

꼬리표가 많다. 동화작가이며 번역문학가이자 목사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게 받은 ‘관옥(觀玉)’이라거나. 이름이 없는 이들을 통칭하는 ‘아무개’ 혹은 같은 뜻의 한자 ‘무무(无無)’라는 필명도 쓴다. 꼬리표가 많은 만큼 삶의 궤적도 다양하다.
1964년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1976년 죽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으며, 동서양 유불선을 아우르며 직접 저술하거나 책을 번역하고 따뜻한 글과 말을 이웃과 나눈다. 열 번째 ‘붓다 빅 퀘스천’ 강사 이현주(77) 목사다. 그는 유나방송 대표 정목 스님, 선방 수좌 원제 스님과 ‘내 삶을 바꾸는 기도의 힘’을 주제로 ‘붓다 빅 퀘스천’ 강단에 선다.
정작 그 사람은 꼬리표를 개의치 않는다. 종교나 지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서울 조계사에 내걸린 부처님오신날 연등 아래서 이 시대의 멘토로 불리는 그를 만나 짧지만 깊은 대화를 나눴다.

| 기도로 무엇을 얻는가

“사람의 이성과 지성을 갖고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기도가 우리를 도와준다.”(법정 스님)

과연 그럴까. 세상은 제멋대로다. 내 맘 같지 않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로울까. 기도가 우리 삶의 힘이 될 수 있을까. 공허하진 않을까. 사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영역은 아니었다. 종교에서 뭘 안다, 알았다는 이야기는 겪었다는 뜻이니까. 사과도 한 입 베어 물어야 그 맛을 안다. 기도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이현주 목사는 말을 아꼈다. ‘붓다 빅 퀘스천’ 예고편이었다. 본편은 6월 13일에나 들을 수 있겠다. 커밍 순!

“차를 타고 어떤 목적지를 간다고 하면, 한 번도 안 가봐서 몰라. 그런데 내비게이션 그 친구는 알고 있단 말이지. 왜냐면 저 위성에서 내려다 보니까. 난 모르니, 길 좀 가르쳐 주시오. 이렇게 길을 묻는 기도가 있겠다. 또 하나, 이게 더 중요해. 길을 알고 가는데 기름이 떨어졌어. 그럼 못 가잖아. 인생도 마찬가지야. 기도해서 방향을 알았지만, 막상 살아보니 뻔히 아는데 안 돼. 내 힘이 부족하거나 기력이 딸려. 에너지가 필요하지. 그런 기도가 있지. 밥 먹듯이 기도해야 해. 난 지금 먹는 기도를 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길을 알고, 그렇게 사는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된 거지.”

그는 가톨릭 성직자의 말을 빌려 기도를 세 단계로 정의했다. 1단계는 생각과 말로 하는 기도, 2단계는 말이 없어지는 기도, 3단계는 사라지는 기도다. 2단계부터는 설명이 좀 필요하다. 기도하는 대상, 즉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껴 언어가 필요 없는 기도다. 그는 말의 침묵, 침묵의 기도랬다. 3단계는 존재의 침묵이다. 기도의 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단다.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전제로 기도라는 행위가 이뤄진다면, 그 대상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단계다.

“신앙생활도 아이가 성장하는 것과 같아. 먹고 싶으면 달라고, 갖고 싶으면 사달라고 조르지. 부모님 주머니 사정은 생각하지 않아. 막상 그걸 가지면 자기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지도 잘 몰라. 하지만 성장하고 성숙해지면 그게 참 터무니 없구나 알게 돼. 그럼 뭘 어떻게 해달라는 기도는 없어져.”

문경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이 과거 기도로 소참법문을 했더랬다. 적명 스님은 달라는 기도가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했다. “부처님, 이제 중생 제도 그만두십시오. 제가 당신을 대신하겠습니다. 깨달음 성취해 중생을 제도하겠습니다.” 스님은 이런 서원이 바로 기도라고 했다. 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목사인 그에게 전하니 “어어. 그래”라며 웃었다.

 

| 밥 먹는 모습만 봐도 사람을 안다

“밥 먹듯이 기도하라.” 기도의 ‘밥 철학’이다. 이현주 목사를 관통하는 두 가지 철학 중 하나다. 그는 자주 “밥 먹는 거 보면 알아”라고 말한다. 밥먹는 행위에서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밥 먹듯이 기도하라”는 이현주 목사. 그를 관통하는 철학은 ‘밥’과 ‘사람’이다.
사람이 밥을 대하는 태도에서 삶을 대하는 자세를 볼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사람은 말을 듣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얼마든지 거짓말을 하거든. 대개 밥은 무심코 먹어. 조심하지 않아. 평소에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거야. 어떤 특별한 자리에서 우리는 모두 특별한 행동을 해.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도 하고 준비를 해. 밥은 맨날 먹는 거니까 그냥 먹게 돼. 자기도 모르게 성품이 나와. 밥알 한 개가 그릇에 담겨 식탁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었는지 알면 밥을 어떻게 먹어야 할까?”

그의 아버지가 일러준 삶의 철학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밥 한 알, 쌀 한 톨에 천지인(天地人)이 들었느니라. 그러니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맞다. 하늘과 땅, 사람이 힘을 합하지 않으면 밥이 안 생긴다. “배고픈 이에겐 밥이 부처님이고 하나님이야. 수고로운 과정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밥만 그렇게 먹겠어? 그런 마음으로 살면 다른 일도 그렇게 정성껏 하지 않을까?”

그의 철학 중 다른 하나는 ‘사람’이다. 이 철학에서 그는 지위고하, 남녀, 빈부, 종교, 인종 등 모든 경계를 허물었다. 그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나를 목사라 부르는데 내가 아니라 호칭이야. 난 호칭이 많아. 남편, 아버지, 아들, 제자. 동화작가, 번역문학가 그게 다 호칭이야. 그런데 이 호칭은 특정한 상대와 특정한 일에서만 사실이지. 아내 앞에서 남편이잖아. 목사란 호칭도 교회에서 쓰는 거야. 일반화시키면 안 돼. 진짜 ‘나’는 아니잖아. ‘예수’도 짧은 시간에 잠깐 쓴 이름이야.”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삶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로 그동안 그는 법륜 스님과 교류하면서 스님이 지도법사로 있는 정토회에서 부처님오신날 강연을 하기도 했다. 지리산 실상사에 초청된 적도 있다. 월간 「불광」을 창간한 광덕 스님과도 인연이 있었다. 그가 1970년대 「기독교사상」 편집을 맡았던 시절, 광덕 스님은 그 잡지에 원고를 썼다. 원고 수발차 방문하며 교류했던 그는 “하, 젠틀맨이었어!”라는 짧은 탄성으로 광덕 스님을 기억했다.

그는 『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 『이아무개의 장자 산책』, 『티베트 명상법』 등 ‘목사’와는 거리가 먼 책을 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불광미디어와도 적지 않은 번역서를 출간했다. 『틱낫한 명상(2013)』을 시작으로 『틱낫한 기도의 힘(2016)』, 『너는 이미 기적이다(2017)』, 『간디의 편지(2018)』,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집입니다(2019)』 등. 간디를
제외하곤 모두 틱낫한 스님 글을 번역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서 동감이 되잖아. 그리고 틱낫한 스님 영어가 쉬워. 하하하.”

 

| 종교는 필요한가

왜 그에겐 예수였을까. 지금까지 삶의 궤적이나 언행을 보면 굳이 예수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궁금했다. 그는 등산에 비유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결국 정상은 하나라고 했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 종교는 으뜸인 가르침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

“불교는 부처님, 기독교는 하나님. 진리라는 정상에 오르면 그곳에서 이름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내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끔 쓰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갇히겠어. 그동안 내가 걸어온 게 종교의 길이라면 종착지는 그 종교에서 벗어나는 거야.”

탈종교화 등 종교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인구통계에 따르면 국내에 무신론자나 무종교인이 절반에 가깝다. 기도로 현실적인 부분이 충족되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무관심하거나, 현대인들은 종교에 관심이 적다. 등산을 아예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과연 종교는 이 시대에 필요한 존재일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생긴다.

“안 가도 상관없어(웃음). 종교(宗敎)는 ‘마루 종(宗)’과 ‘가르칠 교(敎)’를 써. 산마루는 산 제일 꼭대기 마루고, 마루에서 뭘 가르친다는 얘기는 가장 높은 가르침이란 말이야. ‘종(宗)’은 근본, 뿌리라는 뜻도 있는데 그 많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근본이라는 거야. 그 가르침 하나를 알면 다른 것 몰라도 되거나, 이걸 모르면 다른 것 암만 많이 알아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면 산 한 번 올라봐. 이땅에 살면서 어차피 뭘 배우잖아.”

인터뷰 말미, 현실에 치어 사는 이 시대 청춘에게 격려를 청했다. “이왕 사는 거 어떻게 살 것인가. 이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어. ‘잘살았다’, ‘멋있었다’ 하고 죽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야. 격려보다는 네 인생 네 것이니 네 마음대로 살아. 대신 다른 사람 핑계는 대지 말자.”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고생했어.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고.”

 

 

글.
최호승
사진.
유동영